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마디로 득템의 날이었다.

사실 난 어제 오랜만에 아는 후배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 보다 조금 일찍 서둘러 강남역에 있는 Y 중고샵엘 들렸다. 책은 꼭 읽을려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중고샵은 뭐 쓸 만한 물건이 있나 어슬렁거리는 맛을 즐기기 위해 가는 곳이다. 굳이 말하면 낚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제는 촉이 좋았다. 오랫동안 꼭 한 번 사 봐야지 했던 서머싯 모옴

<불멸의 작가위대한 상상력>을 거기서 건지게 될 줄이야. 완전 득템이다. 낚시 용어로 치면 월척. 그것도 거의 만원 가까이 싼 가격에 상태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이 책을 발견하는 순간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땅은 온통 시커먼데 보물이 숨어 있는 곳만 발광채로 있는 거 말이다.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 이 맛에 중고샵을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뿌듯한 마음으로 후배와는 인도 커리 전문점에서 점심을 같이했는데 그곳은 4년 전쯤 조카와 함께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맛있어 좋아라 했던 곳이다. 그리고 다음에 꼭 다시 와 보리라 했고 그동안 친구와 함께 그곳을 다시 찾았지만 길치에 방향치인 나는 결국 못 찾고 딴 곳을 헤매 돌다 결국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후배와는 이렇게 우습지도 않게 찾아오게 되니 허탈하기도 하고 다시 찾아 감개가 무량하기도 했다.

 

교사를 하는 그 후배는 만난 지도 오래됐고, 내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내 책 사 주면 밥을 사 주겠노라고 꾀기도 했는데 배 보다 배꼽이 크다고 차라리 책 선물해 주겠으니 밥 사달라고 그럴 걸 그랬다 싶다) 그런데 요즘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선물로 주는 책과 이렇게 상대가 직접 사서 내민 책에 쓰는 인사말이 좀 다른데 어제는 팬도 준비하지도 않았고 인사말도 준비하지 못한 책 한참을 뭐라고 써줘야 하나 고민을 해야 했다. 후배라고는해도 엄연한 독잔데 너무 예의가 없다 싶다(그저 엽산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리라 핑계를 대본다). 특히 그 친구는 고맙게도 나를 만나기 얼마 전 동네 서점을 갔다가 내 책을 발견노라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있는 내 책을 본 적이 없다. 오프라인 서점을 거의 나가지 않으며 나간다면 이렇게 득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중고샵에 나갈 뿐이다.

 

 

저렇게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내 나 자신과 묘하게 오버랩이 되면서 괜히 처량 맞게도 느껴졌다. 지금쯤 매대에서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 생각하니 문득 한때는 잘 나갔던 쇼윈도우의 창녀가 이제는 나이 들어 뒷방 늙은이 행세하는 늙은 창녀가 저모양일까 싶기도 하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책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하긴 그나마 저렇게 일반 서점에서 내 책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책이 인터넷 중고샵에서 발견된 것을 알고 있다. 이게 어느 날 오프라인 중고샵에서 발견되면 또 어떤 기분일까? 범죄 현장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그땐 얼른 자리를 피하게 될 것 같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속으로 나는 저 책의 저자가 아녜요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숨어서 지켜보겠지. 혹시 누가 사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차라리 나을 것이다. 내 책이 어느 폐지 공장에서 파쇄를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면. 그건 지나친 망상일까? 책으로 만들어질 원고는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땐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지 않는가? 설혹 그런 순간을 목격하게 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 후배 역시 책을 좋아해 그럼 점에선 우린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루키가 유명한 사람이긴 한가 보다. 꼭 책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면 하루키는 한 번씩 건드려지는 것 같다. 그때도 우린 무슨 말 끝에 하루키를 얘기했다. 마침 나는 어제 새벽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독하기도 했는데 놀라운 건, 그의

대표작을 말할 때 <노르웨이 숲>을 말하곤 하지만 그 친구와 내가 하루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책이라는 것이다. 그 후 똑같이 한참 후에 <노르웨이 숲>을 읽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그 친구와 난 평행이론인 셈인가.

 

 

좀 우스운 건, 그 친구가 <노르웨이 숲>을 읽게 된 게 대학을 갓 들어가서였다고

한다. 읽은 지 하도 오래라 나는 기억조차 나질 않는데 그 친구는 그 책에서 마스터베이션이란 단어를 발견하고 친구와 선배들 앞에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보기도 했다고 해서 어찌나 우습던지. 하긴 지금이나 되니까 웃지 당시로는 한번 들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긴 하다.

