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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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체감하지 못하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영혼도 제압당한 상태로 글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는 일은 현실에서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타자에 의한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나 좌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글맛 혹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완성된 형태의 글의 영역을 체험하는 느낌은 특별하거나 다소 생경하다. 누군가가 글을 통하여 세태에 찌든 나의 영혼을 순간적으로 정화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런 특별한 체험은 내가 원한다고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글을 쓴 직후에는 정신적으로 고양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글을 쓰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는 책을 읽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이나 감동은 물론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이나 새로운 경험을 덤으로 체험하게 된다. ‘말’과 ‘시’와 ‘삶’과 ‘여성’이라는 각 부의 제목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핵심 키워드를 부의 제목으로 선정하여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간다. 독자들은 어쩌면 서문에서 밝힌 작가의 도발적인 문장에 움칫 놀라 본문을 읽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지도 모르겠다.


"선한 것을 믿고 싶지만 대체로 불신하기를 좋아하며 아름다움보다 추함에 끌리곤 한다. 가능태를 따져보는 것을 습관처럼 내재하고 있지만 쉽게 감동하기도 쉽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불안 때문에 수다스러워지고 수치심에 입을 다물곤 한다. 산문을 쓰기로 한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과거를 곱씹지만 현재만 알고 싶다. 엉망진창이지만 꽤나 성실한 사람의 성실하고 엉망인 삶에 관한 글.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더 좋다. 보세요. 나의 우울을."  (P.5 '들어가며')


1부 '말'에서 작가는 N번방과 문단내 성폭력 문제를 짚고 있다. 며칠 전에도 성추행 당사자였던 고은 시인이 침묵을 깨고 다시 작품 활동을 개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영미 시인에 의해 밝혀진 그의 추악한 실체가 5년 전의 일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보란 듯 문단에 복귀한 것이다. 백은선 시인 역시 우리 문단에서 성희롱과 추문의 대상이 되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 쓰고 있다.


2부 '시'에서 시인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가 어떻게 위안을 주는 존재였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안팎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망을 쟁취해야 한다고 응원과 지지의 말을 건넨다. 3부 '삷'에서 시인은 코로나19 시대의 반복되는 일상과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온갖 공포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사랑의 힘이 시를 쓰게 하고, 시를 쓰는 데서 사랑이 온다는 믿음.


"말과 글은 이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내면에서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사람이 내밀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때와 그것을 마침내 글로 쓸 수 있게 될 때의 순간을 절대로 쉽게 예상하거나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p.197)


4부 '여성'에서 시인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 개인에게 분열증을 야기하는 한국 사회, 기후위기를 조장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론하며 이와 같은 문제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성 서사에도 '성녀' 혹은 '악녀'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존재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 스스로 함께 실천하며 단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이니까 멋지게 굿바이를 날리며 퇴장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직 할말이 더 있는데 못한 것 같고 갑자기 너무 아쉽고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궁핍해지지 않는 이상 절대 다시는 산문집을 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 또 다짐한다. 산문을 쓰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느낌인 것 같다(내가 임금이란 소리는 아니고)."  (p.271~p.272)


세상에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무수히 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이따금 취미 삼아 글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내내 피하고 외면했던 것이 하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시인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하는 점. 그럼에도 일부러 피했던 까닭은 성장과정이 적당히 힘들었던 사람은 그걸 자랑할 수 있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으로부터 동질감이나 동료 의식을 느끼기보다 먼저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본능이리라.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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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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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자. 슬픔에도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내보이는 적극적인 슬픔과 꺽꺽 울음을 안으로만 삼키는 소극적인 슬픔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란 이런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주변의 분위기와 주변을 맴도는 어떤 느낌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주르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하자. 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 <생의 실루엣>을 읽고 있노라면 과거의 어떤 슬픈 기억을 통과한 현재의 암묵적인 슬픔이 마치 창호지에 물감이 번지듯 밑바닥부터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럴 때 한 권의 책은 내 기억 속에서 슬픔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온갖 슬픈 기억 속에서 암묵적인 슬픔만 쏙쏙 뽑아내는 필터의 역할을 하는 듯도 하다.


