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 - Drea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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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가학적이다. 하지만 비주얼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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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3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나라 영화예요?

stella.K 2010-05-23 09:30   좋아요 0 | URL
네. 저 남자는 일본에서 쫌 유명한 배운데 출연만 했나 봅니다.
김기덕 감독이 만들었는데 이 사람이 또 좀 그래요.
가학적인데가 있죠. 영상은 좋은데 말입니다.ㅜ
 
스카우트 - Scou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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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감독 : 김현석
주연 : 임창정, 엄지원
 

리뷰의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 하다.  5.18을 소재로한 영화를 어떻게 유쾌하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영화가 있기나 한 걸까? 오래 전,  영화<꽃잎>을 보고 한동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던지. 그런데 이것을 나름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라는 게 나로선 신기하기도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재밌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영화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엄숙하기까지 하다. 모르긴 해도 세계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끊임없이 재생산한 영화가 있다면 나치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아닐까? 그런 영화들 보면 너무 사실주의에 입각한 나머지 엄숙해서 보고 있기가 곤욕스런 영화들이 많다. 그 상상력이 풍부한 스티븐 스필버그도 <쉰들러 리스트>는 또 얼마나 심각하게 만들었던가? 이것이 주는 나름의 이름값은 있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도 이 영화 만드느라 좀 허걱대지 않았을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영화에 엄숙주의를 거두고 페이소스 짙은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나 독일 영화 <나의 아름다운 비밀>같은 영화들이다. 그것들은 무겁지 않으면서 할 말은 다한다. 다시말하면 작품성을 실추시키지 않으며 제값한다는 소리다. 물론 일련의 영화들이 역사를 전면에서 다루지 않고 배경으로만 하고 있으며, 공동체성 보단 개인에 좀 더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꼭 이런 영화에서까지 역사를 전면에서 다루고 공동체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이렇게 다루나 저렇게 다루나 허구는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조금은 밝은 상상력을 가미했다고 해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변질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5.18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진 않다. 그저 간단히 말하면 80년 5월 18일을 매개로 야구 선수 선동렬의 스카웃과 사랑을 맞바꾼 어느 야구 스카웃터에 관한 이야기다. 야구 선수를(선동렬을) 스카웃 하는 것과 사랑을 맞바꾼 것 사이에 5.18일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화는 선수 스카우터 호창(임창전 분)이 선동렬을 만나기 위해 광주에 내려오고 그를 입단 시키기 위한 노력은 집요하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것과 맞물려 그곳엔 7년 전 헤어진 시민 운동을 하는 옛 애인 세영이 있다. 선동렬을 만나기까지 그녀와의 마주침은 피할 수 없게 되고, 과거 영문도 모르고 이별을 일방적으로 통고 받은 호창은 그래서 더 자존심 상하고 아프며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씩 건드려지면서 그 의문이 풀어지면서 정점의 날이 바로 5.18이다. 하지만 또 천신만고 끝에 선동렬과의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날과 같은 날 같은 시각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결국 그것은 호창으로 하여금 어떤 결단을 요구하게 만들고 결국 애인을 만나기 위해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 게 된다.   

물론 정말로 그날 호창이 소속된 구단에 선동렬이 입단 체결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야기를 위해 짜맞추어진 허구일 같다. 그런데 호창의 애인 사이에 5.18을 절묘하게 끼워 넣었다는 점이 상당히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임창정의 출중한 연기력에 힘입어 다분히 페이소스적이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웃긴데 더 서글픈 것. 물론 그래서 페이소스라 하는 것이지만.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보면 아들에게 인생을 살만한 것이며 꿈을 결코 잃게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물겹게 유쾌하고 발랄하려고 애를 쓰는가? 죽으러 가는 그 마지막 길에서도 아들 앞에서는 어린 아이의 구령을 흉내내며 당당히 걸어가지 않던가? 호창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세영을 구해내고 공중전화 박스에 선동렬을 만나러 금방 가겠다고 해 놓고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그는 전경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렇다고 세영과의 재결합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라던 선동렬과의 계약이 성공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호창이 보여준 것이 뭐란 말인가?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간과 찰라를 위해 살 뿐 그 결과는 누구도 보장 못하는 것. 호창이 그렇게도 바라던 선동렬과의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마치 계약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호창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영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을 때 다시 사랑이 불 붙을 거라고 누가 의심하랴?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러나 그것이 또 의미가 없다고 허무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국가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5.18 때 호창과 세영에게 이런 일이 있었지만 또 어디에서 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린 일일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파헤치고 알릴 때(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역사는 힘있어진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5.18을 전면에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화 항쟁 운동의 첫날을 다루고 그 끝은 그것이 끝나고 한참의 세월이 끝난 후를 보여주며 마무리 한다. 그날부터 얼마나 많은 굴곡진 역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응축해서 남아내기엔 이 영화는 벅찼나 보다. 하지만 역사의 엄숙주의를 배제하고 페이소스로 버무려낸 감독의 연출력은 높이 살만하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계에 이런 영화를 또 기대해도 될까? 마침 돌아오는 화요일이 5.18 민주항쟁의 날이다. 기념해서 한번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보너스> 영화에서 보면 조폭과 그 두목이 나온다. 그는 세영을 좋아함과 동시에 의리파로 나온다. 조폭을 의리파로 미화시키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나중에 이들은 전경과 전투 대치하게 되는데 그 장면이 나름 잘 짜여져 있다. 그 장면이 나름 쾌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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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멋진 리뷰에...영화를 보기전부터 눈물이 찔끔 나오려했어요.
엄숙한 영화가 아니라는데도 저는 왜 코끝이 찡한거냐구요?

