약, 알고 먹는 거니? - 그림으로 보는 우리 집 약국
최서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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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어디가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가 잦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모님도, 아내도 약사 면허를 갖고 있었던 탓에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거나 필요한 약을 약국에서 구매를 하게 될 때, 나는 언제나 아내의 컨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 역시 약국 제출용과 환자 보관용 처방전을 함께 발급받아 환자 보관용 처방전은 언제나 아내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는 언제나 부모님께 척척 가져다주는 착한 학생처럼 말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매가 가능한 일반 의약품 역시 아내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살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그림 그리는 약사 최서연의 저서 <약, 알고 먹는 거니?>를 읽으면서 나는 약과 관련된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 한동안 상념에 젖곤 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장 '감기에 걸렸어요', 2장 '상처가 났어요', 3장 '속이 불편해요', 4장 '피부에 뭐가 나요', 5장 '여성들만 아는', 6장 '이럴 땐, 어떤 약을 써야 하나요?'. 각 장의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직면하게 되는 약의 오남용과 약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약사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약이라는 전문적인 지식을 만화 형식의 친근한 도구에 접목함으로써 접근성을 높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약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지만 일상에서 약 사용법을 제대로 알고 대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감기 몸살이 심하게 걸렸던 나는 가까운 병원에 들러 처방을 받았고,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기 전에 늘 하던 대로 아내에게 처방전을 보여주었더니 대뜸 다른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다시 받으라는 거였다. 나는 아픈 몸으로 운전을 해서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감기 몸살에 대한 처방전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아내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했다. 나는 결국 다른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았고 아내의 허락 하에 약국에서 처방전에 적힌 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처음에 받았던 처방전의 약은 스테로이드 성분이 과하게 포함된 약이라며 다음에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갈 일이 있어도 그 병원은 절대 가지 말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에게도 아내의 관심은 각별했다. 어렸을 때 아토피 증상이 조금 있었던 아들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날이면 여지없이 밤에 제 몸을 박박 긁어대곤 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왔던 아들은 다른 날부다 심하게 제 몸을 긁어댔고, 그날 마침 아들의 곁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아내를 깨워 아들이 바르던 연고를 어디에 뒀는지 물었다. 아들의 침대보에는 아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방울 몇 점이 묻어 있었고, 이를 보고 놀란 나는 연고를 듬뿍 짜서 발라주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들의 상처 부위에 아주 조금만 발라주고는 내 손에 있던 연고를 낚아채고는 안방으로 사라졌다.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연고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에 아주 조금만 발라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렇지 않으면 점점 내성이 생겨서 더욱 독한 연고를 바르게 될 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아내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자란 아들은 이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활기찬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들과 나의 개인 약사였던 아내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나와 아들이 약에 대한 조언이 필요할 때면 이제 늙으신 장모님께 여쭙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곤 한다. 약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약과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긁어모으는 이유도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과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사용하는 약에 대해서 언제든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고 강조 또 강조를 잊지 않았던 아내의 목소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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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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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베란다 창문을 통과한 바람이 현관문을 가볍게 흔들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야삼경에 바람도 내내 심심했던가. 잠귀가 밝은 나는 바람이 만든 인기척에 놀라 잠이 깨었다. 달아난 잠을 붙잡으려 불도 켜지 않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부림을 치다가 종국에는 불을 켜고 앉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잡았다. 바람에 실려온 성긴 소음과 습습한 우울을 배경 삼아 펼치는 한밤중의 독서 풍경이 그닥 유쾌하거나 생기발랄할 리 없지만 나름의 운치를 찾고자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을 낮게 틀고서 방안 가득 퍼지는 바람과 클래식 선율의 하모니를 한동안 듣고 있었다.