"그나저나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궤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거산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p.87)


스물다섯 살 때 발작이 덮쳐온 뒤 9년이 지나서야 진단을 받고, 신경안정제가 자신의 상비약이 된 지 30년이나 되었다는 작가는 1년에 두 번씩 10년에 걸쳐 발행해 온 <소유>라는 잡지에 글을 연재하였고,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을 소재로 이 이상 쓰면 창작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철할 수 있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책에는 평생 안 보고 살던 이복형을 만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이야기, 어릴 적 입양되었던 동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장성한 후 지진으로 죽었다는 소식, 공황장애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일이 몹시도 힘들던 시절 서점의 어느 문예지를 보고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 불가리아 여행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들을 국경 밖으로 태워다 줄 차를 무작정 기다렸던 일, 어린 시절 터널 연립주택에서 시체를 발견했던 사건 등 작가는 자기 안에 있던 작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 터널 연립주택 시절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고를 지키지 않고 어슬렁거리던 때가 있어서 확실히 변변한 일은 없었지, 하며 부끄러운 생각에 잠긴다. 세상에는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 있다는 뜻이다. 터널 연립주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p.178)


책을 번역한 이수지 번역가는 '담백한 문체로 일상의 파문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썼다. '인간도 식물도 곤충도 모두 생명이며, 돌멩이 하나조차 생명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바람에서도 대기에서도 비에서도 구름에서도 생명의 모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명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사실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을 적게 잡아도 두어 번은 읽은 듯하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사물의 물성과 그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세상의 원리들이 무엇 하나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 이것이 지금만큼 요구되는 시대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방향을 향해 구체적으로 움직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와는 상관없이 인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107)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순간에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며,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나 존재한다는 걸 믿기로 하자. 삶의 연대는,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는 우리가 믿는 암묵적인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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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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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의 특징은 읽는 내내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좀체 손에서 책을 내려놓기 어렵다는 데 있다. 소설의 구성도, 스토리의 전개도, 심지어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까지도 모두 인공의 냄새가 폴폴 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결말이거나 뻔한 스토리일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의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단 책을 펼친 독자라면 결코 쉽게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 인과의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채 습관처럼 또다시 일본 소설을 손에 잡는다.


"터키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텔레비전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형광등도 커튼도 현관 매트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p.5)


오가와 이토의 소설 <달팽이 식당>은 그렇게 시작된다.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던 날 밤, 열다섯 살에 집을 나온 주인공 린코가 그동안 애인과 함께 세를 얻어 살던 집의 모든 물건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것은 가전제품이나 살림살이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애인과 동업으로 음식점을 열겠다는 희망으로 한 푼 두 푼 모았던 창업자금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하면서 집 안 벽장에 알뜰히 보관해 두었던 창업자금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할머니가 물려준 겨된장 항아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린코는 그때 이후 정신적 충격에서 오는 일종의 히스테리 증상 탓인지 말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린코는 결국 겨된장 항아리만 안고 집을 뛰져 나왔던 과거처럼 심야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있는 시골의 집으로 향한다. 애인에게 차이고 빈손으로 돌아온 린코를 어머니는 크게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고로 쓰던 공간에 식당을 개업하겠다는 린코의 계획을 적극 지원하고 돕는다. 물론 이와 같은 도움은 모두 린코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하는 것이었다. 창고의 물건을 비우고 식당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애쓰는 린코를 위해 린코와도 친분이 있는 마을 주민 구마 씨로 하여금 도와주도록 부탁하였음은 물론 창업 자금도 선뜻 내주었던 것이다. 린코의 어머니 루리코의 엄마였던 할머니로부터 요리의 기초를 배웠던 린코는 요리라면 언제든 자신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달팽이 식당의 이미지가 거의 굳어졌다. 달팽이 식당은 손님을 하루에 한 팀만 받는 조금 색다른 식당이다. 전날까지 손님과 면접 혹은 팩스나 메일로 대화를 주고받아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 가족 구성이라든가, 장래의 꿈이라든가, 예산 등을 상세하게 조사한다. 나는 그 결과에 따라 그날의 메뉴를 생각한다."  (p.66)


입소문이 좋게 난 달팽이 식당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엄마 루리코와의 관계는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고 필담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환경 탓이기도 했지만 아빠 얼굴도 모른 채 엄마와 함께 성장했던 린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루리코가 자신의 친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술집 아무르의 단골손님 중 한 명이 자신의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등으로 린코와 루리코 사이의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소설은 그렇게 막바지로 향하고 독신으로 지냈던 엄마의 비밀이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벗겨지게 되는데...


