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링
유하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하의 작품을 대체로 좋아한다.

그가 다루는 주제의식이 꼭 나와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보여져서 영화의 선택을 망설이지 않게 한다.

영화 '하울링'을 비교적 늦게 챙겨 봤다(그래봐야 1년 늦은 것이다. 게으른 나로선 뭐 그 정도면 아주 늦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목이 왜 하울링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영화에서 뭔가를 놓치고 본 것이 있었을까? 분명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도 있었을 텐데 다 보도록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영화에 나오는 살인개의 이름일까 생각했지만, 그 개의 이름은 '질풍이'다. 

나름 용맹스럽고 잘 생긴 늑대개에게 '질풍'이란 이름이 어울리기는 하다. 하지만 난 역시 동물애호가로서, 동물 고생시키는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단 시간 내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좋은 조건의 영화가 몇 있을 텐데, 그 중 하나가 동물을 등장시켜 인간과 교감시키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영화는 대체로 실패하지 않고, 적어도 본전은 뽑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고나면 꼭 이렇게 해야하는 건가? 뭔가 속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대체로,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해피엔딩은 거의 없다. 인간과 더 없는 사랑과 우정을 나누다가 장렬하게 죽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마음의 짠함을 증폭시킨다. 이 영화도 그런 공식의 영화가 아니길 내심 바랬는데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다.

하긴, 그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아 아무나 죽이지 않고 꼭 죽여야 할 사람만(이 죽여야 할 사람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기준이지, 절대 선과 악의 기준은 아니다) 죽인다고 해도, 살인견은 살인견이다. 사람을 죽인 개를 인간이 그냥 보고 넘길 리 없다. 누군가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송강호에 의해 죽지이지 않는가. 

 

충무로에서 중년의 배우치고 가장 '핫'한 배우하면 역시 김윤석과 함께 송강호일 것이다. 나 역시 그가 나오는 영화는 언제나 유쾌하게 볼 수 있어서 좋다(비록 그 영화가 꼭 유쾌한 것은 아니어도 배우 자체는 유쾌하지 않은가?). 감독이 송강호를 점찍었다는 건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닐까 싶다. 거기에 함께 나오는 이나영.

 

 

 

 

 

초짜 형사로 나오는 그녀로서는 나름 작지 않은 도전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나영은 청순의 아이콘 아니던가. 거기에 형사라고 하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 들었다.  하긴, 내가 봐도 형사의 세계에 여자들이 뛰어 든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누구인가? 뭐든 남녀를 구별하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족속들 아닌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형사계에 정말 여자가 없는 걸까? 왜 형사라는 직업에 남자들은 여자와 함께 일하는 걸 꺼림하게 여기는 걸까?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한참 오래 전에,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의 은사님은 남자들이 산을 오를 때 여자들과 함께 오르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함께 오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다고. 다행히도 내가 그 말을 들은 건 20세기가 막 지고있을 무렵이었으니 들어 둘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어디선가 공공연히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다면 그저 속설 정도로 알아는 두겠지. 요즘엔 여자가 중장비도 모는 마당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몇 년 전, 시나리오를 공부한답시고 한동안 스터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첫 모임에 나가는데 여자는 나 혼자고 남자들만 댓 명이 모여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들을 처음 대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때 따라 남자의 거칠면서도 시커먼 기운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껴 그 기에 한동안 좀 눌렸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이나영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그때 생각이 확 났다.

 

확실히 남자의 기와 여자의 기가 다른 거겠지. 그래서 음양오행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섞여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을 쫓느라 늘 긴장해야 할 거친 형사들의 세상에서 이나영 같이 여리여리한 신참 형사가 들어오면 심란스럽기도 하고, 산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남자들의 세계를 감히 여자가 넘 보나 하다가도, 바짝 날이 선 남자의 기를 이 신참 형사가 흐려놓을 것만 같아 묘한 긴장을 해야한다는 것도 묘하게 신경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형사의 세계가 거칠고, 남자들을 대표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잘한다고 누가 말하던가? 어느 분야에서든 남자의 우직함, 동물 같은 직감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성의 섬세함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이것은 형사의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은연 중 이나영을 내세워 이것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영화가 종반을 향해 갈수록 증명이라도 하듯 이나영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난 여기서, 감독 유하가 여성을 보는 관점이 나름 긍정적이고, 존중하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느낌을 살짝 갖게 만들었다. 진짜 그런지는 내가 그 사람을 못 만났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교감'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당히 의미있게 와 닿았다. 영화에선 개를 훈련시킬 때 훈련자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나오던데, 감독은 그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통해 진정한 영혼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함을 말하려 했던 건 아닐까? 초짜인데다 여자였기 때문에 무시 당해야 했던 이나영을 통해 그 때마다그녀가 느껴야 했던 모멸감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래서도 감독이 일부러 여리여리한 이나영이를 캐스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멸감과 분노를 더 느껴보라고. 하지만 그러기만 했다면 영화는 영화가 아닐 것이다. 끝까지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한 나름의 강인함을 보여줘서 배우는 영화에서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다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어느 날 투견장을 기웃거리다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나는 보는 사람으로서 감독의 의도가 뭐였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처럼 그의 삐딱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그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니까.

