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 산자이 릴라 반살리 |
| 주연 : 아미타브 바흐찬, 라니 무커지 |
누구든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적이 한번씩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나면 그 사람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양, 다음에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은연 중 갖게 되어 사람에게 마음 문을 못 열게 된다. 열더라도 반쯤은 문을 닫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희망은 있을까? 무한한 신뢰와 교감은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소녀가 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중 삼중고의 아이다. 그 아이는 또한 야생마이기도 하다.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미셸이 이 아이의 이름이다. 그 아이가 왜 그토록 뻗대기만 하는지 나는 영화 초반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 이해할 것도 같다. 아이는 한마디로 자신의 감각을 이용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처음부터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을 못 보면 청각이라도 뛰어나야 할 텐데, 귀로도 들을 수 없으니 무엇하나 사물을 느끼고 만진다는 게 불가능하다 못해 두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한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미셸이 만난 선생님의 이름은 사하이. 남자고 괴짜다. 이 낮선 선생님을 진정한 스승으로 맞아 들일 때까지 미셸이나 미셸의 부모는 그를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미셸을 그렇게 다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집 세고. 제 3자가 봐도 너무 강압적이지 않은가? 미셸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부모가 그를 신뢰할 수 없다. 그쯤에서 사하이로서도 백기들고 나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하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고 그 집을 나온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끝까지 미셸을 책임진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도 그를 집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셸의 아버지는 당장 나가줄 것을 권고한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이니 해고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하이는 선생은 고용되고 말고의 존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선생은 선생일뿐이라고.(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런 그의 우직함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사하이는 결국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나올 찰라 미셸의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그래 좋아. 이왕 그만 두는데 저것 하나는 내가 고쳐주고 떠나겠어" 하며 미셸에게 달려든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해고한 미셸의 아버지가 20일간 출장은 간다는 것이다. 오, 예! 이런 황금 같은 기간을 그냥 놓칠 수 없는 그는 엄마를 설득해 20일 동안에 미셸이 변화가 없으면 그땐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한다. 그 20일 동안의 사하이의 고군분투는 정말 눈물겹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소득없이 미셸의 집을 떠나야 했다. 그것도 미셸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지만 마지막 1분1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 결국 미셸의 아버지와 마주친다. 얼마나 재수없는 순간인가?

하지만 미셸의 깨달음의 순간은 또한 이때 일어난다. 미셸은 바로 이때야 비로소 사물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고 소통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건 시쳇말로 '도를 트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느끼는 또 한 번 세상을 넓은 시야로 보게 되고, 가슴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건 미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도 어느 한 분야에서 고군분투 하다가 "유레카!"하며 탄성을 지르는 순간이 있지 아니한가? 이런 순간은 솔직히 인생에 있어서 몇 번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런 순간을 맞지 못하고 죽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이 있다는 것. 나는 과연 지금까지 몇 번의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미셸과 그 부모는 얼마나 기뻤을까? 이것은 사하이 조차도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셸은 이제 더 이상 야생마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의 순간이 있고나니 미셸은 나날이 숙녀다워졌고, 꿈을 꿀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의 꿈은 대학을 진학하는 것. 다행히도 미셸은 무사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만한 그 지점에서 미셸은 갈등과 좌절도 겪게 된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낙제. 동생의 결혼을 보면서 자신이 과연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온전한 여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사하이 선생님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났다. 그렇게도 가르치는 것에 철저하셨고 자상하셨던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이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일어나기 위해 서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위협이 된다. 무엇보다 공부는 아무리 해도 낙제를 면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싶을 때 그녀를 강하게 잡았던 것은 사하이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진 선생님 때문에 그녀는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고 결국 와신상담 끝에 학점을 이수하고 당당하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간지 20년만의 일이고 선생님과 이별하게 된지 12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졸업식 날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됐고 수소문 끝에 사하이 선생님을 찾았을 때 자신의 학사복 입은 모습으로 선생님을 뵐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선생님의 병은 깊어질 때로 깊어져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셸은 그 옛날 자신을 가르쳤던 그 방식 그대로 선생님을 가르쳤고, 그 순간 만큼은 기억을 되찾은 사하이는 기쁠 때면 미셸과 함께 추었던 어색한 춤을 춘다.
아, 이 마지막 부분은 정말 감동이었다. 나는 어느 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하이를 불쌍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위대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대로 병에 걸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미셸을 지켜봐 주며 늙는 것도 박수를 받을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는 아우라일 것이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병.
제자가 잘되는 것은 선생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 이탈리아의 거성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말했던 것처럼, 그런 선생님은 존경은 받을 수 있지 모르지만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라시안은 존경을 받으면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하이라면 다르다. 그는 존경도 받지만 사랑도 받는다. 뭐 때문에? 자신이 한때 미셸을 가르쳤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본래 누가 조금만 잘되도 배가 아픈 존재지만 그것이 또 자신 때문이라면 얼마나 뻐기기 좋아하는 존재던가? 또한, 감추고 숨어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이렇게 잘 되었노라고 말하기 좋아하기도 한다. 거기엔 어떠한 심리가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레이건 대통령을 나름 좋아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미합중국의 사랑 받는대통령이었지만 그의 말년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젊었을 때 뭐했다고 자신의 업적 기리기 하는 거 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초두에 상처 받은 인간에 대해서 말했다. 그건 무엇보다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찔리기도 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난 한때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아볼 때 '난 정말 선생도 아니었구나.' 할 때가 있다. 특히 내가 교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폐기가 있는 한 아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땐 내가 상담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떨결에 맡게 됐는데 난 그 아이의 이상 야릇한 행동에 아,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동안 녀석의 이상한 복수에 시달리곤 했다. 지금도 녀석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사람들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내가 사하이 같은 선생님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난 그때 왜 그렇게 선생으로써 책임감이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또 한 번 자책했다.
상처 받을 것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핑계다. 100% 다 줘 보지도 못했으면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뭐든지 나를 아낌없이 던질 수만 있다면 상처란 없다. 상처 받고, 안 받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인데 거기에 어떻게 상처가 있을 수 있을까? 특히 선생이 제자에게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이미 선생이 아니다. 그런데 허울만 좋은 선생이라면 제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선생님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열려고 했는데 결국 더 마음의 빗장을 잠그게 됐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사하이는 20일이라는 주어진 기간에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과가 없다면 그건 그의 책임은 아니겠지. 그러므로 진정한 선생은 제자에게 실망이란 없다. 희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미장센이 좋은 영화다. 발리우드 영화라 허리우드 문법에 철저하면서도 어떤 면에선 허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강점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그러면서도 허리우드에 너무 경도된 것은 아닌가? 난 인도 영화를 볼 때마다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진정한 인도 영화가 있지 않을까?)
두 주인공의 연기도 볼만 하지만 어린 미셸을 연기했던 아예샤 카푸르란 아역 배우의 연기가 실감난다. 하지만 인도에 과연 눈이 내리나 영화를 보면서 약간 갸우뚱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