 

그 친구의 작년에 읽었던 책 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행복만을 보았다>란 책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나는 이 책을 역시 인터넷 Y 중고샵에서 본 적이 있어 다음 번 책을 사게 되면 사야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점심을 너무 잘 먹었다고 생각한 건지 헤어지기 전에 그 책을 사 주겠다며 있으리란 보장도 못하면서 알라딘 중고샵으로 나를 잡아 끌었다. 다행히도 그 책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책도 책이지만 거기서 나는 <은밀한 생>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몇 년 간 벼르고만 있었던 책이었는데 여기서 발견하다니. 상태도 양호한 편이고. 중고샵이 좋은 건 역시 저렴함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에게 내친김에 이 책도 사달라고 비비는 게 용이하다. 만일 일반서점 같았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더 좋았던 건 그 친구 역시 알라딘 회원이긴 한데 오랫동안 거래를 하지 않아 적립금 3만원이 있었다는 걸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 그 친구로서도 땡잡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도 현금 쓰지 않게 해서 부담 없고.

 

이렇게 중고샵에서 책을 사는 건 나에겐 낙이고 작은 사치라면 사치다. 물론 이 책을 언제 다 읽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있었던 책을 드디어 품에 안게 됐으니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게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얼마 전 신청

<작업인문학>이 도착해 있었고, 오늘은 <작품의 고향>이 도착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자가 쓴 책이라 관심이 간다. 아무튼 난 올해가 시작되면서 이미 질러버린 책도 있고 이렇게 많은 책을 사 본 적이 없는데 한동안은 정말 책을 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 금단현상을 잘 견딜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 그리고 그 친구의 책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사한 인생의 봄날을 맞으라고 써 줬던 것 같다. 작년까지 학교에서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었고 올 한해도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르겠다고 끙끙거렸던지라. 힘내라, ! 뭐 그런 거 써 줄까 하다가 그건 본인이 고사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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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19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점의 광부....좋은 책은 발굴..금맥이 잡았던 횡재의 날이었군요...이른바, 책광부..^^

stella.K 2017-01-19 20:58   좋아요 0 | URL
오, 책 광부! 그거 딱 좋은 말이네요.
어제 같은 날이 또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하긴 자주 있으면 안 되겠죠.
스릴이 떨어지거니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쌓아 둘 곳이 없거든요.ㅠㅋ

2017-01-19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1-19 21:00   좋아요 0 | URL
엇, 그럼 곧 읽으시겠어요. 쑥스~
예쁘게 잘 보여야 할 텐데...ㅠ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9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 하면 자위 밖에는 생각이 안납니다..

stella.K 2017-01-19 21:06   좋아요 0 | URL
그날 만난 후배는 저 보다는 하루키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정말 내용은 별로 볼 것이 없는데 문화적 코드를 요소 요소에
잘 배치해 놓는 재주는 인정하더라요.
과연 그렇겠구나 싶어요.
저는 어떤 작가든 한 번 질리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던데.

그런데 오늘 사진은 고개를 너무 돌리신 것 같아요.
45도를 유지하셨으면 더 멋있었을 텐데...
그냥 그렇다구요.ㅋㅋ

북프리쿠키 2017-01-1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텔라님 책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글쎄요~중고로 나와있다는 것에 대해
독자로서 기쁘기만 한데
작가님 입장에선 미묘한 생각들이 교차하나봐요^^;

stella.K 2017-01-19 21:55   좋아요 0 | URL
아, 좋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책의 일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노벨문학 수상작도 중고샵으로 가는데 제 책이라고 안 가겠습니까?ㅋㅋ
그저 바라기는 파쇄나 안 당하면 좋겠어요.
물론 출판사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ㅠ

cyrus 2017-01-2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 알라딘 중고매장에 안 간지 거의 한 달 됐어요. 마지막에 간 게 12월 중순이었을거예요. 도서관에 빌린 책들을 읽으니까 금단 현상을 견딜 수 있었어요. ^^

stella.K 2017-01-21 15:00   좋아요 0 | URL
헉, 정말...? 지난 번에도 간다고 그랬다 못 갔다고 그러지 않았니?
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겨우 한 달됐거네.
나도 많으면 그 정도 가는데...
중고책 날 잡아서 싹 다 정리해서 알라딘에 팔려고 그랬는데
그것도 일이라 조금씩 나가서 팔자 했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더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