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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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해설을 맡았던 장정일씨의 말대로 처음에 나도 무슨 칙릿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마도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문학계에 유행하던 현실참여 문학과 그 후일담 문학 이후 다시 부활한 참여문학은 아닌가 싶다. 그때는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글들을 문학인 저마다 쏟아 냈었다. 그 시기는 정말 암담했었고 작가들 저마다 현실참여를 하고 있으니, 나 개인적으론 그 시기는 문학의 죽음의 시기는 아니었나 싶었다. 도무지 작가들이 그쪽 아니면 글을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그때 이후 오랫만에 보는 현실참여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이 작품의 출현을 신기하게 보는 것 같다. 이게 그렇게 신기하게 볼 일인가? 격세지감이란 느낌도 든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의 현실 참여는 독재정권이지만, 지금의 현실 참여는 '쇠고기 파동' 즉 국민의 먹을 권리와 건강에 관한 것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2008년 6월 10일. 나도 그밤 시청에 있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그날은 6.10 항쟁 10주년 기념(이었나?) 해서 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는 의미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도 지금 보면 격세지감이다. 예전의 데모는 '피끊는 외침' 또는 '연합의 힘'같은 거였는데, 이젠 과거의 힘을 빌어 하나의 상징이자 문화 행사로 옮겨간 느낌이다. 솔직히 나도 그날 그곳에 가봤지만 사람의 물결이란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마도 멀리 공중에서 보면 물결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참여라기 보단 사람 구경을 더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과연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도된 것처럼 절박할까? 뭐 그런 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듣던 거 보다 그다지 절박하고 치열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대포나 최루탄을 쏜 흔적없이 비교적 질서있게 시위를 했던 것 같다. 물론 드문드문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포퍼먼스나 현장에 온만큼 구호 몇마디를 외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그밤을 그저 즐기고 지키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래 가지고서야 청와대가 꼼짝이나 하려나 싶기도 했다. 예전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수입 쇠고기 반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다.  

난 그때 참 많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대통령이 그랬단 말인가? 예전에 고노무현 대통령 미워해서 언론이 원천 봉쇄하고 조작하기도 했다던데 뭐 그런 것과 같은 건 아닐까?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 같은 일을 아무 생각없이 허락할 수 있을까? 이걸 허락했다면 배후에 무엇이 작용했길래 그랬을까? 내내 궁금했지만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을 나같이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이 어찌 알까 ? 속시원한 뭔가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나 개인적으로 이 책은 좀 실망스러웠다. 제목이 약간은 생뚱맞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표지도 마음에 안 든다.) 역시나 예감했던 것 이상의 새로움은 없었다. 적어도 작가라면 2008년 6월 10일을 새로운 시각 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일을 보여줘야 하는데, 별로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덤덤하고 심지어는 너무 뻔해 보여 지루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지오는 새로운 아이다. 지오를 통해 보는 2008년도의 우리나라에 대한 해석이 좀 새로워야 하는데 그다지 새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오늘날의 입시문제에 대해 지오가 알고 "어머, 너희들은 어떻게 그러고 살 수가 있니?"하는 식의 반응은 너무 상투적이지 않은가? 어떻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지. 한마디로 이펙트가 약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괜히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정말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통령은 언제 나올 것인가? 국민이 이렇게 대통령을 행해 분노하고 있으니 앞으로 곧 머지않아 선출되는 대통령은 좀 더 똑똑하고 좋은 리더십을 가진 좋은 대통령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작년에 봤던 영화<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장동건이 일본대사한테 주억거렸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정부를 우습게 보지 마시오. 굴욕의 역사는 가지고 있을 망정 굴욕을 정치는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굴욕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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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급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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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방면의 영화에선 턱걸이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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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이야기 3 - 세상 속으로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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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3권으로 이루어진 <지로 이야기>를 얼마 전 완독했다. 대체로 두꺼운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두꺼운 책은 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책은 나름의 묘한 매력이 있었다. 두꺼운 1권의 읽기를 마쳤을 때 꼭 끝까지 완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완독했다.  

사실 이책은 원래 저자가 다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완성을 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3권까지 읽었지만 완결 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얘기는 아직도 더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더 읽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긴, 인생에 완결이 어디 있겠는가? 

