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발간된 <책 읽는 뇌> 의 저자는,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으며,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인 발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말에 공감한다.  

초등학교를 막 진학해서 첫 방학을 맞았을 때 나는 '생활통지표'라는 걸 처음 받아봤다. 그때 나의 체육이란 과목에 '가'를 맞은 걸 보고 충격을 먹었다. 최하점수를 맞은 것도 맞은거지만 이제부터 나의 학교생활이 이런 식으로 점수가 매겨지는구나라는 사실이 좀 더 충격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때 담임 선생님은 나의 학교생활 전반을 기록하는란에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로 기록했고 나는 그것으로인해 언니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뭐 체육이야 워낙에 운동신경이 없으니 가를 받아도 할 말은 없다고 쳐도 도대체 담임 선생님은 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쓰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느냐면,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도 화장실 갈 일 없으면 그 막간을 이용해 읽기도 했고, 점심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중학교 올라와서는 보통 4교시 끝나고 먹는 점심을 3교시 끝나고 후딱 먹어치운 후 점심 시간을 온통 책 읽는 시간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이 온전히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는 아인줄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셨더라면 그 셍활통지표에 결코 그렇게 쓰시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대신 책을 늦게 읽는 아이라고 쓰셨다면 말이되지만. 그래도 나의 언니는 여전히 킥킥대고 웃었을까? 하지만 책을 늦게 읽는다고 학습 부진아는 아니지 않는가? 그 정도 가지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이 세상은 너무 가혹할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즐겨봤던 책은 계림문고라는 아동용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이 책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았는데 아버지께 그 도톰하고 묵직한 문학전집을 사 달라는 말을 차마 못해 낱권으로 이 책들을 사 모았다. 한 권당 350원인가 했는데 3권을 한꺼번에 사면 그 문방구 주인 부부가 천원에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난 내 앞에 앉은 남자 아이를 좀 좋아했는데, 마침 그때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추리소설 읽기가 유행이었다. 그때 어떤 출판산지 모르겠는데 어린이 문고용으로 홈즈나 루팡 시리즈를 15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얇게 만들어 나온 책이 유행이었다. 난 호기심에 그 책을 몇 권 사서 읽긴 했는데 추리물은 그다지 나에겐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남자 아이의 관심을 끌어 보겠다고 책을 책상 바닥에 놓고 읽지 않고 일부러 코높이 가까이 들고 읽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만에 그 아이는 나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치더니 그 책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아싸!'하며 기회가 온 것을 내심 기뻐했지만 나는 짐짓 무관심한 척, "그래? 알았어. 다 읽으면 빌려줄게."했다. 일단 관심을 끄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녀석 마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한테 있었음이 들어나 단칼에 내 마음에서 녀석을 도려내버리고 말았다. '난 너 같은 바랑둥이는 싫어!'하며 말이다. 그후 나는 다시는 책으로 사람의 마음을 후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스티븐 킹의 <캐리>란 동명 영화가 나왔고 연이어 책도 출간이 되었다.  

요즘엔 마케팅을 잘해선지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덩달아 그 작품의 원작 소설도 뜨지만, 당시는 그런 것들의 기반이 워낙에 약해 영화는 나름 성공했던 것 같은데 책은 그다지 재미를 못 봤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비단 <캐리>의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영화가 뜨면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책이 재미있으면 영화는 재미가 없다는 속설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영화로 뜬 작품이 책으로는 안 뜰 수가 있단 말인가?  

좀 웃긴 건, 나는 <캐리>란 영화는 보지 않았으면서 책은 몰래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당시 나는 어려서 그 책이 명목상 금서 목록이긴 했지만, 그 책을 그렇게 들고 다니면 아이들 사이에서 나름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물론 공포물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유는 따로있었다. 즉 거기서 보면 주인공 캐리가 동급생 여자 아이들 보다 초경을 늦게 시작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의 묘한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동시에여자 아이들은 불편했던 까닭이다. 여자 아이들은 그런 책을 태연하게 보고 있는 나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감추긴 했지만 요즘 시쳇말로 그까이 꺼 가지고 뭘 그러나 아이들이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곧 그 책을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엎어버리고 말았다. 왜냐구? 당연 재미없었으니까다.  

