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서 토론 선정도서

주난 줄말, 모처에서 하는 문학토론회에 나간지도 벌써 3회째가 되었다. 한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었고, 주최측으로서는 4회째를 맞았다. 이달의 독서토론 책은 티티아나 드 로즈네의 <사라의 열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읽을 생각이 없었다. 언뜻 봐선 요즘 나오는 미국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나는 <헬프>를 읽고 적잖이 실망을 했던터라 이책을 읽고 또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선택을 미뤘던 책이다. 참고로 내가 이렇게만 말하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 사람 저마다 자기 궁합에 맞는 나라의 문학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나는 미국 문학이 대체로 맞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 알량한 독서 실력으로 어느 나라 문학이 맞고 안 맞고를 논한다는 게 낮간지럽긴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미국 문학을 선택해서 완독에 성공한 책이 별로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책은 미국 문학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문학이고, 무엇보다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아무리 좋아도 동기가 뚜렷하지 않으면 내것으로 취하는 것엔 다소 꿈뜨기 마련이다. 이책도 그 모처에서 토론회를 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읽을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다시피 나는 컨디션의 난조로 벌써 며칠 째 이책을 붙들고 있었고 결국 다 읽지 못하고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책에 대해

그렇다고  이 책이 며칠씩 붙잡고 읽으리만치 어려웠던 책도 아니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모님은 새벽 1시에 이책을 붙들기 시작해서 4시 반쯤에 읽기를 마쳤다고 했다. 그만큼 가독성이 좋아서 독서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만에도 마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런 걸 나는 붙든지 4,5일이 지나가는데도 완독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꼭 컨디션의 난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만큼 편견이 심한 대상이 또 있을까? 어떤 책은 완독을 하지 못하고 그런 토론회에 참석한다면 되게 미안했을 것이다. 그런 책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또는 중요시 여기는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완독을 못하고 가도 아무런 죄책감(?) 같은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뭔가 내가 이책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이책에 대해 조금만 소개를 한다면,  이 책은 기자인 줄리아의 현재의 싯점과 과거 히틀러 치하에서사라의 싯점이 교차하는 방식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야 하는 사라와 사라의 부모. 사라는 동생을 벽장에 감춰둔채 그 벽장의 열쇠를 가지고 간다. 사라는 금방 집으로 다시 돌아와 동생을 그 벽장에서 꺼내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부모님하고도 떨어지게 되었다. 두려웠지만 더 이상 동생을 벽장에서 꺼내주는 것을 미룰수가 없다고 판단한 사라는 거기서 알게된 친구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말하자면 바로 사라와 줄리아의 시댁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교차한다는 점에서 익숙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의 문제점         

예전에 나는  <나의 아름다운 비밀> 영화를 보고 간단하게 쓴 감상문에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던 것을 기억한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고 보고 있기가 불편해서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놓고 나는 적잖이 작품을 많이 봐왔던 것도 사실이다. <쉰들러 리스트>는 물론이고, <인생은 아름다워>, <소피의 선택>, <제이콥의 거짓말>까지 내가 알고 있고, 볼 수 있는 한에서는 다 보았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홀로코스트의 영원한 고전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보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해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을 보게 만드는 것일까? 정말 홀로코스트는 소재일 뿐 주제는 아니다. 그것을 소재로 했을 때 거기서 빚어내는 인간의 다양한 군상을 보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일련의 작품을 봐 온터라 <사라의 열쇠>는 유감스럽게도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중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모르겠다. <자기 앞의 생>이나 <죽음의 수용소>는 워낙 오래 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다시 읽는다면 처음에 읽었던 그 감동이 살아 있을런지는.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라의 열쇠>를 쓴 작가가 작가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문체의 문제 

요즘 현대의 작가들은 다 그렇게 쓰는 걸까?  현대의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는 문체는 시나리오적 소설쓰기다. 쉽게 말하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독자가 보더라도 '이 책은 훗날 영화화될 것을 예상하고 쓴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이젠 그런 말이 무색할 정도도 요즘 작가들 사이에선 흔히 쓰는 문체로 통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실제로 심심찮게 영화화된 작품도 많다.  

