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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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빗줄기가 훑고 간 도시의 주택가는 마치 커다란 습식 사우나로 변한 듯 후텁지근합니다. 도시에 사는 떠돌이 비둘기 떼가 먹이를 찾아 아파트 이쪽 동에서 저쪽 동 옥상으로 비행을 하고,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하던 하늘은 구름 사이로 빼꼼 푸른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비라면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러나 며칠째 이어지는 비구름은 쉽게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긴 장마 덕분에 나는 퇴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밀려 있던 책들을 마저 읽었고, 빗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오래된 추억들을 소환하여 시간의 순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뒤죽박죽 늘어놓았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역시 장마로 집에 묶이지 않았더라면 표지만 보고 무심히 흘려보냈을지도 모르는 귀한 책이었습니다. 인연이란 이렇듯 반드시 만나야 할 것들을 어떻게든 만나게 해주나 봅니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30)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로 알려진 클레어 키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맡겨진 소녀>는 1981년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쓰인,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작품입니다. 무뚝뚝하면서 애정이 없는 아빠와 집안일과 여러 자식들을 돌보느라 늘 삶에 쫓기고 허덕이는 엄마 밑에서 태어난 까닭에 "네"라는 대답조차 온전히 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란 '나'는 엄마의 출산을 앞둔 어느 날, 아이가 없는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서둘러 오느라 변변한 옷가지도 챙겨 오지 않았던 아빠는 '나'를 마치 귀찮은 짐짝처럼 낯선 친척 집에 떨어트려 놓고는 훌쩍 떠나버립니다.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나'를 떠맡게 된 킨셀라 부부는 첫날 매트리스에 오줌을 싼 '나'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은 물론 달리기 연습을 시키기도 하고, 잠들기 전에 귀지 청소를 해주는 등 이제껏 집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애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킨셀라 부부의 정성어린 돌봄과는 다르게 인근의 이웃들은 처음 보는 소녀에게 과한 호기심을 보이며 상처를 주곤 합니다. 평온하고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달이 다시 나오자 아저씨가 램프를 끄고, 우리는 달빛 속에서 사구를 내려왔던 길을 쉽게 찾아 따라간다. 사구 꼭대기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 직접 신겨준다. 그런 다음 자기 신발을 신고 끈을 묶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돌아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75)


어느 날 킨셀라 부부와 함께 상갓집에 들렀던 나는 한 이웃으로부터 킨셀라 부부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됩니다. 지금의 '나' 정도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에 대한 부부의 친절과 환대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삼 심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섣부른 판단과 왜곡된 시선과는 다르게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나 부모님이 원하는 날짜에 언제든 보내 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와 함께 짧고 행복했던 '나'의 날들도 끝이 났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p.96)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이 짧디 짧은 소설을 통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문자 텍스트가 아닌 여백 텍스트로 존재할 뿐이지만, 여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느 독자에게서 다른 독자에게로, 한 명의 비평가로부터 다른 비평가에게, 혹은 키건의 소설을 그저 이야기로 전해 들은 어느 행인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면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고, 오늘 내리는 빗물처럼 흘러넘쳐서 결국에는 이야기의 바다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말했습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진심을 전할 상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 인터넷 세상에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빈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처음부터 갖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화가 사라진 유령의 세계에 사는 우리로서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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