1권은 지로의 어렸을 이야기를 담고 있고, 2권은 청소년기를 거쳐, 3권에서는 청년기 우애숙이란 일종의 기숙 학원에서의 일을 그리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 주로 지로의 생각등을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난 1권이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각권마다 역시 인생의 각 시기의 독특한 면들이 잘 묘사가 되었다. 이를테면, 1권은 유년기를 다룬만큼 호기심과 장난기가 남겨있고, 2권은 사춘기의 반항심리를, 3권은 청년기의 끊는 혈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편에 흐르는 지로는 행동보단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끊임없이 탐색하는 지로의 진지함이 사랑스럽다. 

저자는 일본의 전체주의 내지는 군국주의에 반항하고 일본을 계몽 하고자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썼다.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 솔직함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한때 실수하고 좌충우돌할 수 있어도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한 번 힘 쫙 빼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면 소소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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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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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앤 폰테인
주연 : 오드리 토투, 알레산드로 니볼라

  

전기 영화가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다. 그건 대체로 맞는 이야기 같다. 그래도 내가 본  몇 편의 전기 영화들은 나름 흥미롭게 본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채플린이라든지 쟌다르크의 전기 영화등은 말이다. 하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영상에서 먹어주고 들어가는 것은 있으니 보고 후회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나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영상은 좋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쉬움 또한 어쩔 수 없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지극히 프랑스적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관객들이 허리우드 화법에 익숙해진 탓이란 말도 될 것도 같다. 허리우드적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해서 다 실망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나라 사람이 그 나라 정서에 맞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나름 좋은 것이라고 인정해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머지는 허리우드적이어야 한다면 그것도 좀 우습지 않은가? 영화는 허리우드표란 공식만 빼면 그 나름 인정해 줄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정적이란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한 시대를 풍미한 인간이 되려면 당시의 금기를 깨고, 파격적인 뭔가의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샤넬은 파격적인 의상과 소품으로 당시의 평범함을 압도했을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든 여자들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고집할 때 그녀는 과감히 바지를 선택했고, 파티에서도 모든 여자들이 밝고 화사한 핑크의 옷을 입었을 때 그녀는 검은 드레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 사람은 개인주의적이어서 일까? 그녀의 그런 파격에 소근소근 뒤에서 말이 많아도 드러내놓고 좋다 싫다를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새로움을 조심스러워 하는  프랑스 여인들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어떻게 변화를 선도해 갔는지가 생략 되었다. 그뿐인가?  그녀가 자신의 일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는지도 그다지 표현되지 않았다. 그저 사랑과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샤넬.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일에만 파묻혀 살다 죽은 여자로만 그렸다. 그것은 확실히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언듯 싶다. 물론 샤넬이 당시로선 앞서간 여성이었을테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일만을 하고 살았다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수동적 여성상을 보여준 것은 아닌가 싶다. 

당시로선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일을 선택한 것은 진보적 선택이었겠지만 오늘 날은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다. 분명 뭐 하나에 독보적이고 입지전적인 인간이 되려면 결혼이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과 일, 둘 다에서 성공을 거두는 인간들이 무수히 많이 생겨났다. 그만큼 살기가 좋아졌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런 발전된 세상에서 과거에 살던 사람을 영화에서 복원한다는 건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영화 제작진들은 존 더 고민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감독이 여성 감독인 것도 같은데 같은 여성으로서 이 정도 밖에 못 만들었다는 게 아쉽다.   


이렇게 쓰고 보니 있는 그대로의 영화라기 보단 비판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샤넬의 연인 카펠이 마음에 든다. 당시 많은 여성의 결혼관이 남자 잘 만나 결혼하는 것이고, 남자들 역시 여자들이 일을 취미로 하라고 했을 때 진정으로 샤넬을 응원했다. 멋진 남자다. 이런 남자는 꼭 영화에서 무슨 사고로 일찍 죽는다. 클리셰이긴 하지만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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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2-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좀 더 스케일 크게 숲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나무만 보여준 느낌이랄까. 좀 안타까웠습니다.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stella.K 2010-02-15 15:44   좋아요 0 | URL
오, 세실님! 그렇죠? 아쉬웠어요.
그나저나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거죠?^^

