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칼럼집이 뭐 이리 어려운가? 웬만한 대학 교수 강의집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내가 칼럼집을 거의 읽지 않으니 칼럼집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요즘엔 웬만한 잡글 가지고도 '칼럼'이라고 이름 붙이길 서슴치 않으니, 도대체 뭘 가지고 칼럼이라고 해야 하는건지, 그 정의가 모호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글이라면 과연 칼럼은 칼럼이겠다 싶다. 무엇보다 심층적이고, 일정 정도의 격을 갖추고 있으며,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가는데는 조금은 실패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동안 <한겨례21>의 '만리재에서'란 타이틀을 가지고 써왔던 저자의 글은 어느 정도의 지식층, 교양인들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됐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 세상이 하수상하여 일부러 뉴스와 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것이 결코 옳은 태도는 아니겠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칼럼이라고 읽을까? 물론 뉴스나 신문은 보지 않아도, 칼럼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서민이 친근감있게 읽을 수 있는 칼럼을 쓸 수는 없을까? 물론 이런 글도 읽기 나름이고, 이해하기 나름인 것 같다. 어떤 이는 이 책이 너무 좋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칼럼을 보는 눈을 키워야 했는지도 모르지.
폐일언 하고, 책을 읽다 다른 것은 다 좋다.하고 넘어 갈 수도 있어도, 왠지 이것만은 좀 아니다 싶은 것이 있어 글을 써 본다. 어차피 글이란 게 소통을 위한 것이니만큼, 모두 다 좋다는 건 있을 수 없으며, 모두 다 아닌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소통은 아닌 것과 그런 것의 혼재속에서 길을 찾아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해하시라.
내가 먼저 제기하고 싶은 건, 저자가 사형에 대해 썼던, <머나먼 인권 선진국>이란 제목에 '헌재여, 자백하시라'라는 소제목과 관련하여(242p), 난 좀 아닌데 싶어 글을 써 본다.
본 칼럼이 진보주의적여서 그런가, 그 글은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폐지를 촉구하는 글이었다. 때론 진보가 보수보다 멋져 보이긴 하다. 하지만 난 지난 시기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이것만큼은 신중해야 한다는 쪽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와, <집행자>란 영화였다. 물론 이 두 편의 영화를 보기 이전에 내가 사형을 폐지하는 입장이었는지,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난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엄밀한 의미에서 누구도 사람의 생명을 심판해서 인위적으로 죽게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보자면 사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두 영화는 바로 그 선상에서 관객들에게 묻는 영화하고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난 바로 이 점 때문에 오히려 폐지를 반대하거나 적어도 신중해야 한다는 쪽에 서게 되었다. 만일 그 두 편의 영화가 오히려 흉악범의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의 문제도 다루었다면(그건 스토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으리라) 폐지쪽에 더 많은 설득력을 지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영화 중 하나는(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쪽으로,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고, 특히 가해자를 사슴같은 모습으로 설정해 관객들로부터 더 많은 측은지심을 유도했다. 하지만 가해자가 다 그런 모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 영화 <집행자>인 경우 사형집행자가 얼마나 고통속에 사형을 집행하는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다. 물론 그들의 고충이 어떠한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사형을 폐지해야 하는가에 무게를 싣는다면 그것 역시 고려해 봐야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두 영화의 경우, 제작자측에선 그냥 사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제제기를 한 것뿐이지, 정말 폐지하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입장을 취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이 문제에 포문을 연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이 책 역시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몰랐던일인데, 지난 1996년, 사형이 위법이냐 합번이냐를 두고 법률심판이 있었는가 보다. 저자는 바로 그 글에서('머나먼 인권 선진국'이란 글) 이상갑 변호사의 말을 인용했다.