stella.K 2010-05-16 15:04   좋아요 0 | URL
ㅎㅎ 마기님은 명랑 쾌활하신 분이신가 봐요.^^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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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은교>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 이게 뭐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한다는 작가들이 그렇듯 일단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니 이 작품도 곧 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꼭 봐야한다면 책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재물을 꼼꼼히 챙겨 볼만큼 부지런 하지도 않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도 그다지 편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종이로 만든 책은 언제나 건재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의 제목 '살인 당나귀'가 아닌 <은교>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예전의 제목 보다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솔직히 박범신 작가는(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적잖이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지만 여간해서 선생의 작품은 나의 손에 들려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었다. 왜 그랬을까? 건방지게도 사춘기 그 어린 마음에 선생은 그냥 사랑 이야기나 쓰는 통속 작가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나도 한때는 글 써서 돈 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지망생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편견없이 진지하게 남의 작품을 대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래서 지금까지 그 죄를 속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을 모처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은교>를 읽고 있었던 중이라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이것을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야, 늬들 <은교> 꼭 읽어라. 그거 읽으면 우리 싸부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같이 동문 중의 하나가 "거 내용이 뭡니까?" 한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끼듯 "그런 사람 파고다 공원가면 많습니다." 그러면서 냉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무식한 넘. 탑골 공원이지 파고다 공원이 뭐냐? 그래. 넌 그러고 살다가 죽어라. 니가 <은교>를 알아?' 좀 아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세상을 달관한 건지 아니면 열등감과 우월감을 교차시키는 건지 매사 아는 척,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주의라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문학에 대해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작가가 되겠다니 혀가 절로 차졌다.(참고로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단다.)  

그런데 돌아켜 보면 그나 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은교>를 몰랐을 때 그 보다 나은 태도를 보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솔직히 이 작품의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도 탑골 공원의 어느 변태 노인에 관한 연상을 쉬 지워버리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 보단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자세가 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 그 야성과 이성에 관하여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이적요 시인의 또 다른 분신이 결국 서지우 작가라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에게도 서지우 같은 동물적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지우를 향한 불타는 증오는 기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커져갔고 결국 파멸로 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보이는 태도나 행동은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측면(페미니즘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까지 포용하고 있는 반면, 서지우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동물적이며 권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 하나에 다 들어있을진대 그것을 인정하고 융합하고 화해시키기 보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대립하고 융화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요는 왜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을 죽여 가면서까지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가 인용했던 대로,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파스칼) 분별없는 광기(셰익스피어)일 뿐인가?

이적요 VS 서지우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사랑의 방식이 서지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적대자로서 이적요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 옳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지우는 이적요를 힘도 없으면서 음욕으로만 가득찬 노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당위를 위해 은교에게 설득하려 하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은교의 눈엔 오히려 이적요가 더 옳고 건강하며 그에 비해 서지우가 오히려 변태적이며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 대한 평가는 같은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지우는 은교의 평가를 무효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다 덫에 걸리고 만다. 또한 서지우가 결정적인 잘못은 인간의 정욕과 사랑을 한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노화되면 정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엔 서지우는 아직도 미숙했다.  노인에게 정욕이 없을 거라는 건 이 이야기의 방식으로 보자면 덮어 씌우기의 원죄일 뿐이다. 서지우도 그렇게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적요처럼 노인이 될 것인데 그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황금률 중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도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적요 노인은 피그말리온의 원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과 실제 사랑을 나누다가 죽어버리고만 피그말리온. 그것이 오늘 날 교육 이론이나 정신분석학 이론에 적용이 되곤 하지만 그 보단 이 사랑의 공식을 정의할 때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은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그늘진 평범한 아이로 보인다. 다만 그녀가 가진 특수한 무엇이 이적요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사랑한 건 은교 자신이라기 보단 은교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보자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데(이런 정의는 또 얼마나 삭막한가?) 그것의 유무는 대상 그 자체에 있기 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콩깍지에 있고 보면 말이다. 또한 콩깍지 하나의 무게는 과학적으로 얼마나 나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대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있다. 정말 너무 사랑하면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즉 말하자면 이적요가 은교를 갖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랬을 때 은교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줬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고 끌어 당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서지우에 의해 짓밟혔다. 내가 가진 꽃이 꺾여지고 짓밟혔다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이적요도 남자일진데 말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어제까지 아군이 오늘은 적군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알 속에서 잘 살았겠지? 결국 인간의 평화는 어떤 상황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소멸 또는 불멸            