사실 영화 곳곳에서도 생각해 볼만한 요소들을 감독이 여기저기 많이 심어놓았다. 예를들며, 속을 썩히는 송강호의 아들을 보면서, 왜 요즘 사람들이 자식을 안 낳고 개를 키우려 하는 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개는 인간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또 그 뒤에 보면, 그 개가 어떤 엄마 없는 아이에겐 위로와 행복을 주기도 한다. 개와 함께 행복해 하는 아이를 보며 흐뭇해 하는 아버지. 그렇다면 낳지도 않은 아이에게 미리 실망해서 개를 키운다는 것은 뭔가 빠져 보인다. 물론 개를 어떤 목적으로 키우던  이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모습인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복수의 칼날을 위해 동물을 또는 제3의 존재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비윤리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위해 동물을 쓰는 것도 왠지 도덕적여 보이지는 않는다(이 영화는 양날의 칼이었을까?) 하긴, 언제나 영화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을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어보인다. 단지 그 영화에 출연하는 동물들이 측은하다는 거지. 하지만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출연한 동물은 좋아라 할지. 인간처럼 말을 못하니 알리가 없는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아무래도 엔딩 부분에서 질풍이와 이나영의 오토바이 추격신은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 된 작품인데, 왜 그렇게 평점이 짠지 모르겠다. 내가 볼 땐 아주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호스피스 의사가 먼저 떠난 이들에게 받은 인생 수업
김여환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책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는가?

 

언제 였을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 온 건.

올초였던 것 같기도 하다. 작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인연이 아닌 듯도하여 넘겨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지, 기어이 내 이름으로 배달이 됐다. 그래서 인연인가 싶어 읽으려 했지만 결국 또 읽지 못했다. 다른 책에 밀려서이기도 했지만, 그땐 내가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그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증상이라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병원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혹시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별 궁리를 다하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니 읽을 수도 없었다.

사실 난 그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나의 죽음을 가족들, 특별히 엄마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고, 엄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우스운 건, 그 무렵 동생이 내 방에 있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디지털로 바꿔줬다. 나야 진작에 IP TV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 TV에 대한 욕심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물론 바꾸면 좋았겠지.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좋았다. 그런데 돈 쓰기 좋아하는 동생이 자기 TV를 바꾸면서 누나 방의 TV를 바꿔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 마치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 보고 나오는 사람처럼 내 방의 TV를 바꿔서 시원하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 생각지도 않은 디지털 TV가 생겨서 좋긴 했지만, 내가 과연 이 TV를 몇 번이나 보고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뭔가 모를 연민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책이 눈에 들어왔겠는가? 이 책은 호스피스에 관한 책으로써, 아직 건강한 사람이 임종을 맞이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뭐 대충 그런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렇게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의외로 죽지 않고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살고 있고 있었다. 독일 격언에,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 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더니 죽음이 나를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내 몸이 겪고 있었던 것은 뭘까? 살면서 다른 가족들은 끄덕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데, 나만 두어번 가족을 놀래키며 병원 신세를 졌던 경력이 있었기에 이번에야말로 그냥 안 넘어 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봄이 돼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건 그냥 갱년기 증상 같은 걸꺼예요."라고해서 얼마나 허무하던지. 그랬다. 그때 내 몸이 안 좋았던 건 갱년기 증상의 해프닝 같은 거였다. 

