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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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오래전, 앞으로 소설을 쓸 사람은 필수로 시나리오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던 나의 사부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지만 난 그때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사부는 시작은 소설로 시작했다 후에 시나리오로 전향하신 분이셨는데 그냥 하시는 말씀이려니 했다. 소설은 소설처럼 쓰고,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처럼 쓰는 거지 뭘 새삼스럽게 그런가 싶었다. 그렇다면 소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형태나 의미가 퇴색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게다가 사부가 말씀하시는 건 상업화된 허리우드 시나리오를 가리키는 것일 텐데, 난 허리우드 영화에 대해 약간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런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사부가 말했던 그 전범(典範)을 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나의 사부가 이긴 것이다. 


물론 내 멋대로의 생각이겠지만, 내가 사부에게서 공부했을 때가 2008년쯤 되었던 때다. 그 시절엔 이렇게 소설을 쓰는 작가가 없었다. 그나마 이 작품이 2012년에 나왔으니 2010년대나 들어서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기적으로도 나의 사부의 말을 어느 정도 부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건데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고래>가 2005년도 작품이며, 작가는 이미 그 작품에서 그런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못했다.) 유구무언이다.                   


물론 굳이 소설을 영화처럼 쓰지 않더라도 훌륭한 소설은 많고, 사부의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소설을 쓸 소설가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영화적 글 쓰기가 뭔지 그 전범을 본 이상 나에겐 개안에 가까운 경험임엔 틀림없다.  


사실 영화적 글 쓰기라는 건 설명하기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소설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소설을 시나리오의 기법으로 쓴다는 말이다. 


그때 나의 사부는 말씀하셨다. 시나리오 쓰기가 소설 쓰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다고. 나는 그 말도 역시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니 사부의 말씀이 완전 이해가 갔다. 흔히 침대를 두고 과학이라고 하는데 영화야 말로 과학이다. 즉 쓸데없이 존재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처음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시간이 갈수록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뭐 일종의 추리 기법과도 비슷한데 이것이 곧 시나리오다. 


그런데 그 형식을 소설로 썼다면 이게 또 단순히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는 그 영화의 설계도란 말이 있다. 그래서 작가 특유의 문체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까.) 그냥 누구라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만 쓰면 된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를 소설로 옮긴다고 생각해 보라. 무엇보다 작가 특유의 문체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또한 만만한 작업은 아닐 터. 소설 쓰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어려운 작업을 천명관 작가는 자꾸 해냈다. 한때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판을 굴렀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구나 싶다. 


물론 앞서 나의 사부가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해서 시나리오 작가 모두 소설 쓰는데 유리할 거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가 소설을 쓰는 건 또 다른 문제고, 새롭게 공부하고 개척한다는 뜻이겠구나를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단지 자신이 익힌 시나리오 작법이 이롭게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미안한 얘기지만, 기존의 소설가들은 서사 보단 문체에 집중하고, 주인공 외에 나머지 등장인물은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더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작품을 보면 주인공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라이프 스토리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는 새끼 꼬듯,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능청스럽게 잘도 엮는다. 배우 송강호가 영화 <기생충>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 역시 계획이 다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사라진다. 그러니 시나리오 쓰기보다 소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단역은 있을지 몰라도 하찮게 존재하는 인물은 없다고 한다. 하다못해 엑스트라도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보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어떤 인물일지라도 언제 나타났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합리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천명관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내가 기억하기론 도치란 인물이 초반에 나왔다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 인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도치는 그렇게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캐릭터고, 어떻게 최후를 맞고 이야기 바깥으로 사라지는가 확실하게 보여 준다. 또한 토끼는? 마 사장은? 언제 나타나도 평범하게 사라지는지 법이 없다. 