가끔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 보통은 사랑 때문에 살 생각을 하지 죽을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다 살아있는 증거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드물게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말이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일려고 작심했을 때 그는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은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행했고 서지우는 죽었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건 꼭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증오가 서지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죽어갔다.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서지우의 죽음은 이적요의 육체성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의 사랑과 원죄는 불멸로 남은 것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생기를 주지만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으면 사랑이 옆에 있어도 그것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적요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만한 사랑을 했다면 글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끝내 울어버린 소설 '은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다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내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만을 내심 열심히 쫓다 결국 한방  맞았다. 서지우는 자기 눈에 서린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사고로 죽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이적요가 은교를 그리워 하는 그 장면에서 시야가 흐려져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나의 독서란 무지한 지성을 깨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읽어왔을 뿐인데 그래서 책이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쉬 동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생의 자작시로 보이는 '빈들'이란 시를 대했을 때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중에서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갑자기 오늘 날 왜 변태 노인이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 걸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몸은 늙어가는데 그에 따라 정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사랑의 능력을 섹스의 능력과 동일시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력은 조금도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하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재대로된 사랑은 없거나 사랑은 다 변태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인지 그것을 말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플라토닉. 사랑은 성교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적요는 말해주는 듯도 하다. 문제는 사랑을 허리 아랫쪽으로만 몰고 갔던 이 사회가 더 변태적인 것이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은교       

책의 말미를 향할수록 내가 만약 Q 변호사였다면 과연 은교에게 이적요의 노트를 읽어 보라고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첫번 째 드는 생각은 나는 은교가 그 노트를 읽지 않게되길 바랬다. 왜냐하면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다른 사랑을 못하고 평생 갇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우리 시대 사랑이란 다 고만고만한 물물교환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발화시킨 사랑이 어디 흔하냐 말이다. 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해 줬다면 어찌 다른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은교는 그 한 사랑만 보기엔 너무 젊다. 필시 그 노트는 은교에겐 판도라의 상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우리의 세대가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세대라고 보는가? 하지만 은교만큼은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지 않겠는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은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그녀 몫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적요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학대했다기 보단 육체에 갇히는 것이 싫어 그 나름의 발화 의식으로 자신을 혹사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을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적요와 박범신       

소설은 어느 만큼의 진실과 허구를 잘 융합시킨 문화상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말 17세의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첫 작품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부분 이적요에게서 선생의 데자뷰를 느꼈다. 특히 이적요를 빌어 우리나라 문단을 비판한 것과 그리고 이적요를 시인으로 등장시킬 만큼 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적요의 대쪽 같은 캐릭터도 어느만큼은 선생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만큼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사족으로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나마 썼던 나의 글들이 허접하다 못해 쓰레기 같이 느껴져 한숨만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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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교를 알게 해 주셔서.

stella.K 2010-05-14 16:56   좋아요 0 | URL
부디 블랑카님께도 감동있으시길...!^^
 

그 손등 위의 맥박은, 울근불근, 아주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뛰고 있었다. 네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지. 아니,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그늘의 떨림,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 비상하는 네 허리의 고혹을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소설 『은교』에서


폭풍같이 썼지요, ‘은교’요.
쓰면서, 生에 대한 나의 갈망을 통절히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봄꽃들은 속절없이 피고 지는데, 그 복잡한 시간 속에서 목 놓아 울어도 좋을 것, 사랑 이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요. 생성이고 죽음이며 상승이자 추락인, 꿈이면서 동시에 피 어린 실존인, 아, 사랑!


사랑에서 우리는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


괴테의 시구예요. 봄이 다 가기 전에 비록 멸망일지라도, 당신의 운명을 만나기 바라요. 보세요, 숲은 하루가 다르게 제 몸을 바꾸면서 장엄한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는걸요.

2010년 4월 끝자락에서,
박범신 
 

출처: http://cafe.naver.com/mhdn/14294  

벌써 여섯번째 레터란다. 난 왜 몰랐지?  

