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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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베란다 창문을 통과한 바람이 현관문을 가볍게 흔들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야삼경에 바람도 내내 심심했던가. 잠귀가 밝은 나는 바람이 만든 인기척에 놀라 잠이 깨었다. 달아난 잠을 붙잡으려 불도 켜지 않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부림을 치다가 종국에는 불을 켜고 앉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잡았다. 바람에 실려온 성긴 소음과 습습한 우울을 배경 삼아 펼치는 한밤중의 독서 풍경이 그닥 유쾌하거나 생기발랄할 리 없지만 나름의 운치를 찾고자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을 낮게 틀고서 방안 가득 퍼지는 바람과 클래식 선율의 하모니를 한동안 듣고 있었다.


내가 느꼈던 분위기와 이 글을 읽게 될 어느 블로거의 분위기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읽었던 스티븐 킹의 소설집 제목에 비하면 그런 차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4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제목은 <피가 흐르는 곳에>. 남들 다 자는 한밤중에 읽는 책 치고는 제목이 사뭇 뜨악하다 싶겠지만 소설은 제목처럼 그렇게 과격하거나 섬뜩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사업은 미식축구와 같다, 크레이그. 상대편을 쓰러뜨리고 골라인까지 가야 한다면 제대로 쓰러뜨려야 해. 그렇게 안 할 거면 애초에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서지 말아야지.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내 경기는 끝났지. 계속 관여하고 있긴 하다만) 유니폼을 벗고 집으로 가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다. 가게는 하나뿐이고 학교는 조만간 문을 닫게 생긴, 미국의 이 평범한 시골구석이."  (p.54)


인구 600명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9살 소년,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 <해리건 씨의 전화기>, 한 남자의 인생을 3막의 형식으로 담아낸 <척의 일생>, 전작 <아웃사이더>에도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가 무고한 희생의 현장에 등장하는 어둠의 존재를 추적한다는 내용의 소설 <피가 흐르는 곳에>,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간절한 염원을 담보로 은밀한 거래로 유혹하는 '쥐'의 이야기를 다룬 <쥐> 등 4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천부적인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거야. 나는 훌륭하고 훌륭할 자격이 있고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p.220 '척의 일생' 중에서)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해리건 씨의 전화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 성공한 사업가인 해리건 씨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평범하면서도 어디에나 있음 직한 이야기인 양 작가는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당시 9살이었던 크레이그는 학교가 파하는 오후 시간에 해리건 씨의 집에 들러 그가 지정한 책을 읽어주고, 그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주일마다 일정액의 용돈을 받는다. 새로운 기기에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던 해리건 씨에게 크레이그는 어느 날 처음으로 아이폰이라는 신물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작은 기계로 인해 세상이 바뀔 것을 감지한 해리건 씨는 스마트폰이라는 손바닥 속 세상에 점차 빠져들게 되고, 두 사람은 책과 스마트폰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줄곧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해리건 씨가 어느 날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한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의 아이폰을 그와 함께 묻어주는데...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쥐>는 현실과 판타지를 교묘하게 결합한 스티븐 킹식 호러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기이하게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교열을 본 '비터 러버' 파일을 열고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부는 현실 속에서 일부는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졌고,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었다.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는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할 테고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칠 테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테고 기쁜 마음으로 단권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평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쥐였다."  (p.601 '쥐' 중에서)


파랗게 개었던 하늘엔 다시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고, 바람결에는 습습한 우울이 한밤중에 졸린 눈으로 서둘러 버무린 김치 양념처럼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타고난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는다는 것, 현실에서 벗어난 외나무다리를 건너 현실과 판타지의 좁은 경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스티븐 킹의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읽고 또 읽었다. 비가 오려나, 미뤄두었던 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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