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걸’에 홀린 충무로

‘지금’보다 발칙했던 30년대 청춘 시대극 잇따라
개 끄는 걸에 ‘작업’ 거는 보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신’
‘딴스홀’ 금하자 카페서 춤추기

어수웅기자 jan10@chosun.com 

  • 2000년 9월,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문학동네 간)라는 알듯 모를 듯한 제목의 소설이 출간됐다. 당시 스물여섯의 신인작가 이지형이 다루고 있던 시공(時空)은 1930년대 식민지 경성.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인 조선총독부 서기 이해명과 바람둥이 카페여급 조난실은 대관절 독립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일편단심 연애의 한 길로 전력 투구한다. 대의명분만이 펄펄 살아 숨쉰다고 생각했던 비장한 시대는 이로써 능청스런 뒤집기를 당한다.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이었던 이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인 작가 임철우는 “당혹스런 서울판 ‘오딧세이’”라고 적었다.

    2007년 2월, ‘해피엔드’ ‘사랑니’를 만들었던 정지우 감독은 오는 5월 촬영을 목표로 매일 밤 시나리오 작업에 여념이 없다. 바로 ‘망하거나…’를 원작으로 한 1930년대 낭만 서사극 ‘모던 보이’다. 뿐이랴. 제작사 싸이더스FNH에서 준비 중인 일제시대 최초의 방송국 이야기 ‘라듸오 데이즈’의 원제는 ‘모던 껄’이었다. 박종원 감독은 손예진을 캐스팅해 여간첩 김수임을 신여성으로 되살려낸 ‘낙랑클럽’을 제작 중이고, 최초의 서양식 병원에서 벌어지는 시대 공포극 ‘기담’도 있다. 빛깔과 무늬는 약간씩 다르지만, 김지운 감독이 송강호·이병헌·정우성과 찍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송일곤 감독이 기획 중인 ‘연애의 시대’(가제), 그리고 ‘타짜’의 최동훈 감독 머릿속에도 그 시대 발랄한 청춘들에 대한 경쾌한 구상이 있다. 말 그대로 우후죽순. 경성 시절의 표기법으로 ‘모던 뽀이’ ‘모던 껄’들에게 2007년의 한국영화가 매혹당한 것이다.

    • ▲ ▲안석영의 만화‘모-던 뽀이의 산보’(1928)

     

    ◆몇 안남은 한국영화의 처녀림

    현재의 충무로가 이 근대의 처녀 총각들에게 반해버린 첫 번째 이유는 “상식과 고정관념의 배반”이다. 창경궁 밤벚꽃놀이에 개를 끌고 산책하는 모던 걸에게 ‘작업’ 걸던 모던 보이, 남산에서 ‘룡산’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러브신’을 연출하는 풍경, 총독부가 ‘딴스홀’을 허락해주지 않자 카페에서라도 춤을 추는 식민지 시대의 열혈 청춘들. 지금 이곳의 젊은이들과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철저하게 낯선 풍경들이다. 또 하나는 “이 시대와 공간이 몇 안 남은 한국영화의 처녀지”(정지우)라는 것. 왕성한 기획력으로 위기를 돌파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온 한국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몇 안 남은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다.

    • ▲ ▲식민지 시대 모던 걸의 날렵한 패션을 보여주는 안석영의 만화‘꼬리피는 공작’(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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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의 시간차는 어디서 비롯됐나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사실 1930~40년대 경성이 우리의 경직된 기대와는 달랐음을 알려주는 책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출간됐다. 이지형의 소설은 물론,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2002), 신명직의 ‘모던 뽀이, 경성을 거닐다’(2003), 권 보드래의 ‘연애의 시대’(2003) 등 숱한 인문서들이 그 시절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을 일찌감치 재발견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활자와 스크린의 시간차는 무슨 까닭일까. 이미 7년 전 소설 판권을 사들였던 정지우 감독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게임이었다”고 했다. 조선총독부와 미스코시 백화점 등 당시의 근대 건축을 재현해야 하는 ‘모던 보이’의 예상 순제작비는 80억 원가량. 요즘 제작비 수준으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는 ‘쉬리’(1999)의 제작비 31억 원에 대해 “너무 많다”고 고함치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아직도 적지 않다. 그 시절에 비해 놀라울 만큼 진화한 CG 기술과 작업환경이 상대적으로 제작비를 줄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충무로의 우울한 지난해 성적표 탓에 돈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또 유난히 일제시대에 예민한 한국 대중의 정서 탓에, 새롭게 발굴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뻔뻔스런 면모’가 만장일치의 호응을 이끌어 낼지도 의문이다. ‘라듸오 데이즈’를 제작 중인 싸이더스 FNH의 차승재 대표는 “그 시대라고 모든 국민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면서 “독립운동과 모던보이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층위가 다른 문제일 뿐”이라며 낙관적 기대를 했다. 이제 빠르면 하반기부터 다양한 얼굴의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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