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물상] ‘안나 카레니나’
  • 강인선 논설위원 insun@chosun.com
     

    •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남편이 프랑스 가정교사와 바람난 것을 안 아내 안나는 한집에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집안은 뒤죽박죽이 된다. 안나는 청년 귀족과 연애를 시작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톨스토이는 7년 집필 끝에 1869년 ‘전쟁과 평화’를 탈고한 뒤 정신적 탈진에 빠졌다. 창작의 기쁨도 느끼지 못했고 결혼생활도 이전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신경은 곤두섰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스어 공부에만 매달려 아내의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4년 방황 끝에 쓰기 시작한 작품이 ‘안나 카레니나’다. 그래서인지 그의 펜은 무거웠다. 그는 한 편지에 “이 소설은 지루하고 저속하다”고 썼다. “안나가 너무 지겹다. 마치 떫은 무를 계속 먹는 것 같다”고 했다. 작업은 5년이나 계속됐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러나 당시 러시아 사회상을 다각도로 비춘 최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불륜 드라마를 넘어 1861년 러시아 농노해방 이후 결혼과 가족 문제를 포함한 당대 새로운 사회상과 풍속을 150명이 넘는 등장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로맹 롤랑은 “구성이 ‘전쟁과 평화’보다 완벽하다”고 했고, 토마스 만은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라고 했다.

      ▶130년이 흘러 미국의 한 출판사가 스티븐 킹, 톰 울프 같은 미국·영국·호주 유명 작가 125명에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문학작품 10권씩을 선정해달라”고 했다. 여기서도 ‘안나 카레니나’는 최고였다. ‘전쟁과 평화’도 2위 ‘보바리 부인’(플로베르)에 이어 3위에 올라 톨스토이는 영어권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최근 미국에 고전 읽기 열풍을 일으킨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도 ‘안나 카레니나’를 “최고의 러브 스토리”로 꼽았다.

      ▶스탕달은 “소설이란 거리로 들고 다니는 거울”이라고 했다. 소설의 존재 이유가 인간과 인생의 재현임을 말하는 명언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고리키의 찬사 역시 모든 것을 생생히 되살려내는 그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세계 전체다. 그는 한 세기에 걸쳐 체험한 것들을 놀라운 진실성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안나 카레니나’가 시대와 언어권을 초월해 찬사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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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2007-02-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요.
    또 님의 글로서 욕망이 이는 것을 봅니다.

    stella.K 2007-02-28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도 마음에만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 글 읽고 하루종일 아른거려서 혼났습니다.^^
     
    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언젠가...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본 적이 있다. 플리처상 보도사진 부분에서 수상했다는 짧은 제목과 함께. 사진엔 문외한이라 어떤 필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은 강렬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보면, 겉표지의 사진은 제법 서정적이고 낭만적여 보이기도 하다. 물론 지붕위에 앉았으니 불안은 하겠지. 하지만 소년의 돌아앉은 모습에 묘한 황량한 여유로움이 베어있는 듯하다. 과연 이럴 수 있을까? 그래도 소년의 마음은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몰래 무임승차 했으니 불안할 것이고, 어서 이 기차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분명 무임승차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여행 하면서 무임승차와 서리의 묘미는 여행의 짜릿한 기쁨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지않던가.  더구나 제목 끝말을 '여정'으로 설정했으니 대뜸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또한 '엔리케'란 리틴스러운 이미지가 주는 느낌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나머지 사진이나 책의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비참하다.  살아 보겠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아이들과 그 위를 나르는 검은 독수리의 이미지란 스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기차의 지붕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에 대한 사투는 참으로 모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운이 없어 거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사지가 절단 나거나 죽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들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어린 나이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부럽지 않게 자식을 키워 보고자 불법이민자로 미국땅에 발을 디딘 부모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러한 도전을 서슴치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죽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길에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정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란 죽음 조차도 갈라놓지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나는 고백 하건데, 그런류의 보도 사진이나 뉴스 보도물 보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보면 괴롭다.내가 살고 있는 지구 어느 한쪽에서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뭘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나는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란 말로 본 느낌을 대변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그런 보도물을 접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나를 들여다 보면, '이 생각이 과연 전부 다인가?'가에 진실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해 버리고 만다. 눈이 보배라고 사람은 좀 더 나은 것, 화려한 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러운 것에 눈을 두기를 좋아한다. 나 역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스컴은 연일 그것을 쫒기에 바쁘다.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사람들의 눈과 귀는 점점 더 길들여져 우리 바깥은 세계에 대해선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분야나 그렇듯 속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도 조그만 불씨하니 지펴내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낼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것이 썩있다면 저널리즘이라고 예외겠는가? 그래도 소냐 나자리오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으니, 저널리즘은 살아있다!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참혹한 현실을 펜대에 풀어내기 위해 그녀는 무려 5년이란 세월을 준비했고, 엔리케와의 동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녀 역시도 가정이 있었고, 동행취재하는 동안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감행하도록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기자 정신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휴머니즘은 살아있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어떤 개기로 작년부터 우리나라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는 것에서 조금은 한발 다가선 느낌이고, 알고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들은 탈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알고보면 이 책에 펼쳐진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탈북자들 역시 북한에 가족 내지는 자녀들을 두고 탈북을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 필리핀 등지로 흩어 진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은 매춘 내지는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어쨌든 가까스로 그렇게도 원하던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돼 수족 놀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에 두고 온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 적지않은 돈을 벌어 알선책에게 주지만, 잘못 아이들을 데리고 와 졸지에 그 아이는 고아  신세가 되기도 한단다. 북한에 남겨진 아이들도 엔리케를 비롯한 이 책에 소개된 아이들과 같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OECD에도 가입한지 오래고,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탈북자 1만명을 돌파 했다고 한다.

