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책 읽기] 내 아픈 그곳에 나의 보물이!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내 논이 아닌데도 노랗게 물든 황금빛 들판엔 흐뭇해집니다. 익은 벼들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네요.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는 어머니 말씀을, 그 옛날엔 왜 그렇게 잔소리로만 들었을까요? 그런데 익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면 그건 병든 벼라고 대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겸손은 그저 자신을 낮추는 행태라기보다 체험입니다. 가톨릭 신부인 안셀름 그륀이 쓴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은 바로 그 ‘겸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덕행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성숙해가는 하나의 체험이다.”
나의 보물은 내가 아픈 그곳에 놓여있다고 하지요? 겸손을 체험케 하는 경험은 무엇보다도 상처와 아픔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성공의 경험, 성취의 경험도 중요합니다. 사랑을 하건, 일을 하건 몰두하고 몰입한 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삶은 그만큼 경쾌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아픔이 없으면 걷잡을 수 없이 오만해지고 교만해지고 강퍅해집니다. 남의 아픔과도 교감할 수 없는 겁니다. “앓아본 경험이 있는 의사만이 다름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그리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강하게 서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내가 상처입고 약해져 있을 때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다. 그 때 나는 하느님께서 본래 만들어놓으신 참된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주향/수원대 교수 | |
그륀 신부는 하느님께로 열리는 마음은 얻어맞고, 상처 받고, 부서진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추락과 좌절이야말로 스승 중의 스승이라는 거지요. 누가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부자들은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어서 오만불손해진 부자는 복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이 복입니다. 존재는 슬픔으로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늘 슬픔 속에서 헤매기만 하면 우울증이고, 반대로 늘 기쁘다고 들떠 있으면 미친 겁니다. 충분히 슬퍼하되 슬픔을 강물처럼 흘려 보낼 줄 알아야 하고, 맘껏 기뻐하되 기쁨을 구름처럼 흘려 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경의 표현대로 생이 꿈 같고, 환영(幻影)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깨달음이 필요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이 이슬 같고 번개 같음을 안다면 오만이나 아만(我慢)이 어디에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아만이나 오만을 버리고 나면 굳이 겸손을 강조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