"내게 요리란 '기도' 그 자체다. 엄마와 슈이치 씨와의 영원한 사랑을 비는 기도이고, 몸을 바친 엘메스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고, 그리고 요리를 만드는 행복을 베풀어준 요리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이기도 했다."  (p.212)


린코가 의심하였던 엄마에 대한 비밀은 루리코가 세상을 떠난 후 뻐꾸기시계 밑에서 발견된 엄마의 편지를 통하여 모두 밝혀진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내 가슴속에 넣어놓고 열쇠로 꼭꼭 잠가두자. 아무에게도 도둑맞지 않도록. 공기에 닿아 색이 바래지 않도록. 비바람을 맞아 흐트러지지 않도록."  (p.218)


언젠가 읽었던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떠올리게 하는 오가와 이토의 소설 <달팽이 식당>은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의 소설에서 단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고 동화 같은 잔상들이 몇몇 이미지로 남는다. 책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가독성과 비슷비슷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홀리는 중독성은 일본 소설이 갖는 매력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어, 이 책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하면서도 여전히 그 비슷한 이야기를 소설로 다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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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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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일이었으니 꽤나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강원도의 한 암자를 그곳에 계신 스님과 함께 올랐던 적이 있다. '그게 뭔 큰일이라고?' 하며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암자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고, 길게 이어진 철조망 사이에 난 엉성한 출입문조차 평시에는 늘 잠겨 있었다. 암자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그 길을 사람들은 적잖이 궁금해하면서도 출입문에 붙은 경고문구 때문인지 감히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스님과 함께 출입문을 통과하여 두어 시간의 산행 끝에 암자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산 정상에서 내가 느꼈던 첫 느낌은 내가 문명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도 조용하다는 건 아마도 인간이 내는 백색 소음이나 평소 우리가 들리는 줄도 모른 채 간과하며 지냈던 온갖 문영의 소리, 예컨대 차소리, 앰프 소리, 특정할 수 없는 온갖 기계음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너무나 잘 적응이 되어온 탓에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술을 아주 이른 나이부터 습득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아무 소리도 없는 정적 상태는 고요하기보다는 고요함이 시끄럽게 설치고 잇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백색소음이 있는 것이 어떨까.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는 백색소음이 있어야 마음이 더 안정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색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더 잘되고, 잠도 더 잘 온다는 사람들도 있다."  (p.41)


김영민 교수의 산문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었던 것은 지난달 중순께였다. 2년 전쯤에 읽었던 저자의 다른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여전히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읽게 된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다 할 리뷰를 쓰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10.29 참사의 여파가 가슴 한켠을 차갑게 파고들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산다는 것은 허방을 짚듯 허망한 일이지만 이태원의 뒷골목에서 아프게 스러졌던 젊은 영혼들이 그와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끝내 안타까워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상기시킨다."  (p.30)


1 '허무의 물결 속에서', 2 '부, 명예, 미모의 행방', 3 '시간 속의 필멸자', 4 '오래 살아 신선이 된다는 것', 5 '하루하루의 나날들', 6 '관점의 문제', 7 '허무와 정치', 8 '인생을 즐긴다는 것'의 총 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생의 허무와 그것을 딛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저자 나름의 철학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저자의 숨은 의도가 엿보이는 문장들이 등장하곤 한다. 주제에서 벗어난 듯한 이러한 문장들을 통하여 독자들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책의 문장들을 꼼꼼히 훑으며 시간을 소일하게 된다.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가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 막대한 화재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직업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줄 것인가의 문제는 결정할 수 있다."  (p.228~p.229)


