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꿔준 위대한 명언
진희정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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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런 말이있다. 남이 내게 잘한 건 물에 새기고, 남이 내게 잘못한 것은 돌에 새긴다는 말. 이 말은 남이 내게 잘한 것은 하찮게 여기고 금방 잊는다는 말로 이해할수도 있겠지만, 또 어찌보면 그만큼 긍정적이고 좋은 것은 빨리 잊고, 부정적인 것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들린다.

사실 내가 이 책을 든 것은,  나에게도 있는 이런 오래되고 고질적인 습성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고자 읽게된 책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 땐 나도 꽤 쓸모있는 인간인가 보다 하다가도, 어디에선가 내가 인정받지 못하고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땐 한없이 나 자신이 초라하고, 나를 그렇게 안 좋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끊어오르는 분노가 있다. 젠장, 사람이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지옥과 천국을 오갈 수 있다니.  

예전에 나는 남이 뭐라건 그것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일까? 말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사람의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달려있다고 하지 않던가? 항우 장사의 힘을 제어하는 것 보다 세치 혀를 제어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 보다 깍아 내리고 무시하는 말을 잊는 것이 더 어렵다. 하지만 그런 말을 오래도록 간직할 필요가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것을 잊지 못하고 곱씹는다는 것은 그말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영혼에 미칠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그러므로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나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과 있는 것이 좋고, 책도 좋은 말이 담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이 책은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각장마다 두 사람씩 총 48명을 다루고 있는데, 동시대의 사람이건 그렇지 않던 같은 분야에서 최고라고 인정할만한 사람들을 비교해 놓은 책이다. 하지만 비교라고 해서 누가 누구 보다 이점이 좋고, 저점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놓고 이 사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 지금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 사람은 어떤 점을 어떻게 보완하고 다져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를 저자의 깔끔한 해설로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의 명단 가운데는 몇 세기를 관통한 세계적 위인만을 열거해 놓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랬다면 어른을 위한 위인전기 다이제스트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있는 알만한 친근한 사람도 눈에 띈다. 예를들면,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나, 총각네 야채가게의 이영석,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나 야구의 박찬호, 산악인 엄홍길 등. 물론 그들도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대 쳐놓고도 너무 유명인이라 약간의 거리감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세상은 유명인 보단 평범하게 사는 소시민이 더 많은데 이런 책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공을 부추긴다. 그러기엔 너무 식상한 소재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도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다는 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괜히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다이제스트로나마 접한다고 내가 바로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성공 못한 사람이 느껴야 하는 자괴감이란 얼마만한 것인가 헤아려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의 반의 반도 다 쓰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 이 책의 48명이 들려주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그런 볼멘 소리로 일축시키고 귀를 막고 살아도 되리만큼 내가 그렇게 내 삶에 떳떳하고 자랑스러울까?

이 책에 열거된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보고 한 말들이다. 이를테면, 산악인 엄홍길은 산은 공들여 올라가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고 말했고, 흑인이면서 사생아였고, 뚱뚱했고 미혼모였던 오프라 윈프리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하며 자신의 운명을 거슬러서 오히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 그밖에 박찬호나 마이클 조던도 처음부터 유명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책은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던 나에게 다소나마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어느 때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이럴 때 슬픈 음악이나, 염세주의적 책을 탐독했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최근 나는 한 모임을 나가고 있는데, 처음엔 도대체 이 사람들과 내가 뭘 할 수가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조금 있어보니,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정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별 볼 일이 없어도 사람네들과 함께하면 어느 샌가 나도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란 희망이 생겼다.

숲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숲은 예외여서 내가 어떤 숲에 있느냐에 따라 내 운명이 달라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이라도 배울 것이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의 모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다. 내가 있는 숲에 나처럼 거니는 사람이 있겠지. 그랬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어떠한 나무가 되고, 어떤 숲이 되어줄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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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책 읽기] 내 아픈 그곳에 나의 보물이!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내 논이 아닌데도 노랗게 물든 황금빛 들판엔 흐뭇해집니다. 익은 벼들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네요.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는 어머니 말씀을, 그 옛날엔 왜 그렇게 잔소리로만 들었을까요? 그런데 익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면 그건 병든 벼라고 대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겸손은 그저 자신을 낮추는 행태라기보다 체험입니다. 가톨릭 신부인 안셀름 그륀이 쓴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은 바로 그 ‘겸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덕행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성숙해가는 하나의 체험이다.”

