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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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할 실체'는 우리의 인식 저변에 당위와 의무를 제공한다. 그러한 당위와 의무는 사실 시간의 연속성상에서 익숙함과 무관심을 낳기도 하고,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호기심으로부터 한 발 멀어지도록 우리를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은 한 번뿐인 이 삶에서 더 많은 도전과 경험을 통해 더욱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떠한 변화와 흔들림에도 현혹되지 않는 간헐적인 충만함으로 채워가는 것이리라.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설명했듯이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109)


우리나라의 최대 명절이라는 추석. 평소에 자주 못 보던 가족들을 만나 지난 추억을 회상하며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지만 명절은 오히려 그들과의 단절을 확인하는 씁쓸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이라는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누군가의 산적한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저간의 사정을 들려주기에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까닭에 우리들 각자는 듣는 이도 없는 각자의 지난 일들을 허공에 쏟아내고는 서둘러 돌아서는 게 명절의 또 다른 풍경이리라.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되었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프랑스어에는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S.D.F Sans Domicile Fixe('일정한 주거지가 없는'이라는 뜻--옮긴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는 역사적 S.D.F가 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압박 아래 살고 잇다.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받아들이는 인정된 의식이 이제 더 이상 없다. 매일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 홀로 있다. 그리고 그런 고독은 죽음을 벗 삼을 수도 있다."  (p.61)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로서, 사진이론가이자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사회비평가이자 인문학자로서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일상의 단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 줬던 존 버거. 만년에 이른 그가 11편의 짧고 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의 깊은 사색으로부터 하나하나의 문장에 이른 지난한 과정들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모든 문장에는 내가 풀 수 없는 함의가 마치 암호처럼 감추어져 있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코드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이야기대로 펼쳐진다는 것을 알고 나면,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쓰게 될까. 내 생각엔 아니다. 하지만 당시 배 위에서 나는 이야기꾼으로서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내가 정하는 대로 가는 거였다."  (p.50)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석기시대 이후로 선조들이 우리들을 위해 남겨 둔 증언들이 있고,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자연과 우주의 텍스트. 그 텍스트들이 대칭적인 것과 혼란스러운 것이 공존할 수 있음을,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법들이 있음을, 욕망의 대상이 언제나 약속의 대상보다 더 큰 확신을 주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p.110)


긴 연휴라지만 하루로 가늠할 수 있는 시간들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시간의 속도를 더 빠르게 인지한다는 건 하나의 모순이다. 어쩌다 보니 또 하루가 흘렀다. '매일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 홀로 있다.'는 존 버거의 말이 암호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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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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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얼굴에 닿는 바람결에는 한여름의 더위가 쏙 빠진 채였다. 계절이 주는 들뜸과 가벼운 충동으로 인해 삶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다. 바삭바삭 부서질 듯한 삶의 건조함을 달래는 데에는 사실 독서 만한 게 없는데 가을이 건네는 경쾌한 유혹은 물리치기 힘들다. 하여 독서의 계절 가을은 매년 말로만 그칠 뿐 진득하니 앉아 책을 읽는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가을은 하나의 온전한 계절이라기보다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쳤던 상상 속의 계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따금 하게 된다. 하나의 계절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짧았고, 온전한 계절을 만끽하기에는 우리의 여유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읽었다. 가을을 닮은 듯 얇고 가벼운 에세이집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몇 권 읽은 기억이 있지만 에세이는 처음이지 싶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가볍고 경쾌하다. 그래서인지 이 계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직장인인 남편과 프리랜서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담아낸 이 책은 세상 어떤 곳에서도 있음 직한 한 가정의 모습을 에쿠니 가오리의 경쾌한 문체로 포착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작가의 밉지 않은 말투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셈이다.


"결혼하고 두세 달 지나면 결혼 생활에서 밥이 얼마나 큰 관건인지 싫어도 깨닫게 된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밥을 먹고 자는 그 일련의 행동에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남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예의 진부한 의문 - 이 사람, 혹시 밥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아니야 - 을 떨어내기가 어렵다."  (p.48)


우리는 사실 달달한 연애 감정을 더 길게 지속하고 싶어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허튼 꿈에 지나지 않을 뿐,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생활'이라는 현실의 높은 벽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연애 과정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습관과 장단점들을 목격하면서 발견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살아갈 날들에 대한 아득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잠시, 어떻게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게 내가 풀어야 할 결혼 생활의 가장 큰 숙제임을 깨다는 순간 새로운 전투력이 샘솟는 것이다.