세실 2010-02-15 15:45   좋아요 0 | URL
넵..
이번 설엔 옆지기랑 저 둘이서 음식을 준비했답니다.
힘들어 죽는줄 ㅋㅋ
그래서 오늘은 하루종일 뒹글거리고 있답니다.

stella.K 2010-02-15 15:49   좋아요 0 | URL
와우, 남편분이랑 같이 음식도 만드셨군요.
힘드셨겠지만 나름 좋은 시간이셨겠어요.^^

프레이야 2010-02-1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설연휴는 잘 쉬셨어요?
저도 이 영화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좀 의존적으로 그렸지않나 해서 아쉬워했었죠.

stella.K 2010-02-16 10:56   좋아요 0 | URL
알아요. 이 영화 가지고 많은 사람이 리뷰를 썼더군요.
그중 프레이야님이 추천을 가장 많이 받으셨잖아요.
저는 추천 그다지 기대 안했는데 의외로 받았네요. 히히.
사실 열심히 쓰기는 '블랙'을 열심히 썼는데 그건 좀...
확실히 내가 열심히 쓰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좀 다른가 봐요. 흐흑~
전 설연휴 그동안 못 본 영화와 함께 잘 보냈어요.
프레이야님도 잘 보내셨죠?^^
 
블랙 - Blac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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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산자이 릴라 반살리
주연 : 아미타브 바흐찬, 라니 무커지

누구든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적이 한번씩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나면 그 사람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양, 다음에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은연 중 갖게 되어 사람에게 마음 문을 못 열게 된다. 열더라도 반쯤은 문을 닫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희망은 있을까? 무한한 신뢰와 교감은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소녀가 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래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중 삼중고의 아이다. 그 아이는 또한 야생마이기도 하다.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미셸이 이 아이의 이름이다. 그 아이가 왜 그토록 뻗대기만 하는지 나는 영화 초반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 이해할 것도 같다. 아이는 한마디로 자신의 감각을 이용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처음부터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을 못 보면 청각이라도 뛰어나야 할 텐데, 귀로도 들을 수 없으니 무엇하나 사물을 느끼고 만진다는 게 불가능하다 못해 두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한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미셸이 만난 선생님의 이름은 사하이. 남자고 괴짜다. 이 낮선 선생님을 진정한 스승으로 맞아 들일 때까지 미셸이나 미셸의 부모는 그를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미셸을 그렇게 다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집 세고. 제 3자가 봐도 너무 강압적이지 않은가? 미셸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부모가 그를 신뢰할 수 없다. 그쯤에서 사하이로서도 백기들고 나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하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고 그 집을 나온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끝까지 미셸을 책임진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도 그를 집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셸의 아버지는 당장 나가줄 것을 권고한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이니 해고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하이는 선생은 고용되고 말고의 존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선생은 선생일뿐이라고.(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런 그의 우직함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사하이는 결국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나올 찰라 미셸의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그래 좋아. 이왕 그만 두는데 저것 하나는 내가 고쳐주고 떠나겠어" 하며 미셸에게 달려든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해고한 미셸의 아버지가 20일간 출장은 간다는 것이다. 오, 예! 이런 황금 같은 기간을 그냥 놓칠 수 없는 그는 엄마를 설득해 20일 동안에 미셸이 변화가 없으면 그땐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한다. 그 20일 동안의 사하이의 고군분투는 정말 눈물겹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소득없이 미셸의 집을 떠나야 했다. 그것도 미셸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지만 마지막 1분1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 결국 미셸의 아버지와 마주친다. 얼마나 재수없는 순간인가? 