    가끔 나는...탈북자,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가족을 두고 이렇게 힘들게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한은 과연 살만하던가요? 사람들이 잘해 주던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체제도 다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은 민족끼린데도 박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또한 경제적으로도 너무 안 좋으니 나 살기도 버거운 판에 남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읽으면서...행복도에서 1순위라고 하던 방글라데시를 생각했다. 없이 살기로야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온두라스나 그 나라나 오십보 백보 아닌가? 그런데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나라는 아직 상업주의의 물결을 덜 타고 있고, 삶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나라는 국제 경쟁력은 여타의 국가 보다 떨어질지 모르나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테니 그래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의 가치가 개인으로 하여금 꼭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우린 너무 쉽게 그것을 믿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고, 내 자녀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희생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사면 심할수록 이것은 더욱 자명해진다.

    가족은...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독립된 인격과 경제적 자립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것은 가난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켜 보겠다고 교육 엑소더스 대열에 밀어 넣은 가족들을 보라. 그중 성공한 케이스도 없진 않지만, 가족해체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엔리케를 보라. 엄마와 떨어지고 보니, 버림 받았다는 생각. 모정에 대한 그리움. 탈선. 분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 간다. 그러니 없이 살아도, 지금 당장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지 못한다 해도 가족만큼은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 엔리케의 고통은 엔리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엔리케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당장 북한에도 존재한다. 또한 아직도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엔리케와 똑같은 사연과 경로로 기차 지붕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고 있으며, 제2, 제3의 엔리케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럴 때 국가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읽으면서 화가 났다.

    국가가...개인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보인책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밀입국자가 가장 많은 나라 내지는 교육 엑소더스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하고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가정과 개인의 고통을 언제까지 침묵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속수무책이 아닌가? 더구나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엔리케는 어머니와 상봉을 하지만 많은 정서적인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들을 치유하고 상담해 줄만한 마땅한 사회 시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 그쪽으로 부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기사 밀입국자니 어디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병이 나도 의료보험 해택도 받지 못할텐데...미국이 무슨 봉도 아니고.  

    이 책은...책이 가지는 문제점은 다소 있어 보인다. 어느 독자의 지적대로 오자나 탈자도 많지만, 동어반복적인 내용이 많아 전달에 있어서 다소는 그 긴장감이 떨어져 보였고, 무슨 문학도 아닌데 여러 사람의 얘기를 다루다 보니 다소는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기자의 싯점을 견지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책이 전 세계에 출판되고, 사진이 전파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언급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나는 제발 우리의 아이들이 인권 교육을 재대로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고, 거기에 이 책이 나름 공헌할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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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던 걸’에 홀린 충무로

    ‘지금’보다 발칙했던 30년대 청춘 시대극 잇따라
    개 끄는 걸에 ‘작업’ 거는 보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신’
    ‘딴스홀’ 금하자 카페서 춤추기