번역이 잘 안된 건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해도 아직 그런 걸 소화해낼 그릇이 못되었는지 암튼 완독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영화의 한장면에서 따옴직한 돼지피를 뒤집어 쓴 캐리의 모습을 앞표지에 실은 그 책은 그렇게 아이들에겐 나름 신비한 끌림을 줬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후 나는 여전히 다른 책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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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아마 저 오른쪽의 컷을 책표지로 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저주 받을 세로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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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읽었던 책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라즈니쉬의 <자기로부터의 혁명>같은 어려운 책에 도전해 보기도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확실히 지적 허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나는 동네 단골 주인 아저씨한테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저술가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사람이 쓴 책이 있냐고 물어 아저씨를 당황하게도 했고,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겠다고 하면 속으로 왜 이런 책도 번역되지 않았냐며 우리나라 출판의 낙후성을 비난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다는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책들은 지금 읽는다고 해도 아찔하게 어려운 책들이다. 오죽했으면 니체의 책 가지고 농짓거리가 다 생겼을까? "자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이 책은 정말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책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 시절 난 까만 건 글자요 하얀건 종이인 이 두 권의 책을 과감하게 첫 페이지 첫 글자로부터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글자까지 꾸역꾸역 읽어냈다. 왜 덮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재밌다던 스티븐 킹의 '캐리'도 덮은 내가 그때는 책 읽기의 괴로움을 몸소 감내하며 꾸역꾸역 읽었던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책을 샀을 당시엔 울적해서 샀는데 집에와 막상 읽으려고하니 도저히 못 읽겠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에 그책을 다시 손에 들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쿠센버그란 독일작가의 <바보는 웃지 않는다2>였다. 그야말로 정말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바보일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웃을 수도 없었다. 그 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책을 샀던 서점으로 갔지만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책은 절판이되고 그책을 출판했던 출판사조차 없어지고난 후였다.     

그러고 보니 과연 지금까지의 나의 독서 이력을 볼 때 내가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알고보면 이 책은 이래서 못 읽고, 저 책은 저래서 못 읽었다. 또한 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안 읽고 못 읽는 책 역시 많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기를 놓쳐서 못 읽게 되는 경우도 읽다. 그러니 나는 정말로 책 읽기를 좋아하는가? 고려해 봐야할 일이다.  

또 책 중엔 남들은 좋다는데 나는 맞지 않는 책도 있다. 사람도 자기에게 맞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책도 사람이 쓰는 것만큼 궁합이 맞는 책이 따로 있게 마련인 것 같다. 그럴 때 갖는 마음은 여러 갈래다. 어떤 경우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책을 좋다고할 수 있단 말인가? 분개할 때도 있고, 어떤 땐 남들은 능히 읽는 책을 왜 나는 못 읽을까 자책을 하게되는 책도 있다.  

결국 그러다 보니 좀 어렵거나 나한테 맞지 않는다 싶은 책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배짱이 생겼다. 그런 책은 읽어봐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뿐만 아니라 시간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읽을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맞지도 이해도 못할 책 가지고 씨름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편독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은 어느 하나에 길이 들면 그것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내가 못 읽고 안 읽는 책도 있지만 출판된 책들을 보다보면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책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책은 이건 좀 아닌데 싶은데도 속아서 읽게 되는 책도 있다. 그러면 좀 억울한 생각도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보면 알면서 속아주는 관계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에 비하면 책에 속아 주는 것쯤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게도 된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책에 대한 집중도 떨어졌으며 그렇게 10분 15분의 막간을 이용해 책을 읽는 열정도 없어졌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책이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아져서일까? 홍수 중 가뭄이랬다고 그렇게 많은 책들 중 만족된 독서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예를들어 5권을 읽었다면 그중 만족된 독서를 했다고 생각되는 책은 한 권 정도나 될까?  

이렇게 책을 읽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즐거운 일인 동시에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시지프의 후예들일 거라는 것이다. 나는 방금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몇 시간 내지 하루가 지나서 금방 또 다른 책을 펼쳐들거란 점에서.  

그 똑같이 되풀이되는 행위속에 무엇이 남을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책을 좀 더 사랑하자. 나를 좀 더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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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라딘이 나를 버렸다.
    from stella09님의 서재 2009-09-05 13:29 
    http://blog.aladdin.co.kr/trackback/stella09/3063747  알라딘이 나를 버렸다. 이 페이퍼 정말 열심히 썼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단 말인가?ㅠ.ㅠ   
 
 
hnine 2009-08-3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글 중에 나오는 책들이 저도 대부분 아는 책이어서 반가왔어요.
연노란 색 표지의 계림문고, 낱권으로 팔던 책이었지요. 저도 기억해요.
그 추리소설 시리즈를 내던 출판사 이름은 저도 가물가물하네요. 저도 무척 좋아했는데.
혹시 그것도 계림 출판사 아니었던가요? 까만 색 표지의.

stella.K 2009-08-31 11: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 추리소설 계림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긴한데
확실할까 싶어 밝히지 못했답니다.
나이가 들으니 옛날 생각 참 많이나요. 그죠?^^

헌책방IC 2009-08-30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술을 많이 마시면 그 다음날 많이 괴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시지 않으려니, 또 마시고 싶은 게 술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마시면 그 다음날 또 괴롭고. 그래도 또 마시고. 왜. 좋으니까.ㅎㅎ
글 곳곳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실례 좀 했습니다.^^

stella.K 2009-08-31 11:15   좋아요 0 | URL
ㅎㅎ 앞으론 술 드지 마시고 책 읽으세요.^^

하늘바람 2009-08-3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많이 공감이 가 웃으면서 읽었어요. 왜 나이들면 집중도가 떨어질까요 제가 요즘 그러네요

stella.K 2009-08-31 11:25   좋아요 0 | URL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할걸요?ㅎ 그래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 주는게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