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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말순씨 - Bravo, My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마치 나와 대화하면서 보는 영화 같다. 말하자면, 나의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난 날을 돌아 본다는 건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아쉽고, 그렇다고 꼭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옛 시절은 아릿하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광호는 중학교 1학년이다. 그리고 영화는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를 광호가 접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하지만 광호는 정작 '유고'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물어 보지만 어머니 말순 씨(문소리 분) 역시 그것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한다. 광호는 자신도 모르면서 오히려 어머니가 그것도 모른다고 면박을 준다. 돌이키면 웃기는 상황이지만 확실히 그 상황에선 물어보는 사람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다. 그땐 그럴 수 있다.
광호가 그것을 정작 알게된 건 학교에 가서다. 그렇다. 나도 그날 까만 동복 교복을 입고 학교엘 갔더랬다. 난 그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았고, 그 전날에도 아무런 일 없이 어제 같은 날이 오늘도 시작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그날 아침 난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몇몇 아이들은 훌쩍 거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죽었다는데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로써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 아직 울지 않았었다. 그러자 어느 키 큰 여자아이가 "너도 울지 않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같이 아직 울지 않는 아이들이 또 있단 말인가? 그때 난 꼭 그 아이에게 그렇게 반응할 생각은 없었는데 "울긴 왜 안 울어!"하고 톡 쏘아 붙였다. 무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아이들과 훌쩍거리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땐 미처 몰랐다. 그것이 기나긴 민주화 항쟁의 첫날이란 걸. 영화는 이렇게 처음부터 나의 아릿한 기억들을 하나 하나씩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광호네 반 아이 몇 명이 대통령 서거 날 축구(?)를 했다고 담임한테 단체로 작살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난 그 시절 카톨릭에 막 귀의를 해서 친구 따라 학생회에도 다니곤 했었다. 어느 날, 나를 인도한 친구가 갑자기 성당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날이 토요일쯤 됐던 것 같다. 다음 날, 주일 미사를 위해 약간은 샤프하게 생긴 고등학교 오빠의 지휘로 졸지에 성가 연습을 하게된 것이다. 그 오빠는 나름 진지하게 우리를 이끌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초로의 성당 주임 신부가 갑자기 들이 닦쳐서는 산통을 깨놓은 것이 아닌가? "국장이야. 국장!" 소리를 치면서. 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 신부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국장 때 성가 연습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큰가? 하나님이 큰가? 국장은 국장이고, 크신 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국장이라고 미사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도 세금을 두고 가이사는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신부님은 아마도 성가 연습을 핑계삼아 아이들이 성당에 모여 희희덕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진정 믿음의 행위였는지 아니면 정말 그 신부님 생각대로 성가연습을 핑계삼은 연애작당이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그날 국장이라고 남녀간의 운우지정도 금했을까?
광호와 친구들이 극장에서 성에 관한 행위로 쑥덕거리고 있을 때, 나 역시도 그 시절 어느 날 같은 또래 친구들과 성에 관한 이야기를 읊조렸던 기억이 난다. 뭔가 맞지 않는 그 알량한 성지식으로 말이다. 그때 내 몸은 얼마나 후끈거리고 오금이 저렸던지.
광호와 친구들이 봤던 영화는 왕년의 청춘스타 정윤희, 신성일이 나오는 낮 뜨거운 영화다. 그 시절 금지된 영화를 보는 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그들은 나름 뜨거운 가슴으로 봤겠지만, 난 정윤희란 배우가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그런 벗는 영화에 나온다는 게 마땅치 않았다. 신성일도 잘 생겼다기 보단 느끼한 늑대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그들이 봤던 첫 영화였을까? 그것은 알 길이 없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챔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같았으면 결코 극장에서는 보지 않았을 영화다. 스포츠(권투) 영화고, 영화는 다분히 최루성이다. 자기 아빠가 권투 하다가 죽었다고 저 꼬마 어찌나 우는 연기가 사실적이던지 나도 울컥했다. 보고나서 이래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구나 했다.
지금은 게을러진 건지, 영화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해져서 그런지 웬만해선 극장에 잘 가지 않는다.
