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 책
무슨 욕심인지 모르겠는데 난 항상 잘된 드라마를 보면 DVD를 갖고 싶다기 보단 대본집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작품 보다는 그 작품을 쓴 작가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는 가져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최근 그 소원을 이뤘다. 바로 이 책이다. 요즘처럼 드라마 대본집이 잘 나올까. 책이 제법 잘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노희경 아닌가. 하긴 대본집이 나와 있는 건 김수현이나 노희경이 전부일 듯 하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종편 TV가 개국을 하면서 모 방송국에서 하는 드라마를 조금씩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본 작가의 작품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작가의 주특기인 가족과 개인의 트라우마를 다룬 건 여전하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이 외적으로 근사한 캐릭터와 그에 걸맞는 화려한 치장을 보여주려고 할 때 노희경 작가는 항상 밑바닥 인생 아니면 남루한 삶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 역시 변함이 없는데, 형사물에 판타지의 결합은 확실히 새로운 시도고 모험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서 나 자신 초반 이것을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시청자로서 의문을 가졌더랬다. 그러는 와중에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내가 이책에서 보고 싶어했던 건 작가의 주옥같은 대사도 대사지만 상황 묘사를 어떻게 해놨을까 하는 거였다. 그건 마치 내가 늘 이면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들면 한편의 잘 만든 연극 그 뒤에는 늘 사람의 열정과 땀방울, 갈등과 바쁘게 움직이는 스텝들의 발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난 바로 그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노희경 작가는 어떻게 쓸까?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아, 이렇게 쓰는구나란 감탄 보단 실망이 더 앞선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영상 용어들을 대하고 있으면 나는 나대로 지난 날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건드려지는 느낌이다. 싸지도 않은 돈 들여 공부 한답시고 적지않은 나이에 나의 꼰대에 의해 동료 수강생들 앞에서 그 굴욕을 당했었다. 그 기억이 스멀대고 올라오는 것이다. 하긴,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것도 이맘 정도 지나고나니 웃을 마음도 난다. 꼭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게 아니면 뭘 할 수 있을까? 절망스러웠다. 포기하면 그만일 텐데 나는 여전히 그 꿈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인생 별거 있어, 한 방이란 말 믿고 싶어진다.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살만큼 살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사리면서 살아왔다. 이젠 맞설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이 나이쯤 되니까 느끼는 것이다. 그래도 무슨 관성이 남아 있는지 선택의 순간에선 늘 주춤거리고 피하게 된다. 나란 인간은 늘상 이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쓰는대신 노희경의 <빠담빠담>을 읽고 있었나 보다.
사실 말했던대로 책으로 본다면 실망을 더 많이 할 것 같다. 좋은 작품은 책 보다는 차라리 DVD로 간직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 인상 깊은 대사들, 영상들, 음악들이 다 들어가 있다. 책을 보면 그야말로 살 다 발라 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생선을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 드라마 작가는 이 상태로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손사래를 칠 것도 같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라도 소설가는 작품 좀 보자고 하면 원고나 이미 출판된 자신의 책을 보여주면 되지만, 드라마 작가는 제작자가 아니면 나중에 TV에서 보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그런 말이 있다. 영화는 감독을 위한 예술이고, 드라마는 배우를 위한 예술이라고. 그러니 드라마나 시나리오 작가는 어디에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지금은 그 작품에 누가 나오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썼느냐를 더 많이 본다. 그것은 아마도 김수현 작가를 비롯한 여타의 작가군들이 이룬 업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작가들이 쓴 대본집은 또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방금 난 대본집이 살 다 발라 먹은 뼈 드러난 생선이란 다소 거친 표현을 썼는데, 아무리 좋은 연출자, 좋은 배우가 있어도 그 선두에 작가의 작품이 없으면 그들의 존재는 아직 드러낼 수 없다. 이 자부심이 없다면 못할 것이 드라마 작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작품이 만들어지는 최초의 창조자의 책을 그냥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난 이 작품을 드라마와 책을 번갈아 가며 보고 읽었다. 집에 텔레비젼이 없으면 모를까 그것을 두고도 책으로만 본다는 건 그 작품을 즐기는 너무 소극적인 방법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던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던 노희경은 이번에도 역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살인자란 누명을 쓴 사람과 그 누명을 씌운 사람의 딸과의 사랑. 얼핏 보면 만나서는 절대 안되는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들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인물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사랑의 방정식은 정공법으로 풀어낸다. 이 작품 거의 말미에 이르면 우리가 하는 사랑은 다 가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랑은 고사하고 아무리 누명이라 해도 교도소에서 16년을 복역하고 나왔다면 그것을 풀 생각이나 날까? 처음엔 억울해 미치겠지만 포긴지 달관인지 모를 그 마음으로 살게되지 않을까? 그래. 난 뭘 해도 안 돼. 그냥 이대로 살다 죽지. 세상 모두가 나를 살인자라고 할 때 그것을 안 믿어주는 몇몇만 있어도 된 거 아냐? 하게되지 않을까? 하지만 주인공 양강칠은 끝까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해 냈다. 드라마니까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돈 없고 빽 없으면 죄없는 사람도 죄인이 되는 세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을 작가는 위로하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유상종이라고, 선녀와 나뭇꾼 또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 과연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비슷한 사람끼리와의 연애와 결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오래 못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한 대부분이기도 하다. 자기네의 사랑도 오래 갈지 모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사랑이든, 저런 사람의 사랑이든 우린 조금의 상처와 오해가 있으면 크게 확대 해석하고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으려고 빨리 끝내려고만 한다. 물은 건너봐야 깊이를 알듯이, 사랑은 시련을 겪어봐야 단단해질 수가 있다.
