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핑퐁, 소설 악보를 쓰다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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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가는 어떤 소설을 보면 소설가가 궁금한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결국 그 작가를 만났고 자신의 궁금증을 풀었다. 박민규의 소설도 그런 축이다. 하지만 그를 굳이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는 이미 소설 속에 자신을 온몸으로, 몸부림치듯, 핑퐁핑퐁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소설가는 소설 뒤로 숨는 거라고 말한 소설가의 인터뷰를 본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또다른 명제를 맞닥뜨렸다. 소설만큼 소설에 써있는 활자만큼, 소설에서 훌쩍 띄어넘은 단락만큼 박민규를, 핑퐁핑퐁 단어를 읽을 때마다 소설가 박민규가 떠오른다. 만나본 적 한번도 없지만 몇 번이고 그를 만나 칡차를 나눠 마신 것처럼 알은 척 하고 싶어진다. 박민규는 소설 뒤로 숨지 않고 소설 앞에서 소설을 지휘하고 있다. 이 사람, 지휘자 출신 아니야?

세상의 모든 소설가에겐 공평하게 모국어란 도구가 쥐어져있다.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의 둘레를 구성하며, 성장하는 동안 익히고 보아온 분위기로 문체를 휘날리며 소설을 쓴다. 언젠가 8옥타브 안에서 아직도 새로운 멜로디가, 음악이 작곡되어지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겨우 8옥타브밖에 없는데 어떻게 기기묘묘하고 신선하고 지루한 음악들을 만들어내는거지? 음악가들은 천재, 라고 생각했다. 화가도 예외일 순 없다. 따지고보면 예술가는 모두 천재다. 하지만 소설가는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노력가 타입이라고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정말, 그렇다. 그들을 천재이게 한 데에는 천재적인 두뇌가 아니라 놀라운 인내의 엉덩이 덕분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붙였는데 박민규의 엉덩이도 그런 힘이 있다는 게 놀랍다. 그는 음표를 갖고 놀아야 할 사람이었는데 음표로는 성이 안 차 활자 세상까지 넘보고 있으니, 그게 더 놀랍다.

인류를 위한 대서사시, 핑퐁, 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는 활자로 악보를 짓는 소설가다. 핑퐁핑퐁 스매싱을 날릴때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여전히 듀스 포인트이고, 인류는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면서, 깜박한 존재들답게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가끔 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혼자 있을 때 머리를 벅벅 긁으면 아주 오랜만에 긁는 데도 부스럼 딱지 같은 것들이 나온다. 부스럼 딱지가 있었다는 건 바로 얼마전 머리를 긁었다는 것인데 머리를 긁는 습관이 일상이 아니라 간혹 일 뿐인데, 그때까지 혹은 무의식중에 머리를 긁었던 흔적으로 부스럼 딱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줄도 모르면서 까불며 살고 있는 것처럼 핑퐁의 못과 모아이와, 마리와 달과, 치수와 쎄크라탱이, 존메이슨과 캐서린이 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채 핑퐁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나는 그래서 간혹 슬픈가? 어디에선가 나처럼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는 인류들이 천구백오십만명 살고 있다는 데에서 슬픔을 위로하는가?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은 독자라면 핑퐁은 낯설지 않다. 이미 박민규는 첫소설집에서 독자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박민규 스타일을 읽었던 전력 덕분에 <핑퐁>은 어렵지 않게 주입된다. <카스테라>에 나왔던 기괴한 생물들이, 뭉클한 일상의 감동이, 순환되는 슬픈 인류의 역사를 총망라하듯 <핑퐁>은 슬픈 인류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원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종족이었다. 우리는 단 한번의 성공을 하기 위해 살아있는 게 아닐까. 인류의 성공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살아남아있는 어떤 생물보다 더 기묘한 생물들인 인류. 일찌감치 죽은 공룡을 시조새를 따 시키면서 인류가 살아있는 까닭은 실패하기 위해서다. 못아이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매일 지하철을 타고 있는 백수의 이야기는 <갑을고시원체류기> 혹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같은 궤도를 달린다. 따 당하고 있지만 따 당한 시절을 잊지 않으며 따 당하는 삶이 인류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못과 모아이는 속삭인다. 가을바람처럼.

음악을 하지 그랬어? 말하고 싶지만 그는 음악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욕심쟁이 예술가다. 사람의 눈으로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며 스스로 정화시키게 만드는 활자여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욕심쟁이 예술가. 직접 그린 삽화들, 쉼표와 마침표, 말줄임표등 문자코드를 이용해 4분음표 8분음표를, 폰트의 크기로 낮은음자리표 높은음자리표를 구사하며 활자와 악보를 동시에 생산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음악 한곡이 흘러나온다. 할렘가의 랩 같기도 하고 구성진 전통가요 같기도 한 리듬을 부여하며 소설을 쓰는 박민규. 인류로부터 배제당한, 인류를 배제시키는 핑퐁을 치며 세계는 어떻게든 흘러간다. 계절로 친다면 이 소설은 가을이다. 화사한 봄도, 뜨거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아닌 가을이다. 인류는 언제나 벼이삭과함께 가을에 고개를 숙여왔다. 자신을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내 생의 시계 바늘이 어디쯤 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인류는 가을에 핑퐁치며 벼이삭과 함께 인사한다. 핑퐁핑퐁핑퐁핑퐁. 하며, 인사한다. 다수결의 세상에서 무명의 소행성으로 살아가는 박민규의 인사에 무명의 소행성으로 살아가는 내가 스매싱한다. 나도 핑퐁핑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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