실제로 나의 은사 중 한 분은 소설을 쓰다 시나리오로 전향을 하셨는데, 현대 소설을 씀에 있어서 시나리오 작법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소설을 써 볼 요량으로 시나리오를 공부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이 작품을 보는 순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소설이 영화화된다라고 하면 영화의 메카 허리우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애초에 <사라의 열쇠>를 미국 작품으로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닌 성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프랑스 작가가 썼다고는 하나 상당히 미국적이다. 주인공을 아예 미국 사람으로 설정을 하고 나오고 있긴 하지만  자국의 작풍도 있을 텐데 굳이 미국적 색채가 짙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영화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 됐으니 작가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점이 몹시도 불쾌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전부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남없이 현대의 작가들은 왜 그리도 문체에 목을매는 것일까? 나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해 본적은 없는데, 프랑스 문학이 갖고 있는 문체의 독특함, 아기자기함, 우아함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면들이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리만치 작가는 자신이 갖게될 명성이 그리웠을까?  

더구나 45세라는 중년의 나이에 남편에 의에 임신중절을 반강요 받았던 줄리아가 남편의 의사와 상관없이 둘째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사라'로 했다는 점에서 그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이건 오버고, 너무 도식적이라고 했다. 난 아직 그 부분까지는 안 읽어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부분을 읽은다면 나도 썩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과연 그것으로 줄리아의 시댁이 그 옛날 사라에게 지었던 죄를 상쇄시킬 수 있을까? 웃기는 일이다. 결국 작가는 진정한 작가라기 보단 하나의 이야기꾼 또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텔러는 아니었을까?  

내가 이 작품을 들어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홀로코스트 중에 가장 하급이라고 얘기했던 건, 이야기가  심층을 뚫지 못하고 자꾸 지엽적인 것만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완독하지 못하였음에도 이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든 작가가 그 이야기의 전체 분량중 3분의 2를 지나는 지점까지도 독자를 말하려고 하는 심층으로 데려다 놓지 않하면 그건 끝까지 읽어도 별로 남는 것이 없는 작품이라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과연 소설 창작에 시나리오 작법이 필요한 것인가 

고백하건데, 나 역시 문학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한다. 예전에 시나리오를 공부했을 때 같이 공부했던 어느 수강생과 이것을 가지고 싸울 뻔한 적도 있었다. 나는 문학 작품을 영화화했을 때 완성도가 높다고 주장했고, 상대는 그런 작품이 어딨냐며 맞섰다. 거기엔 현상 자체의 문제 보단 사람의 성분(?)의 문제가 더 컸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때 나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공부했던 것이 아니라 소설을 위해 공부를 했었고, 녀석은 순수하게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공부를 했으니 나를 얼마나 같지 않게 보았겠는가. 더구나 그렇게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시나리오 작가는 설 자리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도 될 것이다.  녀석으로는 고까웠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의 편가르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별로 옳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영화쪽에서 생각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나는 시나리오를 쓸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건 문학쪽에서 생각해 볼 때 또 달리 생각해 봐야할 문제였다. 과연 나의 은사님 말씀대로 소설 창작에 시나리오 작법이 필요한 것인가?  