나의 보물은 내가 아픈 그곳에 놓여있다고 하지요? 겸손을 체험케 하는 경험은 무엇보다도 상처와 아픔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성공의 경험, 성취의 경험도 중요합니다. 사랑을 하건, 일을 하건 몰두하고 몰입한 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삶은 그만큼 경쾌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아픔이 없으면 걷잡을 수 없이 오만해지고 교만해지고 강퍅해집니다. 남의 아픔과도 교감할 수 없는 겁니다. “앓아본 경험이 있는 의사만이 다름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그리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강하게 서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내가 상처입고 약해져 있을 때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다. 그 때 나는 하느님께서 본래 만들어놓으신 참된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주향/수원대 교수
그륀 신부는 하느님께로 열리는 마음은 얻어맞고, 상처 받고, 부서진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추락과 좌절이야말로 스승 중의 스승이라는 거지요. 누가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부자들은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어서 오만불손해진 부자는 복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이 복입니다. 존재는 슬픔으로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늘 슬픔 속에서 헤매기만 하면 우울증이고, 반대로 늘 기쁘다고 들떠 있으면 미친 겁니다. 충분히 슬퍼하되 슬픔을 강물처럼 흘려 보낼 줄 알아야 하고, 맘껏 기뻐하되 기쁨을 구름처럼 흘려 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경의 표현대로 생이 꿈 같고, 환영(幻影)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깨달음이 필요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이 이슬 같고 번개 같음을 안다면 오만이나 아만(我慢)이 어디에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아만이나 오만을 버리고 나면 굳이 겸손을 강조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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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핑퐁, 소설 악보를 쓰다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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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가는 어떤 소설을 보면 소설가가 궁금한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결국 그 작가를 만났고 자신의 궁금증을 풀었다. 박민규의 소설도 그런 축이다. 하지만 그를 굳이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는 이미 소설 속에 자신을 온몸으로, 몸부림치듯, 핑퐁핑퐁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소설가는 소설 뒤로 숨는 거라고 말한 소설가의 인터뷰를 본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또다른 명제를 맞닥뜨렸다. 소설만큼 소설에 써있는 활자만큼, 소설에서 훌쩍 띄어넘은 단락만큼 박민규를, 핑퐁핑퐁 단어를 읽을 때마다 소설가 박민규가 떠오른다. 만나본 적 한번도 없지만 몇 번이고 그를 만나 칡차를 나눠 마신 것처럼 알은 척 하고 싶어진다. 박민규는 소설 뒤로 숨지 않고 소설 앞에서 소설을 지휘하고 있다. 이 사람, 지휘자 출신 아니야?

세상의 모든 소설가에겐 공평하게 모국어란 도구가 쥐어져있다.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의 둘레를 구성하며, 성장하는 동안 익히고 보아온 분위기로 문체를 휘날리며 소설을 쓴다. 언젠가 8옥타브 안에서 아직도 새로운 멜로디가, 음악이 작곡되어지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겨우 8옥타브밖에 없는데 어떻게 기기묘묘하고 신선하고 지루한 음악들을 만들어내는거지? 음악가들은 천재, 라고 생각했다. 화가도 예외일 순 없다. 따지고보면 예술가는 모두 천재다. 하지만 소설가는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노력가 타입이라고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정말, 그렇다. 그들을 천재이게 한 데에는 천재적인 두뇌가 아니라 놀라운 인내의 엉덩이 덕분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붙였는데 박민규의 엉덩이도 그런 힘이 있다는 게 놀랍다. 그는 음표를 갖고 놀아야 할 사람이었는데 음표로는 성이 안 차 활자 세상까지 넘보고 있으니, 그게 더 놀랍다.