그렇게 나는 차츰 나아갈 무렵, 오빠가 생각지도 않게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약도 없을 거라던 나의 증상은, 암 선고를 받은 후 오빠의 약을 사러 동네 약국을 뒤지다시피해서 겨우 구입한 그 약국에서(그 약은 일반 약국에선 잘 안 팔고 대학병원 근처의 약국에서나 파는 것이었다) 그냥 기대하지 않고 증상을 말하다 마침 맞는 약이 있는 것을 알고 사 먹고 나았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동안 나는 왜 내 죽음의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우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고, 가슴을 쓸어내릴 사이도 없었다. 당장 그리도 건강했던 오빠가 죽게 생겼는데 그깟 몸이 좋아졌다고 좋아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오빠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맞바꾼 것처럼도 느껴졌다. 하긴, 그런 생각은 누구든지 한다. 특히 나의 엄마는 오빠의 암 선고를 받은 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입버릇처럼,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 건데 왜 먼저 갔느냐"며 깊은 한숨을 쉬곤하니까. 물론 이건 엄마에겐 하나도 나을 것이 없지만, 나는 오빠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내가 대신 아팠으면 했다.

그렇게도 건강한 오빠가 이렇게 빨리 허물어져 갈거라곤 생각도 못햇다. 올해 막 새해가 밝았을 때 제손으로 달력을 바꿔 달면서 올해가 자기 생의 마지막 해가 될 거라고 오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 사는 게 참 만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재미없는 불행한 만화 말이다. 그러던 중에도 난 이 책을 어떻게든 읽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내 이 책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가 죽어 간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도 기적적으로 낫지 않을까란 기대가 없지 않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차마 죽음을 놓고 기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만도 아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린 그저 살리는 의무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책을 읽을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읽으면 슬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책의 앞부분을 보면,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과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면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두려워하며 죽는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 처음엔 분노하고,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중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된 죽음을 맞이 한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것을 읽고 맞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오빠가 암 선고를 받기 전에 읽었기 때문에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오빠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충격인데 본인은 얼마나 충격이 될까? 그렇지 않아도 별거 아니려니, 아니 별거 아니길 바라면서 여러 검사를 거치는 동안 오빠의 얼굴엔 근심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런 얼굴에 대고, 전이된 췌장암 말기며, 짧으면 6개월이고, 길면 1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빠가 평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상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애틋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오빠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오빠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은 아닐까?     

그때 오빠에게 암 선고를 했던 의사는, 가족이 환자에게 직접 말하기가 어려울테니 자기가 얘기하겠노라고 해서 다소 안심했고,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그 의사와 환자간에 병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 의사는 환자인 오빠에게 대충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가 암에 걸리면 의사는 가족들을 따로 불러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준다. 이때 의사들은 가족들에게 어줍찮은 기대를 갖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좋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해 냉정하게 얘기하는 거지만, 듣고 있으면 사람 고치는 의사라면서 어쩌면 저렇게 인정머리 없이 얘기를 할까 야속하기도 하고 저승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족은 뭔가 희망의 끈을 잡고 싶어 의사에게 유도질문을 한다. 그러면 의사도 사람이니 한 마디 정도는 진심은 아니지만 완곡하면서도 위로삼아 희망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1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기적을 얘기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가족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희망 또한 상대적으로 크고,  깊게 갖는 것이다. 가족도 이럴진대 환자는 어떻겠는가?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걸 안 건, 오빠가 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작은 엄마가 문병을 오셨을 때 알았다. 대화하다 오빠는, 자신은 암이 아니며 암의 전단계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린 정말 가슴이 무너졌고, 그 의사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우리에겐 대신 말해 주겠다고 말해 놓고, 오빠는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인가가? 물론 그 의사는 오빠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거라고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실을 다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그때가 되면 더 화나지 않을까? 너무 늦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오빠는 기운이 없어 화를 낼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를 노렸던 걸까? 이 부분에서 신뢰할 수 없다면 환자는 죽는 것도 억울한데 우롱 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물론 그 의사도 완곡한 표현을 쓴다는 게 그런 결과를 낳은 거겠지만, 확실히 그 점은 환자나 보호자나 정말 유감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말했던대로 이젠 대학 의학 교육에도 의사가 환자에게 이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 들이는 5단계를 말했다. 즉 부정의 단계에서 분노의 단계로, 타협에서 우울로 그리고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은 어떠할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임산부가 죽을 것 같은 고통속에 아이를 낳고도 또 다시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이 죽음을 목도한 사람도 그러지 싶다. 22년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은 나는 그 당시는 세상이 꺼질 듯한 슬픔 속에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고나니 그도 덤덤해 졌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는 계신 듯, 안 계신 듯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리다 최근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새삼 나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번은 죽음을 목도했고, 사별의 슬픔을 겪어 봤으니 이번엔 덜 슬프고,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마치 처음 사별을 당하는 것처럼. 그러니 노인들은 어떠할까? 그만큼 사람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기도 했겠지만, 사별을 경험하고 살았을 것이다. 사별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참 못 견딜 일이다 싶다. 그래도 생은 늘 삶의 편이었기에 그런 회로와 구조를 가졌기에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망각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려 명을 재촉할 것이다. 