"해마다 그만 갈게,라고 말하고 부모님과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콜택시에 올라탈 때면 나는 정말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대체 왜 난 여기서 나가려는 것이지, 하고 생각한다. 결혼식 날 아침하고 똑같다. 하지만 택시가 아파트에 가까워지면, 돌아가고 싶어한 내 마음에 안도한다. 아아 아직은 괜찮다. 남편을 보고 싶어하니 다행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p.89)


'결혼한 지 2년이 되어 가는 가을에서 3년이 되어 가는 가을까지 쓴 에세이를 모았다'는 이 책은 마치 몇십 년 결혼 생활을 이어 온 베테랑 주부의 이야기인 듯 지극히 평범하기도 하고, 어제 막 결혼을 한 새색시의 이야기인 듯 유난히 설레기도 한다. 결혼 생활이란 어쩌면 그와 같은 극과 극의 기복을 넘나드는 기적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유명 작가의 결혼 생활이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삶이라는 고단한 여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이. 나를 이해하는 가장 친밀한 이웃이자 동료인 그들이 다만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같이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같이 있는 동안은 함께하는 생활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면 조금은 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한다면, 아마 더 울지도 모르겠다."  (p.151)


추석 전의 분주한 주말 오후.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회사에 출근하여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 대한 혐오만 쌓이는 까닭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볼에 닿는 바람이 좋았고, 높아만 가는 하늘이 좋았고, 그 속에 머무는 나 스스로가 좋았던 까닭이다.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소슬한 바람이 불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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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여자 불편해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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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삶의 권태가 공원 벤치 위에 무더기로 버려진 아메리카노의 빈 용기처럼 뒹굴고, 삶의 권태로 답답한 일상의 흐린 시야를 통해 삶의 희망, 활력, 용기, 의지 등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온갖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작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나는 손에 든 수필 한 권이 부끄러워 이따금 주변을 살피고, 때로는 내 것이 아닌 양 벤치 위에 멀찍이 내려놓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을 좋아하는 이의 비애는 그처럼 사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지면을 제공한 신문사와 잡지사 등 여러 매체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졌을 시간들이 번듯한 형체를 갖추어 책이 되어 나왔으니, 문장이 모여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  (p.218 '책을 내면서' 중에서)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 <난 그 여자 불편해>를 불편한 자리에 앉아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그예 다 읽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산문집을 유독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정서가 꽤나 불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최영미 시인 역시 자신을 괴롭혔던 한 원로 시인을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지만 현실을 넘어 미래를 직시할 줄 모르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의 슬픈 단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거북했던 그 언론사와 지금은 잘 지낸다. 생애 최초의 재판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 재판은 하지 않는다'였다. 재판은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년간 나는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고, 언론사와 적이 되면서 책이 팔리지 않는 등 손해가 막심했다."  (p.54)


얼마 전 나는 인근의 작은 사찰에 들렀다가 난데없는 벌의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고도 없이 날아든 벌은 내 손등에 벌침을 꽂고는 이내 사라졌지만, 벌독으로 퉁퉁 부어오른 손등은 며칠 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벌에 쏘인 나의 고통이 이럴진대 하물며 시인이 겪었을 고통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최영미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문자와 이메일이 쏟아졌다. 등단 65주년 기념 시집과 대담집을 출간하며 "5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시의 시간을 살았다"고 고은 시인은 지난 5년을 회고했다고 한다. 고은은 2018년 여름 나를 상대로 뻔뻔스럽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고 1, 2심에서 내가 모두 승소했다. 원고 고은의 대법원 상고 포기로 나의 승소가 확정되었으나, 2019년 겨울에 재판이 끝나기까지 나는 두 번의 가을을 보내며 고통의 시간을 살았다. 나는 진실을 말했지만, 진실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실을 증명해야 했다."  (p.64)