아무튼 문동 카페 회원들을 위해 이메일로 보내줬는데 저거 받고 왠지 뭉클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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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2010년 알베르 까뮈의 사후 50주기를 맞아 관련 서적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 이 현상은 현재까지도 압도적인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 ‘이방인’의 저자, 알베르 카뮈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소설 [카뮈의 마지막 날들]의 저자인 조제 렌지니가 이 철학적인 작가  가 지닌 현대성과 1950년대의 아이콘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광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 알베르 카뮈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카뮈에게 있어서 침묵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거의 귀머거리인 어머니의 침묵, 그리고 글을 읽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를 방어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침묵에 대하여 카뮈는 그 스스로가 대변인이 되고자 했었다.

1960년 1월3일, 갈리마르출판사의 사장인 미쉘 갈리마르와 루르마랭에서 파리로 가기위해 길을 나선 그는 집필중인 ‘최초의 인간’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시기는 3년 전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가혹한 비방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였다. 이 고립된 자동차 여행이야말로 그에 대한 깊은 성찰에 이르는 적합한 공간이었다.



                               

자동차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카뮈는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처럼 부조리한 것은 없다’라고 항상 이야기했던 그의 이런 죽음이야말로 기이하다. 삶을 그토록 사랑했던 47살의 이 남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  

 

동시대의 저명한 지성인이었던 사르트르와 비교한다면..?  

 

사르트르는 철학자이자 아주 훌륭한 교수이지만 그의 글은 구시대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까뮈에게 있어서 작품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했다. 그의 소설들은 아름다운 언어인 동시에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6백만 부 이상이 팔린 [이방인]을 예로 들자면, 마치 범죄소설처럼 구성되어있다. ‘퀴어’라는 밴드의 히트곡 “킬링 아랍”이라는 곡에 영감을 부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르트르의 텍스트를 가지고 록 음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오늘 날에도 여전히 카뮈에게 열광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유인이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오로지 명확함만을 추구했다면 카뮈의 세계는 회의와 의문들로 가득 차있다. 그는 때때로 오류를 범하곤 했지만 결코 남을 속이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카뮈는 흐루시초프 보고서가 나오기 5년이나 앞서 트로츠키적인 관점을 취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감행했다. <나는 언제나 좌파이다, 그녀 혹은 나 자신과는 상관없이>. 같은 시기에 그는 미국의 팽창주의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카뮈를 현실참여적인 인물로써 평가하고 있는지..?  

 

확실히 1960년에 이르자 그는 더욱 더 고통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시기에 그는 알제리/프랑스 문제에서 찬성 혹은 반대라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거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국주의 정책에서 분명한 입장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카뮈는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거부의 행위를 놓고 그를  현실참여적 인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으로 Combat紙의 주필이라는 언론인으로써 그는 유일하게 1945년 종전과 함께 ‘세티프’에서 벌어진 알제리 독립운동에 대한 프랑스 탄압 사건을 기사화했으며, 반 제국주의적 정서와 의식을 지닌 최초의 기자였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이후 핵으로 문제를 푸는 핵전략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었다. 카뮈라는 인물에게는 여러 주목할 만한 점들이 있다.



그는 긍정적인 의미의 도덕주의자라 불릴 수 있으며, 정당을 선택하지 않고도 우리를 성찰과 정치적 사유로 인도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현대적인 정신이다. 
 

           
 

이러한 현대성이 젊은 세대를 매혹하는 것인가?  


정치적 신뢰와 참여의 위기라 할 만한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는 카뮈의 절대자유주의적인 측면과 정당이나 정치적 시스템에 대한 저항정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는 단지 고립되었을 뿐이지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반 이상주의적인 생각들이 젊은 세대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그의 사유를 읽을 때면 그가 니콜라 사르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의 언어는 형식적인 수사가 아니라 생생하고 풍요롭다. 이런 것이 그가 시간을 초월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 자신이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최소한의 질문만 허용되는 기성의 관념체계에 속한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는 분명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들은 모든 것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인생 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카뮈를 '팡테옹'으로 옮기자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원성, 그것은 미래 없는 관념이다>>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영원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정부가 유럽연합의 문화 수도 ‘마르세이유’의 해를 맞아 2013년 이전에는 카뮈를 '팡테옹'으로 옮길 것이라고 본다. 어떻든 이것은 알베르 카뮈가, 유럽연합의 문화 수도 ‘마르세이유’를 향한 항해의 상징이자, 알제리와 프랑스 사이의 화해의 가교가 될 것을 의미하고 있다.

뮤진트리 서재에서 http://blog.aladin.co.kr/735269187/371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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