 

부정의 단계를 경험하는 건 죽어가는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다. 의사는 이미 오빠가 곧 죽을 것을 예견했지만, 우리는 부정했다. 그것은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한 것도 같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삶도 성숙해야하듯,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은 환자가 건강했을 때 신앙과 먼 삶을 살았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음을 갖게하기 위한 거라면 더 더욱 그럴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삶이 성숙하고, 신앙도 성숙하다면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불로장생만이 인간의 복인 양 사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게 된다. 환자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줘야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는 언젠가 병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물어었다. "내가 살겠냐?"고. 건강했던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밀려왔을 것이다. 그런 오빠에게 내가 뭐라 말해 줄 수 있었을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 병을 대하는 환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때는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이기 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였을 때는 "오빠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죽어도 천국이야.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라고 말해 주었다. 오빠는 그 순간만큼은 눈을 밝게 빛냈던 것 같다. 나는 그 눈빛이 말하는 걸 안다. 그건 오빠가 신앙의 힘으로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죽어도 천국에 있을 거란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땐 이미 오빠가 통증으로 육체의 힘을 다 쓰고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협 또한 죽어가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도 똑같은 단계를 거친다. 특히 자신이 믿는 신께. 차라리 날 데려가시라고, 또는 주께서 명하시는 일 무엇이든 하겠으니 그를 낫게 해 달라고. 타협도 하고, 간청도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속에 고난이 언제 끝이날까를 교차 반복하면서 환자와 함께 간다.

사실 엄마는 오빠의 임종을 보지 않았다. 오빠가 숨이 끊어지기 하루내지 이틀을 앞두고 엄마는 많이 힘들어 했다. 하지만 임종 당일 날 엄마는 의외로 침착했고, 담담했다. 그전까지는 불안과 슬픔속에 있었지만, 그날의 당신의 기도는 차분했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순명의 기도를 했다. 그 기도 소리를 듣는 나의 마음은 더 없이 슬펐지만, 그날 저녁 난 내 동생이 전해 준 오빠의 임종 소식을 엄마에게 한결 편하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전했던 오빠의 임종 소식에 엄마는 울었지만, 생각 보다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엄마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단계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죽음을 수용하지만, 살아 있는 가족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단계를 너무 도식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어느만큼은 타당성이 있기에 우린 이렇게 해서라도 죽음을 객관화 시켜보는 것이다. 물론 오빠는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죽어갔지만, 난 오빠가 평소의 성격답게 의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받아 들였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저자가 책에도 다뤘지만, 몇 해 전까지만해도 행복 전도사를 자처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너무도 커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고통이 끔찍해 스스로 죽음으로 피해버리는 사람이 한 해에도 엄청난 숫자를 헤아린다.

실제로 난 이 이야기를 듣고 혹시 오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오빠의 방에서 발견한 맥가이버 칼과 제도용 칼을 손이 안 닫는 곳으로 치워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오빠는 죽을 때 죽더라도 살기 최선을 다 했고, 종국엔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 들였다. 난 그것이 고맙다 못해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다ㅋ).

그리고 우리 역시 죽음을 꼭 불행한 것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연장시키는 삶은 또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그쯤해서 그의 생명을 거둬가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했다. 