코로나 시국을 겪는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시간의 순서대로 글을 배치한 까닭에 마치 시인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1부 '어떤 싸움의 기록'은 미투 재판 사회문제를 다루는 논쟁적인 글들을 모아 놓았으며, 2부 '인간은 스포츠 없이 살 수 없다'는 축구 야구 수영 등 스포츠 칼럼을, 3부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는 유년의 추억, 사업자가 된 사연, 집수리 등 시인의 일상을 담은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글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똑 부러지는 시인의 성격답게 문장은 정갈하여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사가 덧붙여진 문장은 찾기 어렵습니다. 마치 어느 칼럼니스트가 쓴 글처럼 말입니다. 무릇 시인이라 함은 일반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공감 능력이 배는 뛰어난 족속인 까닭에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절제하지 않으면 표현에 있어서도 다소 부풀려지거나 자칫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최영미 시인의 글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저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얻은 단단함 때문일 테지요.


"지구 온난화를 막자고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하자. 우리 사회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노력을 너무 안 한다. 밤늦은 시각, 텅 빈 거리에 미친 듯 환하게 깜빡이는 전광판 네온사인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생활 에너지 부족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p.194)


새벽녘에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 맑은 하늘을 보여주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변덕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속이지 않고 솔직하기만 하다면 삶이 조금 변덕스럽더라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날씨처럼 말입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데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듯 우리의 삶에도 따뜻한 위로가 스몄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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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돈 버는 비즈니스 글쓰기의 힘 - 한 줄 쓰기부터 챗GPT로 소설까지
남궁용훈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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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목적은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짧게는 어떠한 용도의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명에서부터 길게는 장문의 보고서나 장편소설에 이르는 전문적인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그 분량에 있어서도 다양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글쓰기는 평생 이어지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좋든 싫든. '에이, 서명이 뭔 글쓰기야?' 하면서 우리가 하는 원초적인 글쓰기의 행태를 부정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 시인 쥘 르나르가 쓴 '뱀'이라는 시를 보면 "뱀, 너무 길다"가 고작이니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글쓰기에는 너무 많은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유명한 유안진 시인의 시 '옛날 애인'은 '봤을까?/날 알아봤을까?'가 시의 전문(全文)이다.


"글쓰기는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사칙연산과 같은 지식이며 기능입니다. 글쓰기를 예술의 틀에 가둬 놓으니 글 쓰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또한 "내가 무슨 문학이야." 하며 스스로 깎아내렸습니다. 여기까지 괜찮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겁을 먹은 사람들은 글쓰기를 배우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했습니다. 이 책으로 이런 편견을 깨고 비즈니스 글쓰기로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꿈을 성취하세요."  (p.25)


큐레이션 전문작가 남궁용훈의 저서 <평생 돈 버는 비즈니스 글쓰기의 힘>은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현대인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에 비즈니스 글쓰기로 인생의 변화를 이뤄낼 방법을 알려준다. 일찍이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저자는 한 줄 쓰기부터 도전하여 변화된 인생과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글쓰기 초보자에서부터 전문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고난도 작업 수행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글쓰기 종사자가 고민하는 글쓰기 스킬을 지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 저자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 책에 적고 있다.


"기계식 키보드와 게이밍 의자를 준비하라 같은 내용도 있지만, 핵심 내용은 바른 습관을 지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이고, 술 마시는 시간을 줄이고, 식습관을 바르게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바른 습관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p.196)


나는 사실 비즈니스 글쓰기는 지양하는 편이고, 그럴 만한 계제도 되지 못하지만 십수 년 동안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글쓰기를 통해 뭘 해보겠다는 목표가 없으니 글쓰기 실력이 늘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름 만족하고 있다. 때로는 글을 쓰는 일이 스트레스가 될 때도 더러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책을 통해서 혹은 경험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았던 바를 기록하는 일이 꽤 만족스러운 까닭에 오랫동안 블로그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글쓰기는 나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정신건강의 모체인 셈이다.