하지만 미셸의 깨달음의 순간은 또한 이때 일어난다. 미셸은 바로 이때야 비로소 사물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고 소통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건 시쳇말로 '도를 트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느끼는 또 한 번 세상을 넓은 시야로 보게 되고, 가슴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건 미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도 어느 한 분야에서 고군분투 하다가 "유레카!"하며 탄성을 지르는 순간이 있지 아니한가? 이런 순간은 솔직히 인생에 있어서 몇 번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런 순간을 맞지 못하고 죽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이 있다는 것. 나는 과연 지금까지 몇 번의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미셸과 그 부모는 얼마나 기뻤을까? 이것은 사하이 조차도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셸은 이제 더 이상 야생마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의 순간이 있고나니 미셸은 나날이 숙녀다워졌고, 꿈을 꿀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의 꿈은 대학을 진학하는 것. 다행히도 미셸은 무사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만한 그 지점에서 미셸은 갈등과 좌절도 겪게 된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낙제. 동생의 결혼을 보면서 자신이 과연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온전한 여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정체성의 혼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사하이 선생님이 어느 날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났다. 그렇게도 가르치는 것에 철저하셨고 자상하셨던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이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일어나기 위해 서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위협이 된다. 무엇보다 공부는 아무리 해도 낙제를 면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싶을 때 그녀를 강하게 잡았던 것은 사하이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진 선생님 때문에 그녀는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고 결국 와신상담 끝에 학점을 이수하고 당당하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간지 20년만의 일이고 선생님과 이별하게 된지 12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졸업식 날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됐고 수소문 끝에 사하이 선생님을 찾았을 때 자신의 학사복 입은 모습으로 선생님을 뵐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선생님의 병은 깊어질 때로 깊어져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셸은 그 옛날 자신을 가르쳤던 그 방식 그대로 선생님을 가르쳤고, 그 순간 만큼은 기억을 되찾은 사하이는 기쁠 때면 미셸과 함께 추었던 어색한 춤을 춘다.   

아, 이 마지막 부분은 정말 감동이었다. 나는 어느 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하이를 불쌍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위대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대로 병에 걸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미셸을 지켜봐 주며 늙는 것도 박수를 받을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는 아우라일 것이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병.  

제자가 잘되는 것은 선생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 이탈리아의 거성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말했던 것처럼, 그런 선생님은 존경은 받을 수 있지 모르지만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라시안은 존경을 받으면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하이라면 다르다. 그는 존경도 받지만 사랑도 받는다. 뭐 때문에? 자신이 한때 미셸을 가르쳤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본래 누가 조금만 잘되도 배가 아픈 존재지만 그것이 또 자신 때문이라면 얼마나 뻐기기 좋아하는 존재던가? 또한, 감추고 숨어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이렇게 잘 되었노라고 말하기 좋아하기도 한다. 거기엔 어떠한 심리가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레이건 대통령을 나름 좋아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미합중국의 사랑 받는대통령이었지만 그의 말년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젊었을 때 뭐했다고 자신의 업적 기리기 하는 거 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초두에 상처 받은 인간에 대해서 말했다. 그건 무엇보다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찔리기도 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난 한때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아볼 때 '난 정말 선생도 아니었구나.' 할 때가 있다. 특히 내가 교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폐기가 있는 한 아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땐 내가 상담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떨결에 맡게 됐는데 난 그 아이의 이상 야릇한 행동에 아,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동안 녀석의 이상한 복수에 시달리곤 했다. 지금도 녀석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사람들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내가 사하이 같은 선생님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난 그때 왜 그렇게 선생으로써 책임감이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또 한 번 자책했다.  

상처 받을 것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핑계다. 100% 다 줘 보지도 못했으면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뭐든지 나를 아낌없이 던질 수만 있다면 상처란 없다. 상처 받고, 안 받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인데 거기에 어떻게 상처가 있을 수 있을까? 특히 선생이 제자에게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이미 선생이 아니다. 그런데 허울만 좋은 선생이라면 제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선생님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열려고 했는데 결국 더 마음의 빗장을 잠그게 됐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사하이는 20일이라는 주어진 기간에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과가 없다면 그건 그의 책임은 아니겠지. 그러므로 진정한 선생은 제자에게 실망이란 없다. 희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미장센이 좋은 영화다. 발리우드 영화라 허리우드 문법에 철저하면서도 어떤 면에선 허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강점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그러면서도 허리우드에 너무 경도된 것은 아닌가? 난 인도 영화를 볼 때마다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진정한 인도 영화가 있지 않을까?) 

 두 주인공의 연기도 볼만 하지만 어린 미셸을 연기했던 아예샤 카푸르란 아역 배우의 연기가 실감난다. 하지만 인도에 과연 눈이 내리나 영화를 보면서 약간 갸우뚱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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