물론 나의 오빠가 아직도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에 죽은 것은 너무도 아쉽지만, 오빠는 죽을 때 세상에 미련 같은 건 남겨놓지 않았으니 깨끗한 죽음이었다. 나는 이 점도 오빠에게 감사한다. 저자는, "해탈은 힘든 삶을 의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비롯된다고,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흔적도 없이 우리를 삼킬 때까지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말고 그저 살아야 한다(140p)"

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에게 남의 삶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얘기하는 불완전하다. 오히려 죽음의 견지에서 얘기해야 맞는 것 같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하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것이 한 둘인가? 탁아 시설도 부족하고, 노인 요양 시설도 부족하며, 미혼모 보호 시설도 부족하고, 청소년 보호 시설도 부족하다. 거기에 하다 더 생각해 봐야할 것은 호스피스 시설을 갖춘 병원이나 그것을 전담하는 병원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해서 새삼 놀랐던 건, 오빠가 입원한 병원은 우리나라 굴지의 종합대학 병원이다. 하지만 따로 호스피스 병동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초기엔 오빠가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이 짧았지만, 점점 말기로 갈수록 오빠는 퇴원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렇다고 마냥 병원에 있을수만은 없어서 요양병원을 알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병원측에서도 필요하면 연계된 요양병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동생이 발품 팔아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설이 형편없는 노인 요양 병원이거나,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쌌다.  

그러던 중 형부를 통해 책에도 소개된 '갈바리 병원'이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병원이 그냥 요양병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인간은 보다 존엄하게 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카톨릭 재단에서 만든 국내 거의 유일한 호스피스 병원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성숙하지 못한 것처럼 호스피스 역시 아직도 생소한 분야처럼 느껴져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엔 오빠에게 호스피스 병원이란 걸 숨기고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호스피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이 책은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저자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책에 보면,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임종실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인명은 제천이었던지 곧 돌아가실 것 같아도 또 쉬 돌아가시지 않더란다. 그러자 가족들이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물론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만, 그게 정말로 화를 내야할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우린 호스피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얼마 전부터 요양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언니는, 그곳에 있다보면 별의 별 일을 다 보게 된다고 한다. 정말 뉴스에 나올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고 한다. 실제로 요양 생활을 했던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면 돌아가시는 거라며 아무도 와 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할머니가 젊었을 때 자식들에게 뭔가 흠잡힐 일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 줄 재산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니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할머니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보내드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식이고,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사는 것만을 가르치고, 죽는 것에 관해서는 교육 받지 못한 폐해는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화장터 하나 세우는 일에도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결국 마지막에 가야할 곳이 그곳이 될 텐데도 말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이제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임을 환기시킨다. 죽음도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는 길이 두렵거나 쓸쓸하지마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에서의 거대한 벌레로 변했던 주인공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타인의 현재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 사회봉사의 거대한 치유력만이 카프카가 경고한 인간 소외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마지막에 몬스터로 변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구원해 준다. 

그때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부디 행복한 몬스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84p)"라고 썼다. 이 말은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볼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시간 6개월...   

 

이 책은 주로 말기암 환자를 다루고 있다.   

언젠가 나는 나카무라 진이치와 콘도 마콘도가 공저한 <암에 걸린채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유럽은 암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암으로 죽는 것에 만족하며 다행으로 여긴다고 해서 좀 놀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쪽 지역의 사람들의 인생관이 동양 사람들의 그것과 많이 다른가 보다.

물론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비명횡사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 아무런 준비없이 마지막을 맞는다는 건 얼마나 허무한가? 그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적지않은 충격일 것이다. 그런데 비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말기암 환자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그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플까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 저자는 참지 말라고 한다. 옛날에나 고통을 참느라 고생이었지 지금은 약이 좋아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암 자체보다 진통제로 인해 명을 제촉하거나 중독될까 봐 겁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거듭 강조해서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더 존엄하게 살다 죽고 싶다면 진통제를 쓰라고 조언한다. 이건 정말 참고할만 하다. 

실제로 나의 오빠는 전이된 췌장암이었다. 의사들도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한 놈이라고 했다. 다른 암도 고통스럽겠지만 췌장암은 특히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물론 난 오빠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같은 췌장암 환자 쳐놓고 비교적 고통이 덜했다고도 전한다. 그게 기도 덕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적절히 약을 잘 써서도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소화 하면서 남은 기간을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를 생각해 볼만 할 것 같다. 물론 살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그 시간들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 <버킷리스트>란 영화를 본 게 기억이 난다. 죽음을 앞두고 두 주인공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 하나 실천하고 죽는다는, 나름 꽤 의미있고 감동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난 가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꼭 오빠와 함께 보냈던 생애 마지막6개월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해 본다. 사실 난 오빠와 그다지 잘 지냈던 남매지간은 못 된다. 하지만 암 선고를 받고 6개월 간은 오빠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 간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서툴렀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오빠를 너무 쓸쓸하게 보낸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난 솔직히 오빠의 임종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도 더 더욱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해도 그 보내는 과정은 만족할 수가 없다.