"여러분이 글쓰기, 비즈니스 글쓰기를 한다고 해서 당장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고의 변화로 여러분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쓰기 위해 읽어라, 읽었으면 써라." 고미숙 작가의 말처럼 읽었으면 써야 하고 쓰기 위해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고귀한 일은 읽기, 쓰기입니다."  (p.335 'epilogue' 중에서)


사실 어떤 대가나 목표가 없으면 한껏 게을러지는 게 인간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일주일에 한두 편의 서평이나 짧은 글을 쓰는 일마저 거르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글쓰기와 영원히 결별하지 않는 이유는 글쓰기를 통해 내가 알게 모르게 얻는 것이 상당하기 때문일 터, 이 책의 저자가 권하는 것처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심정으로 글쓰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서 완벽한 타이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면 다른 조건이 미진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위한 최적의 순간은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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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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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이 가득한 하늘이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기만 한데 가을을 닮은 하늘에 사람들은 반색하고 있다. 우리네 삶의 시간을 영원히 앞서 가기만 할 뿐 그 시간의 뒷전으로는 영원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여름도 못 이기는 척 순순히 제 자리를 내어주고는 저만치 멀어진 과거로 흩어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부드러운 뭉게구름의 자태가 이쪽 하늘에 가득하다. 여름내 집 안에만 갇혀 살던 사람들을 집밖으로 끌어내려는 심산, 그 유혹의 자태가 뭉게구름에 배어 있는 것이다. 쪽빛 하늘에 꽃처럼 피어나는 구름.


"그 말에 나는 아이처럼 안심했다. 안심 또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 잃어버리고, 도루의 죽음으로 손에서 빠져나가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빼앗아 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만남도, 좋아하는 마음도, 소중한 사람도. 전부 빼앗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p.291)


세태가 세태이니 만큼 아름다운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하늘도, 아름다운 꽃도, 아름다운 시도, 아름다운 사람도 그 어떤 대상에도 도통 눈길이 가지 않는다. 마음이 온통 메마르고 팍팍해진 까닭이다. 말랑말랑한 소설 한 편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다. 산다는 게 그저 그런 것이려니, 생각될 뿐이다.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었던 게 벌써 여러 날 전이다. 그럼에도 리뷰를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나의 문장에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자신의 감정을 슬몃 얹어 놓을 수 있는 기술이 마치 외계의 언어처럼 혹은 어느 먼 과거의 원시 언어처럼 내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쯤으로 여겨졌다.


"나는 내 방식으로 앞으로도 도루를 기억할 것이다. 과거에도 망각에도 넘겨주지 않겠다. 넘겨줄 리가 없지. 단 한 번의 첫사랑이다. 단 한 번의 실연이다. 나의 상처다. 아픔이다. 눈물이다. 전부 나의 보물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것이다."  (p.316)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후속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전작의 여주인공인 히노 마오리의 친구인 와타야 이즈미의 입장에서 쓰였다. 라이트 소설이 늘 그렇듯 책의 분량에 비해 등장인물이나 구성은 매우 단출하다. 전작에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있는 마오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가미야 도루의 다정함과 성실함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도루를 사랑하게 되었던 와타야는 갑작스러운 도루의 죽음 이후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에 빠진 채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후배인 나루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죽은 도루를 잊지 못하고 있던 와타야에게 나루세의 세심한 배려는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불러오게 되고 결국 와타야는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다.


"목표란 건 인생을 심플하게 해 주거든.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을 잊을 정도로 그 일에 몰입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니까.  그러면 서서히 여러 가지 일이 과거가 되어가지.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도 잊을 수 있을지  몰라."  (p.212)


와타야와 헤어진 후 나루세는 학교를 1년 휴학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모전 준비에 매진한다. 와타야 또한 가미야 도루의 누나이자 유명 소설가인 기시카와 게이코의 적극적인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된다. 와타야 역시 자신이 쓴 소설을 공모전 소설 부분에 응모한다. 나루세가 같은 공모전의 사진 부분에 응모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공모전 결과를 발표하는 수상자 명단에서 와타야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사진 부분 수상자인 가미야 도루. 수상 작품명은 '마지막 결빙'. 소설 부문 수상자가 되지 못했던 와타야는 기시카와 게이코의 도움으로 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전체주의 체제로 급속히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 탓에 가슴 한 구석이 빠르게 화석화되는 느낌이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소설을 읽은 후에도 그에 합당한 리뷰를 쓰기도 어렵고,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힘들다. 무미건조한 독서가 이어질 뿐이다. 가을을 닮은 하늘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비가 온다는데 여전히 푸르기만 한 가을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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