    어수웅기자 jan10@chosun.com 

  • 2000년 9월,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문학동네 간)라는 알듯 모를 듯한 제목의 소설이 출간됐다. 당시 스물여섯의 신인작가 이지형이 다루고 있던 시공(時空)은 1930년대 식민지 경성.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인 조선총독부 서기 이해명과 바람둥이 카페여급 조난실은 대관절 독립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일편단심 연애의 한 길로 전력 투구한다. 대의명분만이 펄펄 살아 숨쉰다고 생각했던 비장한 시대는 이로써 능청스런 뒤집기를 당한다.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이었던 이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인 작가 임철우는 “당혹스런 서울판 ‘오딧세이’”라고 적었다.

    2007년 2월, ‘해피엔드’ ‘사랑니’를 만들었던 정지우 감독은 오는 5월 촬영을 목표로 매일 밤 시나리오 작업에 여념이 없다. 바로 ‘망하거나…’를 원작으로 한 1930년대 낭만 서사극 ‘모던 보이’다. 뿐이랴. 제작사 싸이더스FNH에서 준비 중인 일제시대 최초의 방송국 이야기 ‘라듸오 데이즈’의 원제는 ‘모던 껄’이었다. 박종원 감독은 손예진을 캐스팅해 여간첩 김수임을 신여성으로 되살려낸 ‘낙랑클럽’을 제작 중이고, 최초의 서양식 병원에서 벌어지는 시대 공포극 ‘기담’도 있다. 빛깔과 무늬는 약간씩 다르지만, 김지운 감독이 송강호·이병헌·정우성과 찍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송일곤 감독이 기획 중인 ‘연애의 시대’(가제), 그리고 ‘타짜’의 최동훈 감독 머릿속에도 그 시대 발랄한 청춘들에 대한 경쾌한 구상이 있다. 말 그대로 우후죽순. 경성 시절의 표기법으로 ‘모던 뽀이’ ‘모던 껄’들에게 2007년의 한국영화가 매혹당한 것이다.

    • ▲ ▲안석영의 만화‘모-던 뽀이의 산보’(1928)

     

    ◆몇 안남은 한국영화의 처녀림

    현재의 충무로가 이 근대의 처녀 총각들에게 반해버린 첫 번째 이유는 “상식과 고정관념의 배반”이다. 창경궁 밤벚꽃놀이에 개를 끌고 산책하는 모던 걸에게 ‘작업’ 걸던 모던 보이, 남산에서 ‘룡산’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신’을 연출하는 풍경, 총독부가 ‘딴스홀’을 허락해주지 않자 카페에서라도 춤을 추는 식민지 시대의 열혈 청춘들. 지금 이곳의 젊은이들과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철저하게 낯선 풍경들이다. 또 하나는 “이 시대와 공간이 몇 안 남은 한국영화의 처녀지”(정지우)라는 것. 왕성한 기획력으로 위기를 돌파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온 한국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몇 안 남은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다.