나는 감히 얘기하겠는데 소설의 그런 작법이 소설의 후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문학과 시나리오를 나눌 필요가 있냐? 요즘 통섭도 많이하고, 문학과 영화가 같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한다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가 동반 상승하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작가의 태만과 문학의 질적 하락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날의 문학 토론회에 나왔던 사람들 중에 몇몇은, 이 작품에 대해 그냥 오래 생각 안하고 영화를 보듯 휙휙 잘 넘어가서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뭐 꼭 문학이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어떤 사람에겐 가볍게 읽는 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홀로고스트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과연 그렇게 쉽게 써서 쉽게 읽히길 바란다는 게 좀 미안하지 않은가? 겉으로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이라지만, 이것조차도 상업적인 이용 가치의 대상이되진 않았을까 의혹이 남는다. 그렇게 휙휙 넘겨버리고 말 책이고 어차피 영화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편하게 영화를 보지 뭐 때문에 책을 보겠는가? 아무리 한 작품을 소설로 보는 것과 영화로 보는 것이 그맛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 됐다. 지금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일군의 영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문자 보다는 영상을 더 선호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문자로 먹고 사는 작가는 자기 작품이 영화화 됐다고 무조건 조아라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작가는 인간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작가가 영화적 소설 쓰기에 몰두할 때 작가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에 대한 이해다. 왜 작가는 인간을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하면 영화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인간의 오욕칠정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건드려주지 못하는 작품이 부지기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영화적으로 잘 쓴 소설이 정말 영화화될 수 있는 걸까? 당분간은 그럴 수 있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앞으로는 영화적으로 잘 쓴 작품이 영화화 되는 일은 없을 수도 있다. 기왕 문학과 영화가 통섭을 할 것 같으면 문학적으로 잘 쓴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런데 걱정되는 건, 이런 현대의 작가들이 뿌려놓은 씨앗 때문에 이제 막 소설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이 이런 소설이 소설의 전부인 양 알게 될까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말하지만, 현대의 작가들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영화적 소설 쓰기와 교묘하게 바꾼 것이다. 이것은 문학의 세속화이며, 작가의 직무유기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내게 가르쳐 줬던 사람이 두 분 계신데, 하나는 시나리오를 공부할 당시 (나는 두 분의 은사님을 거쳤는데 앞서 말했던 선생님과 후에 공부했던) 영화 감독인 P 감독님과 또 한 분은 박범신 작가다.  P 감독님은 공부하던 5개월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영화에선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고. 

박범신 작가는 작년에 작품 <은교>를 마치고 가졌던 독자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작품에서 오욕칠정을 건드리고 독자로 하여금 거기 빠뜨리고 싶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걸까? 그는 우리나라의 지난 자본주의 50년을 비판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문학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욕칠정을 제대로 다뤄주지 못하고 영화적 글쓰기에만 몰두해서 울거먹으려고 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 화가나는 것이다.  그런 작품에 온갖 마케팅을 위한 미사여구는 또 어떤가? 그것으로 독자에게 책을 사게 만들고, 동시에 눈을 가리게 만든다.  더구나 그런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하다니, 오 마이 갓! 이다. 그렇지 않아도 영화도 좀 아쉽다는 얘기가 들린다.

 소설가에게 성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앞서 나는 미국적인 것 또는 허리우드적인 것을 말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반미주의자인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물론 내가 허리우드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반미주의자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정말 거부해마지 않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상업주의와 승자독식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허리우드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앞서도 이 작품을 두고 말하지 않았는가? 프랑스 문학의 독특함과 우아함을 팔아 먹었다고. 영화 역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엔 샹송이 있는 것처럼 프랑스다운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프랑스 영화감독들은 자국의 영화적 분위기를 살리려 하지 않는다. 뭔가 허리우드적인 것이 섞여 있다. 그래야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프랑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지 상업주의 영화엔 허리우드 작법이 따라 붙는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허리우드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지만 허리우도 같지 않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있으니까. 

물론 소설가는 성직자가 아니다. 소설가는 직업인이고 생활인일뿐이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요즘엔 목사의 목회도 비즈니스처럼 하는 목사도 있다. 목회를 비즈니스로 한다는 말은 목사의 직업에 대해 신성과 거룩함으로 보지 않고 세속적으로 본다는 말이 될 것이다. 목사에게서 거룩함을 볼 수 없는데 소설가에게 그런 말이 타당하기나 한 말인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발자크나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생활인이 맞는 말이긴 하다.  그나마 그건 나은 것이다. 소설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 투잡을 갖거나 소설 쓰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직업엔 인간의 존엄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저리 장황한 제목과 서툰 글로 도배를 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어디 그것이 목사와 소설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정치가에게도 의사에게도 세상의 모든 직업에 해당되는 말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뭐 이런 도덕을 얘기하나 싶기도 할 것이다. 난 단지 인간이 갖는 직업에 이것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상업주의의 가벼움 밖엔 남지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날 사회자는 이 작품을 선택한 여러 많은 이유 중 하나를 해외작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내 작가였다면 말하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해외 작가는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해도 못 알아 들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떠들어도 상관없지 않냐고 해서 웃었다.  그래. 나도 그 말에 힘입어 마음껏 떠들어 본다. 작가가 알아나 듣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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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9-2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참석해보니 즐거우시죠? 저도 모임날 몇 주전까지는 안 읽다가
모임 전날이나 당일에 읽는 경우가 많았어요. ^^;;
아직 <사라의 열쇠>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독서모임 때 언급된 내용과
누님의 생각이 잘 정리하셨어요. 저도 예전에 독서모임 때 당일 내용들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모임이 끝나고 뒷풀이하다보면 금방 까먹게 되더라고요 ^^;;