다시 오빠가 암 선고를 받았던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것이 꼭 한 번이듯, 죽는 것도 꼭 한 번이다. 이것을 돌이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난 그와 어떻게 남은 기간을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 살리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전전긍긍해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라며, 그것에 만족해 하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오빠를 기리는 마음으로 늦게나마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었을 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비껴가거나, 당해야할 사별의 슬픔이 감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좀 더 성숙한 자제를 갖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말미에 저자가 추천하는 웰다잉 10계명도 음미해 볼만하다. 추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3-10-0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에도 긴 글인데, 글 쓰신 님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저의 아버지도 진통제를 많이 쓰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존엄하기 위해서 진통제가 필요한 거, 맞는 것 같아요.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란다는 것, 음미해 볼 만하네요.
삶에 대해서만 공부할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부 - 죽음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하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아무래도 부모님이 가장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지금 위로차? 친정에 간답니다. ^^

많이 배워 갑니다. ^^

stella.K 2013-10-01 14:48   좋아요 0 | URL
아, 미안해요. 저도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ㅠ
사실 이 리뷰 쓰는데 2주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보통은 앉은 자리에서 쓰게 되는데
이건 전에 반쯤 쓰고, 임시저장으로 하고 나머지를 또 이날 썼지요.
게을러서 이기도 했겠지만 왠지 좀 더 정리가 필요한 것 같더라구요.
쓰면서도 언니 생각 많이 했어요.ㅠ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네. 언니도 어머니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또 뵈어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는 처음 접하는 위화의 소설이다. 

일단 다 읽고난 후 이 소설의 인상을 말하라면 책 표지 그림만큼이나 쓸쓸하고, 허무하며 동시에 기괴하다. 죽으면 한 줌의 흙이되고, 저 세상으로 가면 이 세상에서의 일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데, 뭐 때문에 사는 동안 그토록이나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 미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 사랑 받지 못하여, 사랑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작가가 나름 죽음의 세계를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작가는 죽음을 통해 인간 삶의 부조리한 면들을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더 강해 보인다.

 

작가가 책에서 사룬 중국 사회의 문제는 비단 중국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책에서 다뤘던 자살의 문제, 영아 납치 살해의 문제,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있는 그러나 온갖 사건과 사고의 문제는 익히 보아 온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기에 얼키고 설킨 인간 애증의 문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만 작가의 다른 점이 있다면, 메멘토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랬다고, 이런 인간의 문제를 죽음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 사회의 문제를 윤리나 철학의 관점이 아닌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뭔가 명확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즘엔 모든 것을 절대적 관점이 아닌 상대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성과 논리는 엄청 날카로워졌는지 몰라도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러나 죽음은 절대적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죽음을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인간의 문제를 안고 저 세상에서 까지 씨름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설정한 '빈의관'이라는 곳은 마치 이승에서 저승을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국경 또는 정류장 같은 곳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곳에서 죽은 영혼들은 뭐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냐고 서로 물어본다. 과연 그럴 것도 같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은 그가 왜 죽었는지, 뭐하다 죽었는지 묻는 사람마다 답변하기에 바쁘다. 죽은 망자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건데 망자끼리라도 그런 통과의례는 있지 않을까?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 고통 없고 이유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승에서 치뤄지는 그 통과의례는 유쾌하지마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망자끼리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 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죽음을 다룸에 있어서 '자살'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공 양페이의 전 부인이었던 리칭과 슈메이의 죽음이다. 둘은 다 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어도 자살은 의지고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고무 찬양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시 일단 죽음을 통과해 보면 자살처럼 초라하고 불합리한 것은 없다는 걸 두 사람이 잘 보여주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직접 죽어보지 않는 이상 사후 세계에 대해서 명확히 얘기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역대로부터 사후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되긴 하지만 누구 하나 명확하게 밝혀 놓은 이론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건, 죽고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전제다. 그리고 이 천국과 지옥은 누가 가느냐를 놓고도 의견은 분분해 보인다. 무신론이면서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 때 착하게 살았는가 나쁘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고 본다. 그에 비해 기독교인 것은 경우엔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믿음의 문제로 그것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판단하며 인간에게 겁을 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유보의식이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국을 생각해 보라. 인간이 사후에 갈 곳이 없고, 죽으면 끝이라면 이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들고, 괴로운 것이 되어버리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죽으면 천국을 소망하기에 죽음 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슬프다. 그러나 우린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떠나 보내줬고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어느 때가 되면 천국에서 다 같이 모여 살 날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간의 온갖 이성과 논리로 부정하는 철학을 펼친다면 무엇이 이로울까?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조차 막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책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의 죽음을 다룬만큼 그런 생각이 들게도 만든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쓴 하나의 소설일 뿐이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그렇듯 소설은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할 뿐이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후 세계의 일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 설득력을 지녔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작가의 생각에 완전 동의하진 못하겠다. 한 작가의 문학관은 그 자신의 세계관을 말하며, 인생관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작가는 사후 세계의 일면을 보여주므로 소설에서의 운영의 묘를 잘 살렸다고도 보여진다.  