이렇게 작가는 양강칠과 정지나의 사랑을 더 어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단단해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확실히 오늘 날의 세대를 거스르는 작가 자신만의 감수성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양강칠에 정지나에게 프로포즈할 때 나무 반지를 선물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사랑이 견고하고 영원하길 바래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지만, 사실은 사랑은 깨지기 쉬운 거라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는 대사를 주고 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건 정말 맞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노희경만큼 실감나게 연애 이야기를 잘 풀어쓰는 작가도 흔치 않다.
드라마의 욕망 대 시청자 욕망
모든 이야기는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랑해서 더 사랑하고, 사랑이 뜻대로 안 되서 더 미워하고 갈등하고,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에 더 깊이좌절하고. 또 그것 때문에 나락에서 구원 받고. 모든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희경은 거기에 깊이를 더 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드라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베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잘나고 잘 나가는 사람에게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인간에 대한 연민은 상처 받고, 고통 당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대한 연민과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서 드러나진다. 보라, 그의 작품중에 그러지 않는 작품이 하나라도 있는 지. 특히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런 성향이 어찌보면 좀 더 진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도 같다.
그래서 그의 드라마는 착하다. 희망적이고, 해피엔딩이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대체적으로 그렇긴 하다. 물론 최근엔 그렇지 않은 드라마도 속속 나오고 있고 그것을 '막장'이라고까지 표현을 하는데 진짜 그런 드라마 쓰는 사람은 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드라마를 너무 도덕적이어야 하고 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라고 말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드라마는 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해피엔딩을 말할 수 있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드라마에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드라마의 기능 중 대리 만족의 기능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없는 것을 드라마에선 만족해 주는 것. 그래서 통쾌하고, 후련하고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게 꼭 그래서만 통쾌하고 후련해 하는 것마는 아니다. 막장 드라마가 욕을 하면서 보게되는 건 인간의 위선과 가십 때문일 것이다. 그 수면 밑에 있는 것을 작가들이 당당하게 끌어올려 준 것이다. 뭐 그래서 보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막장 드라마는 남는 것은 없다. 하긴 TV가 시청률 괴물 아니던가. 거기에서 인간의 진실을 말하고 연민을 말하는 노희경의 드라마는 정말 장사 안되는 드라마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책머리에 작가의 말에서, 남는 장사가 아닌 이 드라마에 매번 출현해 주는 탤런트 나문희 씨에게 고맙다고 했을까. 그의 드라마는 나쁘게 말하면 궁상 맞아서 해외에서 판권을 사려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면 나는 감히 노희경의 작품은 필히 섭렵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연민 없이, 성찰 없이 무슨 드라마를 쓰고 만들겠다고 하겠는가. 돈만 쳐 바르고 어깨에 힘만 들어간 드라마는 오래 남지 못한다. 소박해도 다시 보고 싶은 인간의 참된 가치를 전하는 드라마가 진짜 웰메이드라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시청자의 욕망을 제대로 건드려줬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뒤엎어줬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가진 사람만이 판을 치는 세상은 여전하겠지만 드라마에서 조차 그것을 말한다면 그건 좀 잔인한 것이다. 위로 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드라마에서만큼은 위로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시청자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 마음을 작가는 잊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천사를 등장시킨 판타지가 눈에 띄는데, 노희경의 천사는 확실히 그 캐릭터가 다르다. 천사가 된 인간을 표현해줬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 천사다. 그래서 때로 식은땀도 흘리고, 배고픔을 못 견뎌하며, 울고, 화내고, 비속어도 마구 남발한다. 한마디로 친근하고 귀엽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이름도 친근한 국수고, 양강칠과 환상의 커플이기도 하다. 솔직히 양강칠이란 인물은 정지나 보단 국수와 더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런데 작가에게 미안하다. 내 마음은 작가에게 끝까지 박수와 찬사를 보내고 싶은데 결국 드라마는 배우의 것이기에 결국 마지막에 박수는 양강칠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작가는 캐릭터를 만들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캐릭터가 아닐 수 있다. 나머지는 배우가 완성해 가는 것이다. 나는 정우성이 본래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벗고 어촌의 가방끈 짧은 하지만 순박하고 뚝심있는 사람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준 것에 무안히 감사와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정말 그는 캐릭터 연구를 많이 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가 맡은 캐릭터 중에 가장 많이 망가지고 동시에 가장 위대한 역을 해낸 것이 아닌가 한다. 더불어 국수 역의 김범은 정말 제대로 꽂혔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보는 내내 행복했고 뿌듯했다.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고, 양강칠이 실제로 어딘가에 실존해 있다면 잘 살라고, 행복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소설을 쓰는 작가면 모를까 드라마는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작가 혼자만이 영광을 다 가질 수 없다(아니 오히려 그 존재조차 미미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작품이 끝났을 때 배우에게나 시청자들에게나 주인공이 오래 기억이 남아야지 작가가 기억에 남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요즘엔 작가의 위상이 높아져서 영광을 웬만치는 누린다. 그러나 그 작품이 망쳤을 때 돌아오는 비난은 누구보다도 작가가 먼저다. 이게 드라마 작가의 위치가 아닌가 싶다.
사실 노희경뿐 아니라 드라마 작가들의 대본집 출간이 앞으로 출판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런지 모르겠다. 내가 볼 땐 아직 낙관하긴 이를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주옥 같은 대사가 아니면 지극히 건조한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낼 독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럴 땐 독자가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지문을 소설처럼 풀어 써 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것을 드라마 작가의 자존심이 허락될지 의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