최근에 우리나라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흔히 듣는 말은 '정치가 실종됐다'는 것.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줬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선택을 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하다. 여와 야의 대치는 물론 남과 북의 극한 대치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최대치로 높아졌고, 이를 반영하듯 해외 투자자들은 서둘러 자금을 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율은 치솟고, 수입 물가가 오르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본격적인 경기침체 상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준 대가 치고는 너무 혹독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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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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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원은 한순간의 '끌림'에 의해 소설가를 유도하고, 그 '끌림'에 의해 탄생한 소설 역시 '끌림'을 통하여 독자들을 유인한다. 양전하와 음전하에 의해 전기를 띠게 되는 대전체처럼 소설가의 열정과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낱낱의 '끌림'을 유도하는 '끌림'의 대전체. 나는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는 내내 소설가가 이룩한 '끌림'의 대전체에 기꺼이 감전되고픈 한 마리 부나방이라는 생각을 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p.303 '작가의 말' 중에서)


일본의 천황 메이지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을 접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조선의 청년 안중근의 대의와 일본의 노련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이토 히로부미의 대의가 맞부딪히는 순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안중근의 일대기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의 전기문처럼 쓰인 게 아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쓰러트린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들을 조망한다. 말하자면 소설가 김훈의 눈에 비친 안중근의 삶은 응축된 에너지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불꽃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명령이나 오랫동안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될 수 없는 붉은 마음이었음을 김훈은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훈은 이러한 안중근의 마음을 우덕순의 그것으로 비껴가고 있다.


"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p.232)


우리는 시시각각 스스로 말을 짓고, 자신이 지은 말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살아간다. 작가는 생활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말을 짓고, 자신의 말을 일반 대중을 향해 던진다. 그것은 청년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안중근은 인간 이토를 저격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수많은 제국주의자들의 가슴을 향해 결연한 단절의 의지로써 총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혹은 작가의 언어가 각자가 품은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안중근 역시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것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을 터, 목숨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음에 안중근은 마지막까지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앎이 통절한 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앎이란 곧 사물의 실상을 보는 정신의 작용이다. 실상을 보는 자는 몸 둘 자리를 알고 몸 쓸 방편을 스스로 안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  (p.80)


그렇다면 소설가 김훈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과 조국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속인 안중근의 갈등을 보여주려 했을까 아니면 일본의 제국주의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이토의 저격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던 청년 안중근의 야심과 그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부각하려 했을까. 아니면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그 당시 한국 교회를 통솔했던 뮈텔 주교의 갈등을 역사 속에서 다시 되살리려 했던 것일까.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할 수 있기를 염원했고,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 있던 뤼순 감옥을 향한다. 그리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면회한다.


"빌렘은 주일미사 강론 원고를 쓰지 못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을 말해도 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말은 하느님의 것이고 또 이 세상의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먼 길을 말은 건너가기 힘들었고 말하려는 것이 문장으로 엮어지지가 않았다. 새벽에, 빌렘은 원고 쓰기를 단념했다. 문장으로 엮지 말고, 말하여지는 대로 말하는 편이 오히려 진심에 가까울 것이라고 빌렘은 판단했다. 빌렘의 종이 위에는 죄, 살인, 생명, 영혼, 구원...... 같은 단어들이 문장으로 엮이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다."  (p.245)


작가에게 대전(帶電)되는 모든 단어들이 문장이나 책으로 엮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어는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책으로 엮여 독자들에게 배포되기도 하고, 또 어떤 단어는 오랜 시간을 건너 어렵게 어렵게 그 생명력을 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대전되었던 많은 단어들이 끝내 책이나 문장으로 엮이지 못한 채 조용히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수많은 단어들의 소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또 기려야 한다. 역사의 한 순간을 김훈 작가가 기억함으로써 불꽃처럼 타올랐던 청년 안중근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되살아났던 것처럼 작가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단어들의 운명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얼빈>보다 더 절절한 그들의 이야기를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미래의 어느 해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 <하얼빈>은 내게 우연처럼 이끌렸던 몇몇 단어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기적으로, 그리고 그 기적에 부나방처럼 이끌렸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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