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머리 깎으며 겪어낸 현대사의 상처
권력자의 곁에서 권력의 파편에 맞을까
전전긍긍 소시민 다뤄


숫자와 관련된 문제는 그저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처리하는 게 개운하다 믿는다면, 우는 아이에게는 “파출소 가자” 라는 말이 약이라고 생각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말이 ‘나라 망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들렸던 당신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당신’의 아들이나 딸이라면. ‘효자동 이발사’(5월5일 개봉)의 에피소드를 그냥 영화 속 설정이라고 믿기는 힘들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실제와 동일하지 않다’며 역사왜곡 논란을 피하려는 영화 프롤로그의 자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권력은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들과 우리 인생에 개입했는가.‘효자동 이발사’는 때론 슬슬 웃으며, 때론 눈물을 흘리며 그 질문을 던진다.


경무대 근처 효자동에서 ‘성한모 리발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발사 성씨(송강호). 임신한 이발사 김양(문소리)를 “임신 5개월부터는 사람으로 봐야한다”(1954년 사사오입)고 설득해 아이를 낳아 살림을 차렸고, “이박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전수받아 개표소에서 ‘2번’을 찍은 투표용지를 먹어버렸다(1960년 3·15 부정선거). 아들이 태어나는 날엔 최루탄을 맞은 학생들에게 의사선생님으로 오인받았고(1960년 4·19 혁명), “청와대가 어디냐”고 묻는 탱크를 몰고 온 새파란 군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1961년 5·16 쿠데타). 그리고 그는 어느날 대통령 경호실장이 안기부장을 물먹이기 위해 만든 사건에 주연으로 발탁되며 ‘투철한 반공정신’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고 이어 대통령의 이발사가 된다.

성한모의 삶은 권력을 지향(志向)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지양(止揚)하는 편에 가깝다. 이발사가 되어 돌아온 첫날 그는 몸져 누웠고, 대통령의 ‘용안’에 상처를 낼까 두렵기만 하다. 권력자의 곁에서 권력의 파편에 맞을까 걱정하는 것이 ‘없는 자, 못난 자’의 생리다. ‘돈은 보장 못해도 편하게 살 이름’이라는 말에 아이 이름을 ‘낙안’이라고 지은 것은 그가 굵고 짧은 삶 대신 ‘가늘고 긴’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가늘면 끊어지기도 쉬운 법.

유신 직전, 정권은 ‘마루흑병에 걸린 자를 북한잔당과 접촉했을 것으로 본다’-한마디로 설사하면 빨갱이란 뜻-는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만들어낸다. 대통령 이발사로서 충성도를 증명하기 위해 설사하는 아들을 자진해서 파출소에 보낸 그는 속이 다 탄 후 걷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온 아들을 만난다. 그가 권력에 눈초리에 고개 숙이는 동안, 아들은 스스로 설 수 있는 다리를 잃었다. 아이가 울부짖고 피를 흘리는 대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빨간전구를 문 채 전기 고문을 받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함의 극치다. 코믹함을 양념으로 얹어 사실적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이 끔찍하고도 기괴한 이미지를 통해 판타지로 탈바꿈한다. 끔찍한 역사를 우화로 만드는 매력적 가벼움이며, 동시에 심각한 고민을 가볍게 갈무리하려는 회피로도 읽힐, 가장 논쟁적인 장면이다.

전반부엔 코믹하고, 후반부엔 슬픔으로 내파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준 송강호를 비롯해 문소리, 아역 이재응 등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고, 데뷔 감독인 임찬상은 드라마 자체인 현대사의 에피소드 조각을 조화롭게 엮었다. 하지만 비밀스럽고, 웅장한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실망감도 안겨줄 여지가 많다. 특히 성씨네 가족을 위로하는 듯한 결말은 영화의 맥을 빠지게 한다. 10·26 후 대머리 대통령에게 불려가 “각하, 머리가 자라면 다시 오겠습니다”는 말로 자리를 사양하는, 권력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끝나는 방법도 괜찮지 않았을까. 에피소드로 엮은 이야기는 꼼꼼하지만 웅장하지 않고, 역사와 정면승부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은 영화적 매력이자, 상업적 약점으로 보인다.

(박은주기자 zeeny@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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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3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넘 재밌을 것 같아요. 빨리 보고 싶어요. 강릉엔 개봉하는 극장이 쫌 안 좋긴하지만 개봉하는게 어디냐 싶어서 기다리고 있죠.

stella.K 2004-04-3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만 해결되면 강릉도 정말 좋은 곳일텐데요.ㅎㅎ! 오래전에 갔던 정동진 생각나네요.^^

비로그인 2004-04-3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는 왠지 한번 봐줘야할 거 같은 생각이...^^

*^^*에너 2004-04-3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영화 잼있을꺼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