"한 나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되는 등 시대 상황이 바뀌어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가진 위하(위협)에 의한 범죄 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곧 폐지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로서 사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당연히 헌법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요컨대, 저자는 이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한지 14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채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바뀔 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외국의 꽤 많은 나라의 예들 들어 그 나라들은 이미 사형이 폐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243~235p). 물론 저자가 지적한 나라 중 몇몇 나라는 우리나라 보다 잘 사는 나라도 있지만, 또 적지 않는 수가 우리나라만 하거나 그 보다 못한 수준의 나라들도 언급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보다 못한 나라도 문명화 하는 과정에서 사형을 폐지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는 그 보다 잘 살면서 이 문제를 아직도 매듭짓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듣기론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5년인가 하는 세월 동안 단 한 건의 사형도 시행한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럴 경우 세계 인권 협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사형 폐지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지도 몇년 전의 일이니 또 모를 일이다. 그 안에 사형이 집행된 적이 있는지는. 아무튼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이 인도주의고 인권인지, 또한 저자는 사형 폐지국에 대해서만 나열하고 있을 뿐 논리적 설득은 없어 보였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므로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한다는 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먼저 위반한 쪽은 가해자, 흉악범들이다. 또 그들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피해를 입고,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피해자의 가족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희생, 고통은 외면한 채, 무조건 사형수의 편을 들어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인도주의일까? 용서에는 조건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상갑 변호사가 했던 말은 확실히 음미해 볼 필요는 있다.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된다면, 범죄 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정말 없어져야 할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에 교도 정책이 바로 실현이 되어서 흉악범의 재범이 확실히 없는 것이 확인되기만 해도 이건 고려해 봄직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상갑 변호사의 말에 우리는 긍정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갈수록 고도로 지능적이 돼 가고, 흉악해져 가고 있다. 형을 치른 죄수가 교도소에서 나와 다시 피해자를 찾아가 이전 보다 더 흉악한 방법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적어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정신적 충격과 상처는 치료가 되야하는 것이 아닌가? 사형 폐지국에 대해서만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이상갑 변호사가 제시한 조건이 얼마나 충족되고 있는가에 대한 자료 정도는 확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형수의 인권만 인권인가? 피해자도 인권이 지켜져야 한다. 자기 자신도 못 믿는다는 세상에서 사형만 폐지하면 과연 이 나라의 범죄율은 떨어지게 되는 것일까?
사형 폐지를 주장하려면 반대로, 사형을 존속하는 나라도 있을 것인데 그 나라가 왜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사형폐지를 말한다는 건 어패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쓰는 나는 사형을 존속시키거나 적어도 신중해야 한다는 쪽인데, 그 중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사형이 없어져도 범죄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아도 많은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확률이 높다. 사형이 없어지면 종신형이라는 말인데, 그렇지 않아도 묻지마 살인도 많은데 사람들에게 마구 칼을 휘둘러도 종국적으로 받는 형은 고작 종신형인데, 될대로 되라는 식의 인생을 버린 사람들에게 교도소에서 평생을 산다는 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흉악범은 넘쳐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생명이 중하면, 남의 생면도 중한 법이라는 걸 무엇으로 깨닫게 할 것인가.
또 그와 반대로, 설혹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책감 때문에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다면 수 없다면 자그것도 부조리 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존엄사도 이슈가 되고 있는데, 깨끗하게 죽을 권리가 사형수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 살리는 것만이 인권인가도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어찌보면, 저자가 이상갑이라는 변호사의 말을 들먹였던 것은,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인용한 것 같지는 않고, 이런 말만 남겨놓았을 뿐 이후 가타부타 별 말이 없더라며, 헌법재판소의 우유부단함을 꼬집었다. 물론 헌재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헌재는 이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으면서 사형이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저자 는 또 2009년도 크리스마스이브 그러니까 12월 24일은 헌재가 사형제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날이었다고 한다. 당시 59명의 사형수의 생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을 다시 한 번 세계에 공표하는 날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걸 그렇게까지 과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오히려 의문스럽다. 저자가 밝힌 나라가 사형을 폐지했다고 우리나라도 폐지해야 한다는 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문명화 되지 못했다고 하는 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런지.
사실 앞서 영화 <집행자>의 말을 하다가 말았는데, 사실 사형집행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이후 없어진 백정이란 직업이 현대의 교도관이란 직업에 덧씌워지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사형이 폐지되지 않은 이 나라에서 법을 집행하지 않는 건 법을 유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법이여, 인권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다.
저자는 인권을 다룬 쳅터에서 이 문제를 칼럼으로 다룬 것인데, 저자도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는 있지만,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는 좀 더 중도적 입장에서 글을 쓸 수는 없었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사형이 존재 하므로 인해서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난 앞서 말했지만 폐지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