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5시>를 읽었던 건 학창시절이었다. 조금 읽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TV에서 이 영화를 방영해 줘서 본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하루아침에 남편이 행방불명이 되서 아내가 경찰서장인가 하는 사람을 찾아가 남편의 신원을 얘기했더니 심각하게 받아 적는 듯 하는데 사실은 꽃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지막 엔딩 장면. 카메라 앞에서 웃으면 웃을수록 슬퍼지는 주인공을 맡았던 안소니 퀸의 얼굴. 그리고 얼마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던 걸까? 다시 보니 역시 명작이란 생각이 든다.

웃픈 영화 몇 편이 있다. 뭔가 웃기고 어처구니 없지만 슬픈 영화. 아마도 대표적인 영화가 채플린의 일련의 영화들이 아닐까 싶다. 뭔가 영화는 웃긴 것 같긴한데 보고나면 (아니 보는 중에도) 뭔가 썩소를 짓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채플린을 천재라고 하지 않던가.
웃겨서 웃는 건 그냥 코미디나 개그다. 근데 슬픈데 웃게 만들거나, 웃기는데 슬픈 건 드라마다. 하긴 난 웃겨서 웃는 코미디나 개그도 웬만해서 잘 웃지 않는다. 똑같은 패턴이 보이면 별로 웃을 게 없는 이유도 있지만, 청중에게 웃음을 주기위해 망가져야 하고, 때로 자신의 치부가 될만한 것도 웃음거리와 맞바꾸는 것을 보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에겐 역으로 모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개그맨이나 코미디언들에겐 웃음만이 전분데 이렇게까지 망가져 주는데 웃고 있지 않다니. 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묘하게도 <인생은 아름다워>와 겹쳐졌다. 그 영화도 시종 밝음을 유지하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슬프지 않는가. 또 같은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인류 역사에 나치 시대가 있었다는 건 불행하긴 하지만, 불행한 것을 불행하게만 그리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은 가히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를 조금도 폄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모순과 그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다.
우리나라는 좀 이런 걸 적극 배울 필요가 있다. 지금도 간간히 만들어지는 일제 치하와 광주사태 같은 이야기는 그것의 일면을 액면 그대로 그리려고만 하지 아직 그런 작품성은 뚜렷히 보이지 않고 있다.
안소니 퀸이 연기한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인이고 유대인도 아니면서 영문도 모르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한때는 유대인으로 또 한때는 독일인으로 또 어느 땐 독일인이 아닌 것으로 살다가 세월이 한참 흐르고 그리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그로선 어처구니 없지만 보는 사람은 웃음이 난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나라가 (힘이 없으면) 개인을 지켜 줄 수가 없다. 그의 인생 유전은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이 사람도 됐다 저 사람도 됐다. 그건 또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 하지만 영화는 또 그다지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장 큰 정체성은 엔딩 이후의 요한 모리츠의 삶이 아닐까? 집을 떠나 올 때 그의 슬하의 두 아들은 이제 막 발을 떼기 시작한 꼬마거나 갓난 아기였다. 10년 넘게 떠돌다 가족을 보니 아이들은 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아이들의 중요한 순간에 아빠가 있어줘야 하는데 그 세월의 갭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본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남자들 자기 아내될 사람 너무 미인이냐 아니냐 따지지 마라. 물론 소설이나 영화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모리츠의 아내가 경국지색이다. 그러다 보니 모리츠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고 끌려가지 않는가. 모리츠가 그렇게 집에 없는 것을 틈타 아내를 겁탈하는 늑대가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는 것이고. 물론 미인은 누가 지켜주겠는가를 따지면 모리츠 같은 짐승남이 지켜줘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만.
아무튼 이 영화는 진짜 명작이다. 한번쯤 보면 좋겠다.
소설도 읽어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