그런 만큼 인물 하나하나도 그냥 대충이 없다. 예를 들면, 오순의 경우도 그렇다. 얼핏 그 이름만 보면 촌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오순이야말로 전갈과 같은 여자다. 그런데 비해 마 사장은 표독스럽지만 내면의 연약함을 가지고 쓸쓸히 죽어간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등장인물의 끝판왕은 역시 주인공 권도훈이다. 어찌 보면 가장 불온하고 연약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인물처럼 외유내강형의 인물도 없다. 또 주인공답게 최후까지 살아남아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한다. 특이한 건 권도훈은 말이 없다. 그리고 정중동의 사람으로 죽음도 그를 비켜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어떻게 이런 인물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놀라운 캐릭터다.  


게다가 이소룡을 추종하고, 원정이란 여자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현대사(1권에서)와 영화사(2권)를 아우르고,  80년대 삼청교육대를 다녀오고, 살인자로 누명을 쓰고 도피 생활을 하지만 오로지 원정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영어의 몸이 되며, 결국 그의 바람대로 나이 들어 사랑을 이루는 고진감래, 사필귀정의 인물이다. 


그런 걸 보면 예전에 보았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기도 한다. 포레스트가 지능이 떨어지는 인물인지만 미국의 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그가 있었고, 무엇보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인물 아닌가. 모르긴 해도 작가는 이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어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도훈이 끝내 사랑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사랑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우직한 바보만이 사랑을 이루는구나 하면서 이내 뭉클하기까지 했다. (최고의 사랑엔 최고의 서비스만을 바라지 않는가.) 그러면서 사람이 여러 가지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만이라도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믿음과 사랑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불신의 시대에 믿음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 세대는 사랑이 가능한가?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시지 않으셨나. 그렇게 묻는다는 건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통탄하셨기 때문이고, 있기를 바라서가 아닌가. 사랑과 믿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겠는가. 이 이야기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 도훈이 있을 것만 같고, 없다면 꼭 있기를 바라게 된다. 


천명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그런 말을 한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런데도 왜 구원 없는 실패담을 읽는 것일까?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불행과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을 꿈꾸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읽는 내내 어린 왕자를 탄생시키고 별이 된 생텍쥐페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는 생텍쥐페리의 후예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지난 몇 달간 개인적인 일로 꿀꿀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정말 즐거웠고 행복했다. (난 만화책은 사람을 웃길 수 있어도 소설이 이렇게 웃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작가들은 독자들이 좋은 책을 읽으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험하고도 지루한 세상에서 재밌는 책을 읽을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재밌고 훌륭한 이야기가 왜 지금껏 영화화되지 않았던 건지 의아스럽다. 비록 부커스상 후보에서 만족해야 했지만 그런 권위 있는 상의 후보는 또 아무나 하겠는가. 이 기회에 주목을 받았으니 그의 작품이 영화화될 날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이 작품은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텍스트가 될만하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겠다. 

작가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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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3-06-27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요즘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영화 관련 단어 중에 <각색>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설을 시나리오화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예전에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각색을 잘 했던 분이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 작가입니다.
김승옥 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 영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
작가 스스로 나중에는 영화화를 전제로 소설을 쓰시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소설 쓰고 각색하다가 스스로 영화감독도 했지요.
또 다른 인물로 소설가 최인호씨도 같은 경로로
소설가, 각색 그리고 영화감독까지 했구요.
스텔라님이 쓴 천명관의 소설 리뷰가 이 책을 다시 회생시킨 글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stella.K 2023-06-27 09:49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저도 그 두분에 대해선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근데 워낙 오래된 분들이라 떠올리기가 쉽지않았네요. 그리고 굳이 말하면 두분은 소설가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분들이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간간히 썼던 반면 천명관은 아예 소설로 전향했다는 거죠. 행로도 소설에서 시나리오로 나갈 거 같지만 이분은 시나리오에서 소설로 갈아탔다는 거죠. 리뷰에서도 밝혔지만 그건 또 다른 공부고 작업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이 소설 정말 재밌었습니다.
참고로 니르바나님께만 말씀 드리는건데 그의 소설집은 별로예요. ㅋ