    • ▲ ▲식민지 시대 모던 걸의 날렵한 패션을 보여주는 안석영의 만화‘꼬리피는 공작’(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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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의 시간차는 어디서 비롯됐나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사실 1930~40년대 경성이 우리의 경직된 기대와는 달랐음을 알려주는 책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출간됐다. 이지형의 소설은 물론,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2002), 신명직의 ‘모던 뽀이, 경성을 거닐다’(2003), 권 보드래의 ‘연애의 시대’(2003) 등 숱한 인문서들이 그 시절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을 일찌감치 재발견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활자와 스크린의 시간차는 무슨 까닭일까. 이미 7년 전 소설 판권을 사들였던 정지우 감독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게임이었다”고 했다. 조선총독부와 미스코시 백화점 등 당시의 근대 건축을 재현해야 하는 ‘모던 보이’의 예상 순제작비는 80억 원가량. 요즘 제작비 수준으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는 ‘쉬리’(1999)의 제작비 31억 원에 대해 “너무 많다”고 고함치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아직도 적지 않다. 그 시절에 비해 놀라울 만큼 진화한 CG 기술과 작업환경이 상대적으로 제작비를 줄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충무로의 우울한 지난해 성적표 탓에 돈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또 유난히 일제시대에 예민한 한국 대중의 정서 탓에, 새롭게 발굴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뻔뻔스런 면모’가 만장일치의 호응을 이끌어 낼지도 의문이다. ‘라듸오 데이즈’를 제작 중인 싸이더스 FNH의 차승재 대표는 “그 시대라고 모든 국민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면서 “독립운동과 모던보이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층위가 다른 문제일 뿐”이라며 낙관적 기대를 했다. 이제 빠르면 하반기부터 다양한 얼굴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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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거탑속 ‘진부한 설정’ 해부
  • 장준혁 외식은 고급일식 vs 최도영 외식은 피자
  • 조선일보 염강수기자 ksyoum@chosun.com
    조선일보 최보윤기자 spica@chosun.com 
    • 직장인과 남성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MBC 주말드라마 ‘하얀 거탑’. ‘새롭다’는 게 호평의 근거다. 그러나 ‘하얀거탑’은 출세형 인간 장준혁(김명민), 양심의사 최도영(이선균)의 스타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도식적인 장치’(클리셰)도 적잖이 사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사실 100% 새로운 드라마란 존재하기 어려운 법. 그렇다면 ‘하얀거탑’ 속에 숨은 진부함은 어떤 게 있을까?
    • ◆고학생 vs 의사 집안 출신

      “왜 그렇게 외과과장이라는 자리에 연연하냐”고 말하는 최도영에게 장준혁은 이렇게 말한다. “너처럼 형제가 줄줄이 의사인 놈들은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장준혁은 고교 시절,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가면 어머니가 굶을까 봐 도시락 하나만 들고 간 기억이 있는 인물이다.


      ◆‘최고급 정장 슈트’ 장준혁 vs ‘캐주얼풍’ 최도영

      내과의사 최도영은 인간미 넘치고 극중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이미지로 파스텔톤의 의상을 즐겨 입는 반면, 외과의사 장준혁은 무채색 계열의 셔츠와 화이트 셔츠를 번갈아 입으며 냉정하고 야심만만한 이미지를 강조한다.

      ◆정치하는 ‘날라리’ 부인 vs 과묵한 현모양처

      장준혁의 아내(임성언)는 남편보다 의사부인회 회장으로 명인대학병원 실세 부원장 우용길의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로비를 위해 화랑, 미용실을 따라다니며 의사부인 회원들에게 뇌물을 건네느라 바쁘다. 때로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과 노는 장면도 목격된다. 반면 최도영의 아내(윤예리)는 따로 자신의 생활이 없이, 아침·저녁 식사 준비하는 모습만 나온다.


      ◆장준혁의 밤 vs 최도영의 밤

      장준혁의 밤은 숨가쁘다. 외과과장 득표 전략을 짜기 위해, 혹은 의료사고 후 대책을 세우기 위해 장인과 장인이 형님으로 부르는 모사꾼 의사회장 등과 함께 어둑한 일식집에서 식사를 자주 한다. 이어 룸살롱에도 들러야 하고, 정부(情婦)인 희재의 와인바에 들렀다가 다시 병원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잠은 희재의 오피스텔에서 잔 뒤 아침에 집에 들러 아내에게 “수술이 있었다”는 핑계를 대며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한다.