내가 느꼈던 분위기와 이 글을 읽게 될 어느 블로거의 분위기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읽었던 스티븐 킹의 소설집 제목에 비하면 그런 차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4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제목은 <피가 흐르는 곳에>. 남들 다 자는 한밤중에 읽는 책 치고는 제목이 사뭇 뜨악하다 싶겠지만 소설은 제목처럼 그렇게 과격하거나 섬뜩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사업은 미식축구와 같다, 크레이그. 상대편을 쓰러뜨리고 골라인까지 가야 한다면 제대로 쓰러뜨려야 해. 그렇게 안 할 거면 애초에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서지 말아야지.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내 경기는 끝났지. 계속 관여하고 있긴 하다만) 유니폼을 벗고 집으로 가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다. 가게는 하나뿐이고 학교는 조만간 문을 닫게 생긴, 미국의 이 평범한 시골구석이."  (p.54)


인구 600명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9살 소년,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 <해리건 씨의 전화기>, 한 남자의 인생을 3막의 형식으로 담아낸 <척의 일생>, 전작 <아웃사이더>에도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가 무고한 희생의 현장에 등장하는 어둠의 존재를 추적한다는 내용의 소설 <피가 흐르는 곳에>,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간절한 염원을 담보로 은밀한 거래로 유혹하는 '쥐'의 이야기를 다룬 <쥐> 등 4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천부적인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거야. 나는 훌륭하고 훌륭할 자격이 있고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p.220 '척의 일생' 중에서)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해리건 씨의 전화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 성공한 사업가인 해리건 씨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평범하면서도 어디에나 있음 직한 이야기인 양 작가는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당시 9살이었던 크레이그는 학교가 파하는 오후 시간에 해리건 씨의 집에 들러 그가 지정한 책을 읽어주고, 그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주일마다 일정액의 용돈을 받는다. 새로운 기기에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던 해리건 씨에게 크레이그는 어느 날 처음으로 아이폰이라는 신물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작은 기계로 인해 세상이 바뀔 것을 감지한 해리건 씨는 스마트폰이라는 손바닥 속 세상에 점차 빠져들게 되고, 두 사람은 책과 스마트폰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줄곧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해리건 씨가 어느 날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한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의 아이폰을 그와 함께 묻어주는데...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쥐>는 현실과 판타지를 교묘하게 결합한 스티븐 킹식 호러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기이하게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교열을 본 '비터 러버' 파일을 열고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부는 현실 속에서 일부는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졌고,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었다.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는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할 테고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칠 테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테고 기쁜 마음으로 단권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평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쥐였다."  (p.601 '쥐' 중에서)


파랗게 개었던 하늘엔 다시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고, 바람결에는 습습한 우울이 한밤중에 졸린 눈으로 서둘러 버무린 김치 양념처럼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타고난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는다는 것, 현실에서 벗어난 외나무다리를 건너 현실과 판타지의 좁은 경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스티븐 킹의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읽고 또 읽었다. 비가 오려나, 미뤄두었던 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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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 - 일, 생활, 연애, 인간관계, 돈 고민에 대한 마음 치료제
정신과 의사 TOMY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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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낙천적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일지라도 고민 한두 가지는 늘 달고 살게 마련이다.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게 의식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속을 태움'이라는 고민의 사전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고민이 생기는 근본적 원인은 대개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근본적 욕심 혹은 그에 상응하는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더 잘 살겠다는 의지 또는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고민이 없는 완전한 평화, 순수의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의 속성상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욕구를 제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포기한 완전한 평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하니 삶을 유지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민과 함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자연적으로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고, 또 스스로 해결하거나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이와 같은 순환이 끝도 없이 벌어지는 게 우리네 삶이라면 너무 지겹고 답답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010 삶

사는 것은 등산과 다릅니다. 거기에 산이 있어도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삶은 등산과는 다른 것이에요. 등산에서는 안 해도 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삶에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꽃을 따거나, 나비를 쫓거나, 누워서 쉬거나, 김밥을 먹거나 할 수 있어요. 삶은 즐겁게 살아도 된다는 거죠."  (p.23)


<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과의 상담 과정에서 그가 했던 조언을 차곡차곡 쌓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내린 221개의 상황별 처방전인 셈인데 짧고 간결하며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느 철학자의 조언처럼 '인생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식의 현학적이거나 듣는 이를 주눅 들게 하는 명령조의 문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자신의 상황에 어울리는 소제목을 찾아 그에 해당하는 몇 문장의 짧은 조언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리는 경험을 한두 번쯤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126 마일리지

