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2권 초반부에 보면,  주인공 권도운이 짝사랑하는 연인이자 에로 배우인 원정이 유 회장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오밤중에 술기운을 빌어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가 그의 똘마니로부터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딴 이유는 없고, 원정이 자꾸 유 회장에게 전화해 귀찮게 구니 정신 차리게 해 준다는 명목이다.


 옛 애인이든 그의 똘마니든 뭐든 지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봉변을 당하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도운이 일찍이 이소룡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어설피 배운 무술을 연마한 몸으로 무사히 악당의 (자신의 애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사람은 다 악당이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손아귀에서 벗어나 둘은 원정의 오피스텔로 간다.


 사실 그때 도운은 70년대 무술영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충무로 영화판의 으악새 배우(주인공의 옆발차기 한 대로도 으악하며 죽어가는 엑스트라 배우)로 자리를 잡느냐 못 잡느냐 하던 때이기도 했다. 즉 몸을 낮추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지내야 하는 때란 말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원정의 옛 애인인 유 사장은 영화판을 접수한 거물급 인사고 따라서 그의 똘마니들을 건드려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건드려서 좋은 건지 나쁜지는 나중 일이고 당장은 그의 똘마니들에게 원정을 구했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 원정이 봉변을 당할 때 입은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버림받은 설움 때문인지 눈물을 터트린다. 그러자 도운이 말없이 으악새 배우들의 필수품인 안티푸라민을 조용히 꺼내 원정의 얼굴에 발라준다. 원정이 처음엔 이를 거부한다. 그 특유의 냄새 때문에. 그러자 도운이 멍든덴 최고라며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발라준다.  


 영화로 봤다면 어디서 본듯한 클리셰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으니 그도 나쁘지 않다. 더구나 전혀 멋지지 않은 도운이 그렇게 심각하고도 섬세하게 나오니 분위기가 웃기면서도 묘하게 젖어든다. 


그런데 문득 안티푸라민의 용도가 궁금해졌다. 멍든데 최고라고...?

안티푸라민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6, 70년대 가정상비약으로 이 약을 비치해 놓지 않은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의 용도는 모기에 물렸거나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빨간약 대신 바르는 거 아닌가? 하지만 새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검색에 들어갔다. 그 결과 정확히는 소염진통제의 일종이었다. 그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이렇게 관심이 생긴 것도 관절이나 근육이 예전만 같지 않으니 그쪽 계통에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예전에 팔팔한 근육을 가졌을 때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안티푸라민의 개발 일화도 있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회장이 아내 호미리 씨가 유한양행 건물 2층에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국에는 연고의 개념이 없어서 아이들의 타박상이나 염좌상(흔히 삐끗하거나 접질렸을 때)에 마땅히 발라 줄 약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호미리 씨가 당시 막 신설된 유한양행 학술과에 건의해서 만든 약이 안티푸라민이라고 한다.  참고로 안티푸라민은 유한양행에서 최초로 자체 개발한 약품으로 올해가 100주년을 맞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약이다. 


나는 안티푸라민이 그저 미국의 바셀린을 본떠 만든 약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셀린과 안티푸라민은 좀 다르다. 바셀린은 한마디로 화상 같은 피부 외상 치료에 주로 사용되는 약이다. 


안티푸라민은 그 이름도 적절해 보이는데, 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와 염증을 뜻하는 인플래임(inflame)을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 이게 또 군부대에도 들어간다고도 하니 역시 이건 어린아이들을 위한 약만은 아니었다. 군부대에 들어갈 정도라면 확실히 실제 으악새 배우들도 썼을 법하겠다.  


그런데 안티푸라민은 그렇게 6, 70년대는 대세였지만 이후로 비슷한 류의 약들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급격하게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난 정말 이 약이 이제 안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까지 손흥민을 앞세워 CF가 나오기도 했으니 우리가 기억을 못 하고 있을 뿐 그건 항상 있어왔다. 아무리 만병통치약이라고도 세월을 이기는 약은 없는가 보다. 


그런 안티푸라민을 도운이 떨리는 손으로 원정에게 발라줬다니 확실히 상대의 마음을 훔치고도 남았을 것 같다. 게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시크하게 한마디 한다.


- 그리고 보니 많이 닮았네요.

- 뭐가?

