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정혜(女子, 정혜 / The Charming Girl, 2005)




출처:djuna.nkino.com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혜
느린 호흡의 아트 하우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자, 정혜]의 도입부에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전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긋하게 정혜라는 평범한 우체국 직원의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 하니까요. 정혜는 직장에 다니고 길가에서 길잃은 고양이를 주워오고 화초에 물을 주고 서점에서 품절된 책을 주문하고 가끔 직장 동료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십니다. 이 사람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조용해서 영화화할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바로 그래서 영화가 투명 스토커의 몰래 카메라처럼 음란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카메라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누군가의 깊이 있는 삶이 아니라 예쁜 30대 초반 여성의 피상적인 외양일 수도 있다는 거죠.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면 관객들은 이 정혜라는 여성이 우체국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직장 여성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평범함의 범주 안에 들기엔 지나칠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고 그 고립 속에서 어떤 불만족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죠. 정혜는 직장 동료들과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면 어린아이처럼 서툴고 거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영화가 조금 더 진행되어 신혼여행 첫날 밤에 남편을 버리고 집으로 달아난 '전과'에 대해 들을 무렵이면 관객들도 이 사람에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구두가게에서 무신경한 직원의 행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불평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무표정하고 얌전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요.

어느 순간부터 정혜를 둘러싼 세계는 마들렌 과자가 둥둥 떠다니는 홍차 호수로 변해갑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자잘한 사건들이 정혜의 과거를 회상하는 과거가 되는 거죠. 1년 전에 죽은 어머니, 재앙으로 끝난 짧은 결혼, 그리고 과거의 끔찍한 경험. 이 순간부터 흐릿했던 드라마는 구체적인 실체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을 가둔 보이지 않는 장벽을 걷어내려는 서툰 몸짓을 시도하지요.

[여자, 정혜]는 논리적인 드라마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정혜라는 캐릭터의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은 직관적이고 무논리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죠. 예를 들어 정혜가 모텔방에서 술취한 남자를 위로하는 장면과 그 뒤에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재회의 장면은 메스라는 공통된 소재에 의해 연결되지만 논리적인 연결성은 없습니다. 정혜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심적 갈등을 거치는데 영화는 이들은 인과에 따라 한 줄로 나란히 배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죠.

이런 무논리성은 어떤 때는 매력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정혜]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두번째 재감상 때가 훨씬 나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분명한 스토리를 정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정보 없는 관객들은 쉽게 지루한 일상의 미로 속으로 빠져버릴 겁니다.

[여자, 정혜]에는 무심한 냉정함과 따뜻한 동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정혜와 조금 닮았어요. 퉁명스러운 태도로 짝사랑의 감정을 감추는 수줍은 사람처럼 영화는 일부러 무표정한 건조함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인공 옆을 맴도는 집요한 접근법에서 무표정함 속에 숨겨진 관심과 애정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아요. 결국 폭발적인 클라이막스를 거친 뒤엔 그 얄팍한 위장은 거의 완전히 벗겨지고 맙니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김지수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이게 좀 까다롭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김지수의 '연기변신'을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김지수는 지난 십 여년 동안 텔레비전에서 보여주었던 바로 그런 연기를 보여줍니다. 청순가련 분위기를 풍기는 깔끔한 내숭연기 말이죠 (제가 한국 텔레비전 시리즈에 대한 관심을 끊은 몇 년 동안 이 배우가 갑작스러운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고 해도 논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정혜의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몇몇 장면은 김지수의 기존 이미지 때문에 위험할 정도로 평면적이 됩니다. 그건 이 배우의 텔레비전 배우식 미모 때문일 수도 있겠죠.

단지 여기엔 세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캐릭터가 전형적인 청순가련형 인물에서 거의 완벽하게 벗어나 있습니다. 둘째, 배우가 캐릭터에 자신을 보다 깊이 투영할 여유가 존재합니다. 세째, 영화가 배우를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전의 평범한 내숭 연기에 사용되었던 테크닉이 억압된 기억과 감정이 꿈틀거리는 위험하고 흥미로운 인물을 구축하는 데 투입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종종 놀랍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 김지수의 얼굴 클로즈업이 이처럼 강렬할 수 있었는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거든요.

[여자, 정혜]는 모범적인 아시아 아트 하우스 영화입니다. 이 느릿느릿한 영화에서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공유하는 장르적 관습과 테크닉, 고정관념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아요. 종종 이 엄격한 태도가 영화를 목조르는 것도 사실이고요. 단 하나만의 설명만으로 캐릭터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 같은 과거의 폭로가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이 정혜라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쓰였고 그 결과 역시 강렬하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상이 도식적이라고 했지만 그 고통의 강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뒤에 이어지는 클라이막스가 설득력을 잃는 것도 아니죠.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영화를 다 보고 작품 자체를 조망할 수 있을 때에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요. (04/11/22)

DJUNA


 


**2005년,가장 먼저 보고싶은 영화중의 하나.포스터 사진속의 김지수..느낌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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