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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읽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작가의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이번엔 한창훈이다.
번듯한 글 한 줄 제대로 못 쓰면서 나는 매번 이런 책에 눈독을 들인다.
그런데 아뿔싸! 제목이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한창훈 자신의 글 쓰기론만을 온전히 담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느 에세이류는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이 책은 작가가 예전에 내놓은 <향연>의 개정판이다. 어쨌든 그동안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작가를 이제야 이책으로 조우했다. 물론 제목이 그러했던 만큼 작가의 글 쓰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긴은 한다.
그가 작가가 되기로 한 동기가 재미있다.
미술은 동생이 하고 있었고, 음악은 돈이 너무 많이 들며, 연극은 한마디로 며느리시집살이와 맞먹는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독고다이류'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작가가 되는 것. 천 원어치 종이와 볼펜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직업. 문학은 고아가 하는 짓. 둘째로, 남을 짓누르고 올라서려는 종자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것. 이 원칙을 훼손당하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작가이겠구나 했단다. (8~9p)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주인공이 사회 비참과 무관심의 대상이면 독자들이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예전에 <아침마당>에서 헤어진 가족찾아 주기 뭐 그런 프로를 했는데 왜 재수없게 아침부터 눈물바람아냐'며 항의를 듣는단다. 순간 그는 인생이 얼마나 평안하고 즐거우면 타인의 아픔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왜 아침엔 울어서는 안 되는가? 그래서 그는 그들이 애써 알고 싶어하지 않는 당대 이야기로 그런 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13~14p) 했다. 거기엔 그 나름의 분노가 서려 있어 보인다.
또 어느만큼 읽어가다 보면 그는 이렇게도 썼다.
20대 중반, 직업에 대한 궁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회사에 취업할 능력도 마음도 없고, 투자비가 거의 들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한 태도로 소설가를 선택했다고(161p). 하지만 문제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몰랐다는 것. 약간은 황당해 보이기도 하다. 소설가가 되기로 했으면서 소설을 어떻게 쓰는 지 모르다니. 하지만 그의 말이 맞기도 하다. 소설은 알아도 모르겠는 게 소설이다. 매번 새 소설을 쓸 때마다 미궁속을 헤메는 게 소설가들 아닌가? 단지 목표 의식만 뚜렸하다.
어떻게 소설을 써야 하지? 답은 바로 나왔다.
잘 쓰거나 열심히 쓰거나.
무엇을 써야하지? 이것도 마찬가지.
좋은 것을 쓰거나 감동적인 것을 쓰거나 그럼 됐다.
좋고 감동적인 것을 열심히, 잘 쓰면 되겠구나.('삶을 궁리하는 방법',162p)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건 '궁리'라는 단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며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뭐 본질적인 문제에 해답을 달겠다고,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라고 고민하는 햄릿형 인간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훨씬 인간다워 보인다. 그러니까 비굴하게 삶에서 한 발 물러서서 관망하지 말고, 상대적 박탈감 내지는 빈곤감에 우울하거나 일희일비 하지말고 그냥 잘 살려고 오늘도 어제처럼 궁리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때로 그의 글이 나를 위로한다. 궁리 끝에 선택한 직업이 소설을 쓰는 일이면서 무슨 글 짓기 대회에서 장려상 쪼가리 하나 받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런데. 장려상은 고사하고 학창시절 교지에 내 글 한 자 올려 보지 못했다. 물론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아주 가끔 내 글이 활자화 되기도 했지만 그건 어찌보면 활자가 권위의식을 벗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386 세대의 작가들이 문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누구는 문단계의 지각 변동을 예측했다. 이제 발로 뛰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책들을 보고 연구하고 그에 대한 결과물로 소설을 쓰고 수필을 쓰며, 연구서 비슷한 책을 낸다고. 또 그렇지 않으면 자아에 대한 깊은 고뇌와 고독 뭐 그런 책들을 낼 거라고. 그것도 작가로 살아가는 궁리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머리와 가슴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삶의 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작가 한창훈은 지금도 어부로 일하면 글을 쓴다. 그가 고민 끝에 아니 궁리 끝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는 하지만 순수하게 글만 써서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작가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그래서 작가는 일종의 명예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작가는 체험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작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삶의 터전이 되고 바탕이 되는 곳에서부터 흘러 나온다. 비록 내가 원하는 그의 글 쓰기에 관한 부분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에선 짭쪼름하면서도 비릿한 바다의 그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삶 그대로를 끌어 안은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선 남도의 걸진 욕이 튀어 나오고, 어느 부분에선 다듬어지지 않는 야성의 해학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부분에선 같은 마을에 사는 누구의 사랑을 소설로 썼노라고도 밝히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선 같은 문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적어도 한창훈 작가는 자신이 궁리한 것 중 하나는 지키고 쓰는 것 같다. 그것은 좋고 감동적인 것을 열심히 쓰는것. 작가가 그럴수만 있다면 그도 꽤 성공한 작가겠다 싶다. 그렇다면 나의 궁리는 무엇인가?
내가 늘 작가들의 이런 글을 읽고자 하는 건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를 알고 싶기도 하지만,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드는가를 알고자 함도 있다. 예전엔 분노가 글을 쓰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마침 박혜영 교수가 한 잡지에 '요즘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읽어보면 조울증이나 자폐증에 걸린 작가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화가 난 작가들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12p)'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조울증을 포함한)우울증은 미국의 의료사회가 그것을 키워서 진료와 약의 판매고를 높이기 위함이라고는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가들까지 그것에 편승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제대로 분노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조울증과 자폐증이 창궐하는 문학판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사회의 갑질에 대한 부조리와 억압을 글로써 표현하는 게 작가의 제대로 된 분노일까?
박혜영 교수의 진단이 맞는 것이라면 오늘 날 우리나라 작가는 너무 나약하다. 고작 작가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니. 반대로 작가는 누구 보다도 건강해야 하고 탄탄한 근육질로다져져야 한다. 제대로 분노할 줄 모르는 작가가 작가일 수 있겠는가? 나는 또 궁리해 본다.
끝으로 작가의 생활철학이 마음에 들어 여기 적어 본다. 책의 날개에는, '사람을 볼 때 51점만 되면 100점을 주자.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어야지 꿀을 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진심 보다 태도이다. 미워할 것은 끝까지 미워하자. 땅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니 죽을 때까지 단 한 편도 소유하지 않는다.' '말 많은 이들과 오랫동안 술좌석을 같이하다가 터득한 것으로 '새로운 의미나 정보, 웃음, 그 외는 다물고 있자(297p)' 참고하면 사는데 두루 유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