- 여기 그림에 있는 여자 하고요.

그러면서 도운은 연고 뚜껑을 들어 원정에게 보여준다.

기억하는가? 버드나무 상표 아래 간호사 캡을 쓴 여자의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무엇을 본들 그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평소 쟁반같이 둥근달에도 그 사람이 보이는 법이다.  

그러자 원정은 도훈에게 평소 숙맥인 줄 알았더니 아부하는 재주도 있다며 그를 춰준다.

이쯤 되면 안티푸라민은 누구에겐 사랑이겠다. 도운이 발라주는 안티푸라민과 함께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고로 안티푸라민에 얽힌 내 어린 시절 속된 추억 하나를 얘기하자면, 난 그것을 립글로스 대용으로 사용했다. 물론 그건 입술 튼데 바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절 당대를 주름잡았던 여자 가수들이 어느 날 TV에 나왔는데 입술에 무엇을 발랐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러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어찌나 육감적이던지 나도 발라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게 뭔지도 몰랐고 설혹 알았다 해도 엄마가 어린 나에게 그런 걸 사 줄리 없다. 화장품의 일종일 테니. 꿩 대신 닭이라고 안티푸라민이라도 바르고 나는 남이 안 보는대서 하춘화나 정훈희를 흉내 내며 나만의 백일몽을 꿈꿨다. 

하지만 역시 원정의 말처럼 안티푸라민의 냄새는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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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7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안티푸라민보다도 호랑이
지름이 ... ㅋㅋㅋ

브루스 리, 1권은 읽은 것
같은데 2권도 읽었는지 가
물가물하네요.

stella.K 2023-06-17 10:29   좋아요 1 | URL
ㅎㅎ 매냐님 그럴리가요. 6,7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안티푸라민 세대입니다. 우리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쓰셨겠죠.ㅋ
2권은 1권에 비해 재미가 좀 없긴하지만 이야기의 힘은 전혀 빠지지 않더군요. 이만하면 가히 괴물이다 싶어요. 천명관 작가.

서곡 2023-06-17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술에 바세린 추천드립니다 ㅎㅎ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stella.K 2023-06-17 11:21   좋아요 1 | URL
립크린이 없을 때는요. ㅎㅎ 고맙습니다. 서곡님도 좋은 주말보내시기 바랍니다.^^

기억의집 2023-06-17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세대의 안티푸라민 대단했지요. 바세린과 더불어~ 저도 요즘 무릎 관절이 안 좋아 병원 다녀요. 나이가 들긴 드나봐요. 나이 드니 관절이 힘들어 합니다!!

stella.K 2023-06-17 20:55   좋아요 0 | URL
백번 이해합니다. 저도 몇년 전 아파서 병원에 다녀댔죠.
좀 서글픈 생각도 드는데 아프니까 관절에 좋은 약이 뭔가 자꾸
찾아보게 되요. 그러다보니 새롭게 알게 된데 안티푸라민이구요.
몸조심해요. 내 몸 내가 위해줘야지 누가 위해주겠습니까?ㅠ

니르바나 2023-06-17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책이야기를 보니 천명관의 이 소설이 더 재미있게 보이네요.
안티푸라민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끔씩 멘소래담 로션과 번갈아요.

stella.K 2023-06-17 21:08   좋아요 1 | URL
니르바나님 젤 첫번째로 댓글을 쓰실 뻔하지 않았나요?
무슨 얘긴지 좀 궁금했는데...ㅎㅎ
북풀에는 댓글이 완전히 지워지지가 않고 흔적이 남거든요.^^

니르바나님은 아직도 쓰시는군요.
저는 몇년 전까지만해도 멘소레담 썼는데 그것 보다 더 강력하고
손에 약 묻히지 않고 바를 수 있는 젤형으로된 파스를 쓰고 있죠.
붙이는 파스는 피부가 가려워서요.
제가 어느새 이렇게 되버렸답니다. ㅠㅋ

아, 저 이제부터 천명관 팬되기로 했습니다.
오늘 2권 다 읽었는데 재미에 뭉클함까지
갠적으로 올해의 부커상에 감사해요.
천 작가 부커상 후보되지 않았다면 이 책 언제 읽었을지 몰랐어요.ㅋㅋ

2023-06-1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8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