책읽는나무 2023-06-27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천명관 작가의 소설 중 유일하게 읽었었는데 아주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고래>도 재밌으려나요?
옛날에 독자들 평이 좋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스텔라 님 리뷰를 읽으면서 브루스리 삼촌은 확실히 영화에 나올법한 캐릭터 같단 생각이 듭니다. 소설도 영화 보듯 장면들이 생생했던 것도 같구요. 시나리오 작가가 됐었어도 잘 풀렸으려나요?^^
예전엔 시나리오 같은 소설들이 굉장히 재밌게 생각되어지긴 했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었는지? 잔잔한 인생 이야기가 왠지 더 끌리고 감동스럽게 느껴져 소설 취향이 바뀌어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고래>는 꼭 읽어보고 싶네요.
책장에 사다 놓은지가 몇 년째인지????
책등이랑 책장이 바래져 있네요.ㅋㅋㅋ

stella.K 2023-06-27 19:10   좋아요 1 | URL
ㅎㅎ 이마도 천명관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는 이미 시나리오를 썼다 소설을 쓰는 거거든요.
작품도 여러 권 되고. 나이들면 영화 감독도 영화판을 떠나는데
시나리오 작가라고 안 떠나겠어요?
모르긴 해도 천명관 작가는 소설로 전향해서 성공한 작가는 아닌가 싶어요.
장르소설에선 이렇게 쓰는 작가들이 많을 거예요. 특히 미국 소설가들.
근데 우리나라 순수 문학에서 이렇게 쓰는 작가는 드물지 않나 싶어요.
없진 않겠지만 대중에 알려지기는 쉽지 않겠죠.
저도 <고래>를 얼마 전 적립금 탈탈 털어서 중고샵에서 샀는데
지금 전 그의 소설집을 읽고 있는데 그건 그닥 재미가 있진 않더군요.
그러다 보니 고래는 또 재밌을까? 은근 걱정중이어요.
외국 사람들 우리나라 작품 이상하게 쓴 거 좋아하잖아요.ㅎ
근데 얼마 전 레삭매냐님 리뷰 읽어보니 재밌다고 하셔서 읽어 볼 생각입니다.
천명관 작가는 아마도 30년 안에 무리나라 현대 문학사에 이름을 올릴만한
작가는 아닐까 싶어요. 계속 글을 써 줬으면 좋겠어요.^^

페크pek0501 2023-06-29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하여 천명관 작가의 시대가 탄생하게 되나 봅니다. 신문에 부커상 후보로 나올 때부터 심상치 않다 했어요. 재밌는 소설이라고 하시니 관심이 가는군요.
위즈덤하우스 책이 잘 팔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장사를 잘하는 출판사랄까, 그런 느낌이에요.
책 기획에 공을 많이 들일 것 같은 출판사, 게다가 작가를 보는 안목도 있고 그런 출판사 같아요.
이 책이 4백 쪽이 넘더군요. 두 권을 합하면 8백 쪽이 넘겠군요. 올 여름 더위를 잊으시고 지내시게 만들 소설 같군요. 저도 올 여름은 더위를 잊을 만한 책을 몇 권 쌓아 놨어요. 그나마 책에 빠져 이 더운 여름을 버텨 보려 합니다. 리뷰 잘 읽었어요. 좋군요.^^

stella.K 2023-06-29 19:4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예담이 위즈덤 하우스의 임프린트였네요.
근데 ‘나의 삼촌- ‘도 그렇고 ‘고령화 가족‘은 표지가
별로 맘에 들지 않더군요.
고령화 가족‘만이라도 리커버로 다시 나와줬으면 좋겠어요.ㅎ
전 요즘 그의 소설집 읽고 있는데 앞에 두 편 정도만 좋고
내내 이거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비행기‘란 중편소설은
괜찮더군요. 여성 심리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하며 읽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건 인정해야겠더군요.
장편이긴 하지만 금방 재밌게 읽을 수 있어요.
나중에 함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