신뢰를 쌓는 건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일리지' 같은 거예요. 관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믿음 마일리지'를 보세요. '믿음 마일리지'를 쌓으세요."  (p.150)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을 정신과 의사이자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하며 동성애자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를 더 신뢰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 전체를 부정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저자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의 3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 저를 지켜주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몇 년 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동성애자로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던 파트너의 죽음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괴로운 때 제가 메모해 둔 말이 저를 지탱해줬습니다. 또 그 경험 속에서 많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런 말들을 나누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어떤 고민이든 공통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거든요."  (p.10~p.11 '시작하며' 중에서)


저자의 221번째 마지막 조언 제목은 '현실'이다. 그에 대한 조언을 간략히 옮겨 보면 이렇다.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쪽으로는 아무것도 못 가져가는 까닭에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뤘는지 아닌지는 환상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라는 꿈을 즐겁게 꾸는 것이다'라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로 헐뜯고 경쟁하며 곧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군다.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게 헛된 짓이었음을 한숨을 내쉬며 고백하게 되지만 말이다. 커다란 바위가 풍화되는 것처럼 우리의 욕심도 시간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삶의 과정인 듯싶다. 우리가 하는 고민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부산물 혹은 작은 파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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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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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빗줄기가 훑고 간 도시의 주택가는 마치 커다란 습식 사우나로 변한 듯 후텁지근합니다. 도시에 사는 떠돌이 비둘기 떼가 먹이를 찾아 아파트 이쪽 동에서 저쪽 동 옥상으로 비행을 하고,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하던 하늘은 구름 사이로 빼꼼 푸른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비라면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러나 며칠째 이어지는 비구름은 쉽게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긴 장마 덕분에 나는 퇴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밀려 있던 책들을 마저 읽었고, 빗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오래된 추억들을 소환하여 시간의 순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뒤죽박죽 늘어놓았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역시 장마로 집에 묶이지 않았더라면 표지만 보고 무심히 흘려보냈을지도 모르는 귀한 책이었습니다. 인연이란 이렇듯 반드시 만나야 할 것들을 어떻게든 만나게 해주나 봅니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30)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로 알려진 클레어 키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맡겨진 소녀>는 1981년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쓰인,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작품입니다. 무뚝뚝하면서 애정이 없는 아빠와 집안일과 여러 자식들을 돌보느라 늘 삶에 쫓기고 허덕이는 엄마 밑에서 태어난 까닭에 "네"라는 대답조차 온전히 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란 '나'는 엄마의 출산을 앞둔 어느 날, 아이가 없는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서둘러 오느라 변변한 옷가지도 챙겨 오지 않았던 아빠는 '나'를 마치 귀찮은 짐짝처럼 낯선 친척 집에 떨어트려 놓고는 훌쩍 떠나버립니다.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나'를 떠맡게 된 킨셀라 부부는 첫날 매트리스에 오줌을 싼 '나'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은 물론 달리기 연습을 시키기도 하고, 잠들기 전에 귀지 청소를 해주는 등 이제껏 집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애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킨셀라 부부의 정성어린 돌봄과는 다르게 인근의 이웃들은 처음 보는 소녀에게 과한 호기심을 보이며 상처를 주곤 합니다. 평온하고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달이 다시 나오자 아저씨가 램프를 끄고, 우리는 달빛 속에서 사구를 내려왔던 길을 쉽게 찾아 따라간다. 사구 꼭대기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 직접 신겨준다. 그런 다음 자기 신발을 신고 끈을 묶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돌아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75)