stella.K 2011-09-26 15:39   좋아요 0 | URL
사람들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뒷풀이가 있어서 좋긴한데
이제부터는 꼬박꼬박 참석하지 않으려고 해.
솔직히 이 책 첨부터 기대없었거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한 책이야.
그런데 묘한 건 이런 책이 나를 자극한다는 거지.
썼지만, 소설에서의 영화적 글쓰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고, 문학은 작가의 안일함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더군.
상업주의 영향도 너무 많이 타고.
내가 문학과 관련있는 사람이었다면 매일 술 마셨을지도 몰라.
문학이 죽었다고 개탄하면서.옛날의 문학이 아니라고.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이런 허섭쓰레기 같은 작품에 너무 좋다고
마케팅하는 거 보면 더 화가난다는 거야.
좋긴 뭐가 좋아? 개뿔.
물론 그런 작품이 아니어도 세상에 읽을 책들은 많아. 특히 고전들.
그거 하나가 위안이야. ㅠㅠ

하늘바람 2011-09-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하고 애 키우니 뒤풀이는 꿈만 같아요
사라의 열쇠라 읽고 다시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stella.K 2011-09-27 14:15   좋아요 0 | URL
이해해요, 하늘바람님.^^

blanca 2011-09-2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제가 영화화를 염두해 둔 소설쓰기에 대해 잠깐 생각했던 적이 있어 이 페이퍼가 정말 반갑네요. 저도 요즘 소설들이 지나치게 서사위주로 마치 무언가를 염두해 둔 것 같아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혹자들은 우리나라 소설들이 서사가 빈곤하다며 더 많은 스토리텔러들이 나와야 한다고 하기도 하던데 저도 스텔라님과 비슷한 의견입니다.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야기한다면 그냥 시나리오를 쓰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stella.K 2011-09-27 19:58   좋아요 0 | URL
이게 문학의 상업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것도 몇몇의 운 좋은 작가나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정말 문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면 그런 거에 연연하지 말고
얼마나 인간성을 회복하는 글을 쓸 것인가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전 정말 작가들의 안일함을 개탄하고 싶어져요.ㅜ
제 생각이 블랑카님 생각과 많이 부합된다고 하니 기뻐요.
짧지않은 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2011-09-27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7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9-2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오로지 혼자만의 영역이고, 영화는 공동의 창작품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어야 하고, 달라야 하는데, 소설가가 그걸 포기해버리는 건 아쉬워요!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도 하고 뭐 그러면 좋겠지만 그런 천재는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아요.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줄 몰랐을 때 <사라의 열쇠>는 관심작이었는데 알고나니 그보다 좋은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겠다 싶었죠. 조목조목 따질 수 없는 그 마음이 스텔라님 마음과도 같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읽지 않고 실망했다 말하는 건 하면 안되는 짓인데....ㅠㅠ

stella.K 2011-09-28 11:11   좋아요 0 | URL
소설가가 그걸 포기하는 순간 자국의 문학은 후퇴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포기는 나 한 사람만의 포기가 아니거든요.
문학은 너무 만만하고 안일하게 보는 요즘 작가들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땅 파 먹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가치있게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짓말 안하잖아요.
그것에 순응하고 길들여 살아야 할 쪽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