      최도영의 밤생활은 병원 연구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실험 결과를 분석하거나 집안 서재에서 공부하는 것. 때로 딸의 공작 숙제를 도와준다. 장준혁과 만나는 것 외에 이권 등을 관계로 술집에서 사람을 만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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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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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토머. 토포러. 메모리모자이커. 타임스키퍼 등등. 화자가 캐비닛에서 꺼낸 파일들 보면 하나 같이 너무 그럴 듯해서, 정말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뭐란 말인가? 주의사항을 보니, 이 캐비닛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 이라지 않는가. 띠옹~!  속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귀가 얉은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야기가 좋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제부턴가 보이는 것, 드러난 것에 더 많은 거짓과 위선이 있어 믿지 못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암튼 난 이런 이야기가 꽤 흥미롭고 마음이 갔다. 하지만 저 주의사항을 읽었을 때 꼭 허무했던 것마는 아니었다. 작가는 어찌보면 있지도 않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 드러난 것들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속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왜 소설을 읽는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사실 읽으면서도 내가 속을 것을 어느만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속였다고, 독자인 내가 속았다고 어떻게 100%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정도가 심한 '심토머'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그 비스무레한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 심심치 않게 공개되서 정말 놀라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니, 저러고 어떻게 살아?"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도 산다. 우리와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나는 작가가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고딕체로 어찌보면 푸념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연극 대사 같기도 한 그 툭툭던지는 말들이 참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개다가 소설가가 뻥을 치지는 능력이 없다면 그게 어디 소설간가?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속을 줄 알면서 그 속는 맛 때문에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평범하든 비범하든 그 이야기속에서 인간의 인간됨의 진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재주가 작가에게 없다면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을거라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자극할만한 뭔가의 울림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읽지 않을 거란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나름의 구조적인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참 독특하고 기존의 소설적 화법을 과감하게 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것이 문체는 어찌보면 하루키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도 같고, 나중에 공대리가 잡혀가 손가락, 발가락 잘리는 것을 보면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내내 킥킥대고 웃으며 읽다가 말미에 갈수록 약간은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뭔가 늘어지는 것 같다는 그 지점에서 나름대로 잘 마무리하고 나왔다는는 점이겠지.

    읽다보니, 앞으로 작가들은 점점 발품 팔아 글을 쓰지 않고, 있는 재료와 상상력만 가지고 글을 쓰게 될거라고 하시던 나의 옛 스승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분의 말은 맞는 말이된지 오래고, 이 소설에서도 새삼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에게 있어서 취재력이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가 될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도 완성하게 발품 팔아가며 소설을 쓰고 계시는 조정래 씨나 최인호 씨 보면 그분들이 어떻게 취재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또한 작가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취재력 좀 발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처음에 이 글줄을 읽었을 때 설마...했다. 하지만 봐라. 내가 언제 독자로서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거 봤나? 위에서 바로 쓰지 않았나? 취재력 좀 발휘해 보라고. 그의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이 말은  독자를 잘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작가 나름의 방어술이었을까?

    뒤에 작가 전경린과의 인터뷰 내용이 참 절절하다. 역시 작가란 배곪는 직업이란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배 곪는 줄 뻔히 알면서 작가가 뭐 그리 좋다고 못되서 안달하는 것일까? 그래도 그에겐 춘섭이라고 하는 고마운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친구가 그랬다지,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고. 그래서 2년간 매달 50만씩 그를 도와줬다고 한다.  멋있는 친구다. 지금 그는 수천억원 매출 올리는 사장이 되었다고 하니, 분명 위에 계신 분께서 그의 갸륵한 마음을 알고 복을 주신게다. 일개 작가지망생 나부랭이 밖에 안되는 나도 가끔 아는 사람 만나면 아는 척 씨부리고 다닌다. 작가는 명예직이라고. 작가가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줄 아냐고? 왜 작가는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없이 오직 이 나라의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글만 쓰면 안되는 걸까?

    최재천 교수가 지난 주일 TV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린 위기란 말은 너무 잘 쓴다고. 인문학의 위기, 자연과학의 위기, 경재위기 등.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다. 이것이 믿겨지느냐고.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만에 이런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전세계적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린 아무런 가진 자원이 없다. 우리나라가 내세울 것은 오로지 학문 연구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5백명의 가능성 있는 학자를 1년에 4천만원씩 10년 간(?) 무상으로 지원해 주면, 그들이 훗날 각 분야에서 브레인으로 그동안 연구한 것을 쏟아낸다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냐고. 그렇게되면 총 200억 정도가 드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경재 규모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좋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5백 명에 글쟁이는 과연 낄 수 있을까? 아니 끼어야만 한다. 아니면 춘섭 씨 같은 친구나 배우자를 만나던지...

    아무튼 문학동네가 또한번 '김언수'라는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배출해 냈다. 어느 심사평에서처럼, 나 역시도 김언수란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가 된다. 그런데 이 작가 겸손하기도 하고 자신만만 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작가가 단순히 돈 없고, 빽 없는 독자 하나를 후려쳐서 책 한권 더 팔아먹을 요량이라면 귀싸대기를 맞아도 싸다. 그런데 난 이 작가에게 따귀를 올려 붙일 생각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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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만두 2007-02-0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고 싶었지만 때리고는 싶더군요. 마지막에서요^^:;;

    stella.K 2007-02-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물만두님이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