어느 날 킨셀라 부부와 함께 상갓집에 들렀던 나는 한 이웃으로부터 킨셀라 부부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됩니다. 지금의 '나' 정도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에 대한 부부의 친절과 환대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삼 심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섣부른 판단과 왜곡된 시선과는 다르게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나 부모님이 원하는 날짜에 언제든 보내 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와 함께 짧고 행복했던 '나'의 날들도 끝이 났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p.96)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이 짧디 짧은 소설을 통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문자 텍스트가 아닌 여백 텍스트로 존재할 뿐이지만, 여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느 독자에게서 다른 독자에게로, 한 명의 비평가로부터 다른 비평가에게, 혹은 키건의 소설을 그저 이야기로 전해 들은 어느 행인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면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고, 오늘 내리는 빗물처럼 흘러넘쳐서 결국에는 이야기의 바다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말했습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진심을 전할 상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 인터넷 세상에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빈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처음부터 갖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화가 사라진 유령의 세계에 사는 우리로서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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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실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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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설명에 대한 나의 이해가 무척이나 절실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책이나 그런 부분이 있게 마련이지요. 너무 전문적이어서 전문가인 누군가의 설명이 따로 필요하다거나, 설명이 부족하여 저자의 별도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나처럼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 책은 한낱 문자 텍스트에 불과할 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의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책을 먼저 읽고 이해한 또 다른 누군가의 긴 설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별도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책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예컨대 리 차일드의 소설이 그런 부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분량은 다소 늘어나겠지만 순간순간의 세세한 설명과 묘사가 덧붙여지는 까닭에 나처럼 어눌하고 어리벙벙한 사람도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는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이 다가오는 걸 봤다. 100미터쯤 앞이었다. 큰 도로와 비스듬한 각도로 만난 그곳은 마지못해 그런다는 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런 후 계속 뻗은 길은 사과농장을 관통했다. 그는 그쪽으로 계속 걸었다. 절반쯤 갔을 때 거대한 견인 트럭이 지나갈 수 있도록 풀밭인 갓길로 올라서야 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그 트럭은 밝은 빨간색에 흠집 하나 없이 깔끔했다."  (p.202)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무협지에 한동안 빠져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무협지라는 게 말이죠 모든 무협지에 양념처럼 자주 등장하는 기본 단어들과 지명들만 알면 무협지는 그야말로 유아용 만화책에 버금갈 만큼 쉽디쉬운 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가 무협지에 빠져든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게 부정적이고 시큰둥하게만 보였던 남자 중학생의 눈에 무협지는 자신의 무료한 시간을 채워줄 꽤나 괜찮은 도구였던 셈입니다. 리 차일드의 소설은 어쩌면 중학생 시절 내가 읽었던 무협지의 재판이거나 서양판 무협지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그와 같은 소설을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부끄럽지만 나의 수준이 딱 거기까지인 걸 어쩌겠습니까.


"그는 총을 겨눴다. 그녀는 쏟아지는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그걸 뚜렷하게 봤다. 그녀는 시청했던 TV 드라마들에 나온 그 총의 브랜드를 알아봤다. 글록. 확실했다. 상자 모양으로 오밀조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앞부분의 총신은 새틴으로 마무리돼 있었다. 정밀한 부품. 가격이 1천 달러는 돼 보였다.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패트리샤 마리 선드스트롬, 25세, 칼리지 2년 재학, 제재소 노동자. 술집에서 만난 감자 농사꾼하고 짧은 기간 행복했다. 평생 예상했던 것보다 더 행복했다. 그녀가 알던 행복보다 더 행복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딱 한 번 더."  (p.513)


리 차일드가 쓴 잭 리처 시리즈가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입니다. 어떤 무협지의 주인공도 정의의 반대편에 선 자에게 쓰러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10호실>에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는 메인에서 샌디에이고로 가던 도중 낯익은 지명에 이끌려 잠시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 스탠 리처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은 바로 뉴햄프셔의 래코니아였습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잭 리처는 원치 않았던 사건에 이리저리 휘말리게 되지만 헌병으로 복무했던 그의 화려한 경력과 녹슬지 않은 실력 덕분에 위험천만한 상황을 가뿐하게 넘어서곤 합니다.


'희망은 최선을 기대하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서 세우는 것이다.'  (p.176)


대부분의 잭 리처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작가의 좌우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악인들을 상대함에 있어 무자비한 면모를 보여주는 잭 리처의 활약은 모든 걸 법과 제도에 의지하는 현대의 독자들에겐 한 줄기 청량제 구실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책의 리뷰를 마침에 있어 한 가지 개인적인 소원을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자유를 사랑하고 틈만 나면 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는 한 사람, 비록 겉으로는 정의의 사도인 양 행세하지만 세상의 모든 악이란 악은 모두 제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듯한 그 사람을 잭 리처가 나타나 소설에서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10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사라질 듯합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눅눅한 습기가 묻어 들어오는 걸 보면 다음 주에도 장마가 이어질 듯합니다. 현실처럼 눅눅하고 어둑어둑한 장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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