 

결국 소설은 휴머니즘을 말해야 하고, 소설가는 휴머니스트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점이 충실해 보인다. 이야기도 잘 엮었다. 정말 이야기'꾼'답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3-09-1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에세이는 읽었는데, 이건 소설이군요.
사후 세계가 궁금해요.
그래서 위화 작가의 상상력으론 사후 세계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궁금합니다.
꽤 잘 쓰는 작가로 봅니다.^^

stella.K 2013-09-17 16:28   좋아요 0 | URL
중국 작가들이 한 글 하잖아요. ㅎㅎ
저 개인적으론 아주 감동적으로 썼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참 그럴 듯하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사후 세계는 늘 궁금해요.^^
 
항아리 어른이 읽는 동화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오빠 떠난 빈방에 남겨졌던 한 권의 책

 

원래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아니었다. 드물지만 어느 순간 무슨 책인가 뒤적거리다 결국 끝까지 읽고야마는 책이 있지 않는가? 나에겐 이 책이 그랬다.

 

오빠가 지난 달(정확히는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또 뭐가 급하다고 오빠의 유품을 그리도 빨리 정리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봤자 평소 입던 옷가지들과 일상 잡동사니들이 전분데 그 가운데 책도 대여섯 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책들은 어디 가고 남은 두어 권 중 하나로 남겨진 책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오빠가 떠난 후, 나는 낮이면 주로 그 방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독서를 하곤 했다. 빈방을 비워 두는 것도 뭐하고, 무엇보다 오빠 방은 볕이 잘 들어 어두 컴컴해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야하는 내 방을 생각하면 전기 요금도 아낄 겸 나는 그 방에서 밀린 독서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었던 책은 읽어 줄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나 다소 지루한 감이 있는 그래서 손에 들고 있기도 뭐하고 때려치우기도 뭐한 그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 기분도 전환할 겸 이 책을 펼쳐들게 된게 결국 읽고 있던 책 보다 먼저 읽고 만 것이다. 

 

하긴, 그러리만치 빠져버린 탓도 있지만, 책 두께가 얇야 읽는데 부담이 없던 이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지닌 힘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 어떤 책 보다 세다.   

 

동화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사실 저자가 문학계에 알아 줄만한 시인이고, 제목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게으른 나의 독서에 밀려 나온지는 꽤 되었으면서도 감히 읽을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오빠가 떠난 후에야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잠깐 읽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책 표지 왼쪽 맨 꼭대기에 조그만 글씨로 '어른이 읽는 동화'라고 씌여 있다. 역시 동화는 아름답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아름답다란 말은 너무 판에 밖힌 말이다. 차라리 '동화는 힘이 세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후 동화는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렸을 땐 독서에 관심이 없었던터라 대표적인 동화외엔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이 읽는 동화도 있으니 동화를 어린이만 읽는 건 이제 시대착오다. 사실 동화만큼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책을 읽으니 저자는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잘 꽤뚫고 그것을 잘도 엮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대상을 의인화하는 상상력이 탁월하다. 동화의 미덕은 인간이 지녀야할 가치에 대해 교훈적이면서도 재밌게 잘 풀어놨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웬만한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 보다 낫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자가 시인인만큼 시를 짓는 마음으로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었을 것이다. 특히 첫번에 나오는 '항아리'나 '선인장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읽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러나 동화는...