인류를 위한 대서사시, 핑퐁, 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는 활자로 악보를 짓는 소설가다. 핑퐁핑퐁 스매싱을 날릴때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여전히 듀스 포인트이고, 인류는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면서, 깜박한 존재들답게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가끔 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혼자 있을 때 머리를 벅벅 긁으면 아주 오랜만에 긁는 데도 부스럼 딱지 같은 것들이 나온다. 부스럼 딱지가 있었다는 건 바로 얼마전 머리를 긁었다는 것인데 머리를 긁는 습관이 일상이 아니라 간혹 일 뿐인데, 그때까지 혹은 무의식중에 머리를 긁었던 흔적으로 부스럼 딱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줄도 모르면서 까불며 살고 있는 것처럼 핑퐁의 못과 모아이와, 마리와 달과, 치수와 쎄크라탱이, 존메이슨과 캐서린이 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채 핑퐁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나는 그래서 간혹 슬픈가? 어디에선가 나처럼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는 인류들이 천구백오십만명 살고 있다는 데에서 슬픔을 위로하는가?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은 독자라면 핑퐁은 낯설지 않다. 이미 박민규는 첫소설집에서 독자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박민규 스타일을 읽었던 전력 덕분에 <핑퐁>은 어렵지 않게 주입된다. <카스테라>에 나왔던 기괴한 생물들이, 뭉클한 일상의 감동이, 순환되는 슬픈 인류의 역사를 총망라하듯 <핑퐁>은 슬픈 인류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원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종족이었다. 우리는 단 한번의 성공을 하기 위해 살아있는 게 아닐까. 인류의 성공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살아남아있는 어떤 생물보다 더 기묘한 생물들인 인류. 일찌감치 죽은 공룡을 시조새를 따 시키면서 인류가 살아있는 까닭은 실패하기 위해서다. 못아이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매일 지하철을 타고 있는 백수의 이야기는 <갑을고시원체류기> 혹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같은 궤도를 달린다. 따 당하고 있지만 따 당한 시절을 잊지 않으며 따 당하는 삶이 인류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못과 모아이는 속삭인다. 가을바람처럼.

음악을 하지 그랬어? 말하고 싶지만 그는 음악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욕심쟁이 예술가다. 사람의 눈으로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며 스스로 정화시키게 만드는 활자여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욕심쟁이 예술가. 직접 그린 삽화들, 쉼표와 마침표, 말줄임표등 문자코드를 이용해 4분음표 8분음표를, 폰트의 크기로 낮은음자리표 높은음자리표를 구사하며 활자와 악보를 동시에 생산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음악 한곡이 흘러나온다. 할렘가의 랩 같기도 하고 구성진 전통가요 같기도 한 리듬을 부여하며 소설을 쓰는 박민규. 인류로부터 배제당한, 인류를 배제시키는 핑퐁을 치며 세계는 어떻게든 흘러간다. 계절로 친다면 이 소설은 가을이다. 화사한 봄도, 뜨거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아닌 가을이다. 인류는 언제나 벼이삭과함께 가을에 고개를 숙여왔다. 자신을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내 생의 시계 바늘이 어디쯤 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인류는 가을에 핑퐁치며 벼이삭과 함께 인사한다. 핑퐁핑퐁핑퐁핑퐁. 하며, 인사한다. 다수결의 세상에서 무명의 소행성으로 살아가는 박민규의 인사에 무명의 소행성으로 살아가는 내가 스매싱한다. 나도 핑퐁핑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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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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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 참 재미있다.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토속적인 분위기. 에로틱한 관능이 뒤섞여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오감을 자극한다.

 

음식을 매개로한 문학작품이 몇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함께 '바베트의 만찬'이나 '초콜릿' 같은 작품은 훌륭한 음식문학이다. 그런데 그것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식욕과 성욕을 같은 층위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음식에 최음제와 같은 작용을 하는 뭔가가 숨어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본 것은, 해피엔딩은 해피엔딩인데 동시에 사랑은 사필귀정인가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우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해피엔딩이니만치, 작가는 애초에 티타가 페드로와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며 행복한 결말은 독자를 만족시킨다. 하지만 비극적 결말이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작가는 오래도록 독자들이 자기의 작품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비극으로 몰아가는 것을 선호해 왔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통례인데, 10대의 나이에 타타와 페드로가 만나고 서로 사랑을 느끼지만, 막내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은 확실히 너무 가혹하다. 혹자는 이런 소설의 설정에 웃음을 금치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집안에 전통이란 명목하에 흐르는 금기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티타의 집안에 그런 전통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우습게 볼 것은 못 된다. 그래도 티타와의 사랑를 포기하지 못한 페드로는 차선으로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한다. 어찌보면 의리와 신의를 배반하지 않는 페드로의 용기있는 결단일수도 있고 또 어찌보면 황당하다.

