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니 옛날 10대 말이었는지, 20대 초반에 읽었던 <날개>를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이 책 리뷰 때 나는 <날개>를 다시 읽은 소감을 그 독특함 때문에 이상이 뽕 맞고 쓴 글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 작품은 기생 금홍과 살았을 때의 단편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뿐 아니라 이상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내 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언제였을까? 서재 활동 초기 때 한창 서재인들 개인 이벤트로 서로 책 선물을 주고 받았을 때 나도 어떤 서재인으로부터 이 책과 같은 작가의 <한용운 평전>을 받은 적이 있다. 감사의 뜻을 그의 서재에 남기고, 언젠간 읽게 되려니 했는데 그 언제가 되도 읽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 읽어야 한다면 바로 지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상에 대해 의문만을 갖고 있을 것인가?
오늘 다 읽은 이 책은 솔직히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 뭐 워낙에 의문많은 삶을 살다가 간 인물이니 그럴 수도 있고, 시인 고운 옹이 쓴 책이라 호락호락 읽히지는 않았다. 왜 그리도 말이 어렵던지. 그래도 많은 부분 이상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어 좋았다. 고운 옹 사견도 좀 들어간 것 같아 다른 저자가 쓴 책과 비교가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날개>는 확실히 금홍과 살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을로 한 것이 맞았다. 내가 이 책을 석연치 않게 생각한 건 저자가 금홍을 거의 색녀 또는 탕녀로 묘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생이었으니 아무리 좋게 봐줘도 딱히 붙여 줄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기생이 가장 점잖은 표현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상이 금홍과 함께 살면서 금홍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경제력도 없었다는 건 확실히 치명적여 보이긴 한다. 또 그 때문에 금홍이 다른 남자와 통정을 하고 그것을 알아도 그는 무심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과연 이 프레임이 맞기는 한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금홍을 너무 인격적으로 비하한 건 아닌지. 물론 이상이 그 부분에서 워낙에 취약했으니 그것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이 살았던 때는 1930년대다. 그 시절 자유의 바람을 타고 남녀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대범했을 테니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바라보는 남성관을 정력과 경제력란 관점에서만 보는 거라면 저자는 당시의 여성을 너무 단조롭게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그 시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금홍의 시각에서 이상을 다른 소설을 써 준다면 좋겠다란 바람을 가져 본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나니 지난 날 나는 <이상 시집> 리뷰에 이상에게 무릎꿇었다고 쓰기도 했는데, 이상은 내가 무릎꿇고 말고 할 존재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 독특한 사람이라.
단지 이 책을 읽고나니 1930년대가 궁금해졌다. 누구는 우리나라 이때를 가리켜 한국의 문예부흥기라고까지 했는데,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에서 김유정이나 김기림 당대 같은 기라성 같은 문재들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이상과 모던 뽀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문장 노동자 장석주가 쓴 책이다. 과연 그는 1930년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밝혀놨을지 궁금해진다.
솔직히 이상은 저 고운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김연수의 책은 이상의 전기 소설로 알고 있다. 과연 김연수의 입김으로 이상이 어떻게 1930년 대를 살아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이 책은 언제 읽게될런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새해를 여는 책으로 <이상 평전>이 될 거라곤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조금 더 삼빡하고 기품있는 책을 읽었어야 하는 건데. 일단 올해 안에 읽어보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