영화는 또, 광호네 아랫방에 세 들어 살던 은숙이(윤진서) 마당에서 머리 감을 때 광호가 수건을 가져다 주면서 은숙이 가슴을 넘겨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남자아이들만 여체를 탐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 아이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남자의 육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땐가? 나는 학원에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친구와 친구 엄마랑 학원을 쫓아 간 적이 있었다. 학원에 뭔가 문의할게 있다고 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슨 짖궃은 발동이 났는지 그때 원장인지? 상담실장인지 하는 남자의 양복 입은 사타구니를 빤히 쳐다 볼 생각을 했다. 딴뜻은 없었고,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봐도 그는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면 그가 아는 것이니 마치 난 유령놀이라도 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내가 그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마음껏 봐주고 나왔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영화는 나의 잃어버린 옛 시간을 찾도록 해 주었고 놀라우리만치 70년대를 정교하게 복원해 내고 있었다. 빨강과 녹색으로 대비되는 거리에 우뚝 서있는 우체통. 당시의 만만한 간식거리로 누룽지를 기름에 튀겨 설탕을 솔솔 뿌린 누룽지 과자를 쟁반에 바쳐들고 은숙의 방에서 함께 만화책을 보던 광호. 당시 금성사에서 처음 나온 탈수기가 따로 달린 세탁기. '아모레'와 '쥬단학'으로 대별되는 방문판매 하던 묵직한 직사각형 가방. 난 그 가방을 볼 때마다 하도 무겁게 생겨서 저걸 어떻게 여자들이 들고 다닐까 어린 마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문판매는 그렇게 화장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난, 그 시절 우리집을 방문했던 보따리 장수들로부터 사과도 사고, 미역이나 다시마 심지어 내가 입을 노랑 나팔바지를 샀던 엄마를 기억한다.
광호는 은숙이나 친구 엄마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는데 왜 엄마에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느냐고 짜증을 부린다. 나도 한때 그걸 아쉬워 했던 적이 있었다. 왜 우리 엄마한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걸까? 세월이 흘러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쯤이 돼서야 알았다. 냄새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마도 남들은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러나 늘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에게선 그것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광호는 애꿎게도 엄마에게서나는 화장품 냄새를 싫어 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어린 시절 집앞 시장을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나가는 엄마를 보면서 야릇한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언제부턴가 몇 십년 전부터 시장에 나가실 때 화장을 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은밀한 의문 같은 건 갖지 않는 건데 그랬다. 이렇게 우리 엄마는 무식하고 평범해 미칠 것 같고, 남의 엄마는 왜 그토록 근사해 보이는 걸까? 영화는 그 허를 잘도 찔러 준다.
이 영화에서 발견한 건 문소리의 재발견이다. 영화에선 어쩌면 그리도 부지런하면서도 평범한 아줌마 역활을 잘 해 내던지! 동네 아줌마를 집에 불러다 놓고 집에서 한판 춤판이 벌어졌을 때 건강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맞아, 저게 바로 아줌마 기운이라는 거야! 내남 가리지 않고 스스럼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아줌마. 남들은 그걸 오지랖이라고 하지만 그건 바로 건강한 아줌마 기운이라는 것을 감독은 잘 살려냈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시간이 흐르면 곧 영원속에 박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해 보이는 어머니 말순 씨가 폐결핵으로 저 세상으로 간다. 그뿐인가? 당시 유행했던 '행운의 편지'는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기라도 하듯 광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씩 떠나가게 만든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나와 관계 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틸컷의 저 조그만 여자아이 아직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옷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엄마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엄마에게서 좋은 냄새가 안 난다고 짜증을 부렸던 광호의 대칭일 터. 정말 가슴 찡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언제가 때가 되면 엄마를 보내 드려야 할 텐데 그 시간이 아득하다.
물론 가끔 영화가 오버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말순 씨가 폐결핵으로 죽는다. 영화의 설정은 70년대 말이다. 그때쯤이면 폐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법도 하다. 또한 요즘엔 다운증후군이라고 해서 보건소에서 사람을 잡아 가지는 않는데, 과연 그 시절 과연 그런 사람을 잡아가고 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이 영화, 나의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슴 따뜻한 영화다. 스토리가 정말 그 시절에 사춘기를 보냈을 누군가의 추억담을 듣는 것 같다. 누구의 이야길까? 작가? 감독? 아니면 제3의 누구? 아무튼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