 

명백히 사랑은 둘 중의 하나다. 주변의 여러 많은 장애 때문에 이루지 못하거나, 그것을 뛰어 넘거나. 그러니 차선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들면 성경의 야곱 같은 경우가 대표적일거라고 보는데, 라헬을 사랑하기 위해 언니 레아를 먼저 취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런 풍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지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거기엔 금지된 사랑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꽤나 호된 몸살을 앓는다.  성경에도 보면 두 자매가 서로 남편 야곱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에도 보면 티타는 언니 로사우라의 끊임없는 의심과 질시를 받으며 산다. 그것이 성경의 그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람의 먹는 것이 성욕을 자극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페로몬이라고 하는 냄새가 성욕을 자극하며, 상대의 관능적인 섹시함이 성욕을 자극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라헬과 레아가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무슨 식물을 가지고 협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식물은 최음제에 해당하는 식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식욕이 채워지면 성욕을 채우려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음식의 화학적 반응을 저자는 문학적으로 꽤나 위트있고 능청스럽게 잘도 표현해 내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일대 일의 관계 보다 삼각관계일 때가 재미있고 극적이다. 타타와 로사우라, 페드로가 전반부를 이끌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티타와 페드로, 의사 존의 관계가 부각이 된다. 거의 존과 결혼이 이루어질 뻔했던 티타. 이 둘을 지켜보는 페드로의 질투와 방황이 대비가 된다. 티타의 관점에서 볼 때 존의 사랑은 다분히 이성적이고 신사적이다. 그런데 비해 페드로와의 사랑은 감성적이고 본능적이다. 그리고 결국 그 본능에 충실해서 티타는 존이 아닌 페드로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그것이 에로틱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성적이기 보다 본능적인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페드로의 우유부단함에 혀를 차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존이 더 미온적여 보인다. 상대를 배려하며 끝까지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런 태도가 더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당신 아니면 안된다는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면 티타는 예정대로 존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사적이고 인격적이면 거기엔 여백도 포함하고 있는 얘기다. 그것은 상대의 선택에 어느 만치는 여유를 주는 것이 된다.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하는 식의. 그렇다면 나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한테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선 거스를 수 없는 강한 육체의 욕구를 제어할 수 없어 결국 페드로와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말이다.

 

확실히 해피엔딩은 사필귀정일 때만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루기까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달콤 쌉싸름하기만 한가? 그러면이야 좋게.  떫다 못해 쓰고 고통스럽지. 우리는 이렇게 재미있게 보지만. 그런 사랑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일까? 이 책은 유쾌하고도 쌉싸름하게 잘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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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10-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헬과 레아가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그 식물이 뭐에요?
갈쳐주세요!!!!
제가 정말 좋아라하는 책인데... 스텔라님도 읽으셔서 기뻐요 ^^ 추천드세요.

stella.K 2006-10-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플레져님! 귀찮아서 대충 쓰고 넘길려고 했더니 님에게서 딱 걸렸네요. ㅎㅎ. <합환채>라고 하네요. 자귀나무라고도 하는가 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잘 안 나와 있네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안 그렇겠습니까? 야곱은 레아와 라헬 말고도 몇 뇨자를 더 거느렸답니다. ㅋ. 추천 고마워요.^^

