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욕심은 한이 없다. 줄여야지 줄여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되고 있다. 내가 읽겠다고 받아 둔 책만해도 뭔지 아는가?
책 표지가 예쁘긴 하다.
하지만 이상의 시는 난해하다.
시를 읽지 못하는 내가 생각해도 이건 과유불급이다.
그래도 읽어 보겠다고 덤빈 건 이상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로망이고 이상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상의 <날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지금도 생각하면 하나의 충격이고, 감전이었다.
시 가지고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뒤에 그의 수필이 나오니 그걸 가지고는 할 말이 있으려나?
리뷰 쓸 일이 저신 같다.
장정일이 언제 이런 책을 내놨구나.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유명한 고전의 서문을 그 특유의 시각과 문체로 분석해 놓은 책 같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저자 서문 그렇지 않으면 후기를 읽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솔직히 난 서문은 목차만큼 읽지는 않는다.
예전엔 아예 읽지도 않았다. 뭐 그냥 익명의 독자에게 예쁘게 봐달라는 하나의 인삿말 같은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맨 마지막에 출판 관계자들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며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서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문학계의 똘이 장군 장정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 역시도 서문을 아주 안 읽지는 않는다. 어떤 서문은 정말 그 책이 어떤 책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꼼꼼하게 읽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발견하는 순간 내 책의 저자 후기를 떠올렸다. 에세이에 뭐 굳이 서문이 필요할까 싶어 후기로 주저리 주저리 특정 작가를 저격하면서 썼던 기억이 난다. 위대하게 쓸 수 없다면 차라리 주저리 주저리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또한 그 작가가 싫어서라기 보단 우리 문학의 참을 수 업는 가벼움 때문에 또한 그것을 제도권 문학으로 수용하는 작태에 대해 내가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목소리를 높여보나 해서다. 그런데 역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글이다. 근데 이 책을 읽으면 또 찔릴 것도 같다.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전쟁과 평화> 완간 기념 이벤트를 했었는데 안 될 줄 알면서도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도전했다. 물론 역시 미끄덩이었지만.
그렇게 쓸쓸히 사라질무렵 (사실 이 얘기하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이 책의 번역자님께서 개인 이벤트를 여였다. 뭐 앞선 이벤트에서 떨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그분의 이벤트의 변이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너무 인상적이 응원차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이벤트에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도전자가 많아 죽음의 사다리 타기를 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내가 그 사다리에 살아남았다는 것.
받은 지는 지난 달에 받았는데 제목이 시사하듯 요즘 같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읽어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이 시기를 넘기면 좀 기대가 수그러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더운 7 8월에 읽어줘야 한다. 그러기엔 또 번역자분께 너무 미안하지 않는가? 아무튼 난 이 이벤트 때문에 <전쟁과 평화> 이벤트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 잘 쓰시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 프레이야님께서 우리집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을 때 좀 놀랐다. 아니 이 분이 또 언제 두번째 책을 내셨더란 말인가? 기쁘기도 하고, 부러운 마음에 냉큼 주소를 알려 드렸다.
프레이야님 지난 번 첫번째 책을 낸 이후로 서재에 잘 안 나타나시고, 나 역시도 서재에 글을 남기는 게 예전만 같지않아 좀 멀어진 느낌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다시 가까워진 느낌이어서 반갑고 기쁘다.
마침 프레이이야님은 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답례로 내 책을 보내드렸다. 모쪼록 이 책도 첫번 책에 이어 좋은 성과 있게되길 바란다.
<릿터>가 새로 나올 때가 됐는데 소식이 없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잡지 월초엔 어김없이 나와줬는데 이번호는 뜸을 들인다 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도착했다. 하긴 지난 번 나온 것도 목차와 레베카 솔닛 잠시 읽다 다른 책과 다른 일에 묻혀 아직도 읽지를 못했다.
그 다른 일이라는 것도 그렇게 급하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괜히 마음만 급했다. 벌써 읽어야할 잡지도 이렇게 못 읽고 있으니.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일도 하고 잡지도 다시 꼼꼼히 읽어야겠다.
사실 이 책은 다 읽고 리뷰 쓰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다.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성교육을 위한 책이고, 미국의 예라 조금은 충격적이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도 전파 속도가 좀 느리라뿐이지 이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사실 제대로된 페미니즘은 성교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는 것도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교육의 현주소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즘 TV는 숫컷들의 전성시대다. 물론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페미니즘 시각을 가지고 봐서그런지, 브로맨스라는 신조어를 등에 엎고 뭘해도 남자 일색이다.
물론 이 브로맨스라는 것도 세상이 좋아졌는지 남성 보다는 여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긴 한다. 즉 여자들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드는 남성 출연자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느낌. 하지만 궁극적으론 방송은 남자들이 장악한다는 이 원리는 변함이 없다.
나는 잘 몰랐는데 요즘 같은 여성혐오 시대에 남자가 여성 옹호적 발언을 하면 불이익이 생각 보다 센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고마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난 또 걱정을 너무 앞서서 하는 걸까, 그게 과연 궁극적으로 여성에게도 좋은 것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남자가 여성 옹호적 발언을 하는 것과 여성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려해 준다는 것은 좀 별개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남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렇게 해 준다는 게 어딘가. 하지만 뭐가 됐든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당사자가 해결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예전에 나는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고 흑인이 주인공이고 흑인이 나왔다고 해서 흑인 영화가 아니라고, 이건 알고 보면 쵸코 바나나 같은 영화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백인우월주의 영화란 말이다. 흑인은 절대로 인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백인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강력 비난을 한 적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게 또 맞는 얘기다. 노예 해방은 백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흑인은 없었다. 그러니 그런 영화가 나와도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일이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여성의 문제는 너무 심각하고, 여성 스스로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힘이든다. 그래서 남자가 대신 나서서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사람은 여자를 약하게 본다면 어디까지 약하게 볼 것인가? 여자가 진정으로 나서야할 그때마다 그것을 가로막고 대신 싸워 주겠다고 한다면 여자는 언제 제대로된 힘을 발휘해 볼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대신 싸워주는데 뭐가 문제냐고 남자로서 실력 행사나 한다면 그게 진정한 여성 옹호가 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래서 요즘 유명한 남자 셀럽들이 연사로 나서서 얘기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늘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는 여성 보다 남성을 향해 있다. 진짜로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더 옳은 일은 아닐까? 물론 거기에 남성은 남성만이 남성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고, 여자들이 모르는 남성의 언어가 있기 때문에 남성이 나서줘야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회화된 언어는 거의 대부분은 남성화된 언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가 여성 옹호적 발언을 하면 이쪽에서 무조건 환영 받을 거란 생각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자기가 옳은 일을 하는데 환영을 받고 안 받고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런 인간의 하찮은 동정이나 받겠다고 페미니즘 하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애벌레는 스스로가 탈피를 해야지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여성의 문제는 여성이 해결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야박하다고 할지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이 기본적인 생각을 가져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