 

그런데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동화는 감동스럽다기 보단 뭔가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들었고 이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잣나무 한 그루가 동서남북으로 가지를 뻗고 살고 있는데,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의 가지는 길기도 하거니와 잣 열매를 잘 맺는데 비해, 북쪽의 가지는 길이도 짧고 열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쪽의 가지가 북쪽의 가지를 업신여기다 못해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북쪽의 가지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쪽의 가지는 북쪽의 가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런 남쪽 가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여름 날 태풍이 불어 그만 북쪽 가지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남쪽의 가지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북쪽의 가지가 없어지고 보니 몸이 기울어져 보기가 흉할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열매도 많이 맺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잣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쪽 가지는 그제야 북쪽 가지가 있어야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지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일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워낙에 불경기니 모든 사람들이 다 음지에 있는 것만 같아도 분명 양지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건 분명 알든지 모르던지 음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아 순간 교만한 생각이 들 수 있고, 그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크게 보면 자신에게 이득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서로 상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그리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리도 마음이 쓰리고 먹먹해졌던 것일까?

 

나와 오빠의 관계는 세상에서 말하는 '둘도 없는 오누이'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오빠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적잖이 무시당한 탓에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오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현격하게 말 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가족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아니 차라리 가족들에게 자기 표현하는 것을 서툴러 했다고 해 두자. 난 그런 오빠를 답답해 하다못해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오해와 원망, 미움과 갈등이 없지 않았던터라 내가 오빠를 싫어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내 나도 가인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나마 오빠 생애에 있어서 죽기 마지막 6개월이 어떻게 보면 가족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행복하지는 않아도 다행스런 기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 한켠이 허전하다 못해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걸 상실감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왜 우린 살아있을 때 오누이의 정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영영 이별해야 했던 것일까? 미워하는 가족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더니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동기간이란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이 동화가 특별하게 와닿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가지의 마음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리고 동화는 그런 인간을 먼저 훈계하고, 교훈한다. 이것이 동화의 힘일 것이다.

 

책 읽는 마음

 

 니나 상코비치는 언니를 암으로 잃고 그 상실감을 독서로 채워 <혼자 책 읽는 시간>이란 책을 냈다. 독서가 정말 가족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 잃은 상실감을 채워주며 치료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나 자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책의 부제처럼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독서하는 행위에 대해선 동의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늘 독서에 대해서만큼은 부채감을 안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나는 그 이유를 거기에 두고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어 볼 참이다. 그래서도 오빠 떠난 빈방에 들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책을 발견했을 때는 맛있는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것과 똑같은 심리상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빨리 하던 일을 마쳐놓고 책 읽기에 돌입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현대화된 세상에서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될거라고 우려의 소리를 높이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책을 읽고, 찾는 한 그러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적어도 이런 좋은 동화를 찾아 읽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말하곤 했다. 특히 동화는 확실히 그래왔던 것 같다. 동화가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빠는 과연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살아생전 오빠의 성정으로 봐선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책을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출한 성격으로 봐 읽지 안을 책은 살 리가 없으니 다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읽었냐고 쉽게 물어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곳도 아니니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정말 멀어도 한참 멀다 싶다. 책도 언제 샀는 지 조금은 누렇게 빛이 바래있다. 

 

새삼 이 책에 대한 인연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의 방에 무슨 책이 있는 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빠가 세상을 떠나서야 볼 수 있었으니 마치 오빠가 마지막 떠나면서 나에게 편지대신 남겨준 것 같아 읽는내내 뭉클했다. 난 아무래도 또 오빠 떠난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낭만인생님의 "하루에 한 권 읽기의 미친 독서일기"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죠.

 

<혼자 책 읽는 시간>이란 책도 있군요. 그렇지 않아도 방 구석 구석 읽겠다고 쌓아 둔 책이 산더민데 이제야 비로소 이것들을 읽어 줘야겠다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며칠 전,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거든요.

 

하루 독서량 100쪽을 넘지 못하는 저로선 오늘 님의 글이 상당한 도전이 되는군요. 열심히 읽으시기 바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