가시장미 2006-10-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나도 좋아하는 책인데. ^-^ 리뷰 너무 멋지게 쓰신거 아니예요~~ 갈수록 리뷰쓰는 실력이 발전을 거듭하시는 것 같네요. 요즘 전 리뷰 하나도 안 쓰는데.. 자극좀 받아야겠어요. 으흐흐흐 저도 추천~!! ^-^

stella.K 2006-10-2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너 같은 사람이 있어 내가 불을 키고 더 열심히 쓸려고 하잖니. ㅎㅎㅎ 요즘은 하는 일이 있어 책도 많이 못 읽고 리뷰 안 쓴지도 꽤 됐다. 리뷰는 처음엔 안 썼는데 그도 익숙해져 보니 이젠 안 쓰면 싱겁더라. 내가 무슨 책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짧게라도 꼭 쓰렴.^^
 
 전출처 : 바람구두 > 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서는 시대를 꿈꾸며
미국민중사 세트 (2권 세트)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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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서는 시대를 꿈꾸며
-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읽고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내게 각별하게 기억되는 책이다. 언제나 읽을 것에 목말라했던 시절, 내 삶을 움직인 책 10권을 꼽으라면 조영래의 『전태일평전』,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 풀빛출판사의 『한국민중사』(혹은 송건호 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1』,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황석영의 『객지』, 최인훈의 『광장』, 김수영의 『김수영전집』, 사마천의 『사기』, 나관중의 『삼국지』, 『마르크스 ․ 엥겔스 저작선집』 그리고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 등을 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80년대라는 시대를 나름의 고통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하워드 진은 이후 국내에서 출판된 다른 어떤 책보다 우선 일월서각에서 나온 『미국민중저항사』의 저자로 먼저 인식된다. 『미국민중저항사』는 광주항쟁이 있던 1980년 미국에서 초판이 발간되었고, 1986년 조선혜의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출판되었다. 그 무렵 이 책은 위에서 언급된 책들과 함께 열쇠를 채운 독서실 책상 서랍 속에 있거나, 내가 스스로 “지상의 끝(漠場)”이라 이름 지은 연립지하의 어두운 골방에서 늘 함께 했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건국대 입구의 사회과학 전문 “인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구했던 것 같다. 그후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몇 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면서 86년판 『미국민중저항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내게서 잊혀졌거나 구할 수 없었던 이 책이 다시 내 품으로 들어온 것은 지난 2002년 무렵의 일이었다. 2001년에 2쇄가 인쇄되었던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이 책을 구한 기쁨에 썼던 글이 있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굿윌헌팅>에 보면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대학 구내 청소부로 일하는 맷 데이먼(윌 헌팅)이 친구 벤 애플렉(척키 설리번)과 함께 하버드대학 인근의 술집으로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자신의 친구에게 모욕을 주는 하버드대학 역사학부 학생을 면전에서 망신 주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윌 헌팅이 인용하며 명문대 역사학부 학생을 망신 준 것이 바로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 책이다. <미국민중저항사>, 원제는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로 알라딘에서는 하워드 진 개인 약력 소개에서 '미국 민중의 역사'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도서출판 당대에서 출간된 『오만한 제국』에는 하워드 진, 그 자신의 삶의 내력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꽤 있다. 미국 사회 내부에서보다 한국을 비롯해 오늘날 미국의 패권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고통 받는 사회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그의 면모 덕분에 우리는 그에 대한 꽤 여러 종의 책들을 접할 수 있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로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요건을 갖춘 그가 어째서 강단의 지식인으로서 보다 운동가로 더 널리 인식되고 알려지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의 삶에서 이유를 찾자면 뉴욕 빈민가에서 노동자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 폭격기 승무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민간인 거주 지역을 폭격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사회 참여의 길을 열어준 것은 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병사들을 위해 제정된 ‘원호법(援護法)’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는 미국과 미국의 체제, 민주주의의 혜택을 여러모로 많이 받은 사람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워드 진은 조국으로서 미국을 사랑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반성을 제공했다. 그 자신이 그와 같은 인식과 반성을 바탕으로 그들과 늘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마다 20세기를 규정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에게 20세기는 ‘문명과 야만의 시대’였고, 어떤 이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20세기는 ‘자본주의’, ‘세계최강대국 미국’, ‘물신주의’, ‘대중’의 세기였다. 이와 같은 말들은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든 모두 지난 20세기를 나타내는 중요한 인식 코드들이다. 로마, 몽골, 영국을 비롯해 역사상 그 어떤 제국도 오늘날 미국이 누리는 것과 같은 세계적인 패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와 같은 제국의 탄생에 기초를 닦고, 확고히 인식시킨 것이 지난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이 시기 미국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유럽 제국의 패권이 더 이상 유럽 스스로의 세력 균형조차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식시켰고,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류를 구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단지 군사적, 경제적인 패권만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의 일상(日常)과 이상(理想)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오늘날 글로벌리즘, 세계화, WTO, FTA, MD, 자유무역이든 그것이 무엇으로 표기되던 전지구화의 움직임, 그 자체를 “아메리카나이제이션(Americanization)”과 무관하다고 보는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국은 그 자체로 20세기가 쌓아올린 독특한 문명체계로서 체제의 내 ․ 외부를 분간할 수 없는 밀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반미가 곧 친미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상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든다. 하나는 미국에도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버티고 있다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2000년 미국 대선, 테러와의 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의 민중들 역시 군수자본과 다국적 금융자본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워드 진과 함께 1960년대 반전민권운동의 일선에 싸웠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네오콘들이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레이시온, 맥도넬더글러스, 보잉에서 일하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이제는 누구보다 기득권 세력화되어, 미국 이외의 지역은 물론 미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더 이상 연대하기 보다는 그 체제 자체에 안주하고 있음을 보아야한다. 맥월드의 풍요에 중독된 사람들은 빈곤한 자들의 지하드에 관심이 없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도 기술되어 있듯 미국은 오랜 세월 민중의 저항을 교묘히 분쇄하고, 타협하며 오늘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하워드 진의 꿋꿋한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고립된 양심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일월서각의 책은 1970년대까지 수록되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도 1980년대~2000년대의 급변하는 상황을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 판은 2000년까지 수록하고 있지만, 하워드 진의 담담하지만 노기 띤 목소리는 여전하다. 앞서 이 글을 쓰기 전, 어느 분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문화대혁명이 우리 윗세대에게 참 궁금한 문제였다면, 저의 세대에게는 톈안문(천안문) 사태가 커다란 궁금증이었습니다. ‘인민이 혁명을 배반하면 탱크로 밀어버려도 괜찮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고민 자체가 그릇된 것이었음에도 당시에는 선뜻 인민을 배반하는 사회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미처 상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상 자체가 불경이었으니까요. 우습죠? 80년 광주를 경험하며 운동을 시작했다는 어떤 이가 자신은 정말 많은 고민 끝에 하는 말이라며 ‘자본주의에 포섭된 인민의 배반을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혁명노선을 견지할 수 있는가? 그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했었지요. 그 앞에서 차마 뭐라 말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던 시절의 씁쓸한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다시 읽는 21세기 초엽의 어느 날, 아직 새벽 두시가 되기엔 다소 이른 새벽 한 시 십이분. 김지하의 「새벽 두시」라는 시를 찾아 읽는다.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 책을 읽을 수도 없다 /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새벽 두시다 / 어중간한 시간 / 이 시대다” 가만있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시대를 살면서 하워드 진이 이 책 말미에 적어둔 셸리의 시 “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 저들이 도저히 격하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모아! / 잠든 사이 떨어졌던 이슬방울을 털어내듯 / 너희 몸에 묶인 족쇄를 떨쳐내라-- / 너희는 다수이고, 저들은 소수이다!”를 당당하게 소리쳐 외치고 싶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미국과 추진하는 FTA협상이나, 이라크 파병 연장 문제,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문제에 대해 다 알면서 침묵하는 까닭. 그것이 어쩌면 이제는 우리도 우리보다 힘없는 다른 나라를 등쳐먹고 살 만해졌다는, 이라크 아르빌에, 레바논에 점령지원군, 평화유지군을 보내고, UN 사무총장 선거에 나서며 미국이라는 패권체제의 한 귀퉁이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는 비열한 자신감의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우리들의 졸렬한 생존감각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이 글을 써내려갈 자신이 없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슬라보이 지젝이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이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유토피아적 불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들을 반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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