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 보다 : 겨울 2021 ㅣ 소설 보다
김멜라.남현정.이미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평점 :
절판
우선 마지막 수록작, 이미상의 <이중 작가 초롱>을 보니 나의 글공부 시절이 생각났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작가가 되기 위한 초롱의 좌충우돌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보이는데, 특히 습작생에서 초년생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역시 습작생 시절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절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동기생들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고 나름 끈끈하고 분위기도 대체로 좋다.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초롱이 모임에서 보이콧을 당하는 장면에서 오래전 시나리오를 공부했을 때 동기생 하나가 남의 작품을 자신이 쓴 것인 양 해서 결국 제명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표절 사건으로 시끄러웠는데 어쩌자고 그런 일이 코 앞에서 벌어졌는지 좀 놀라웠다. 하지만 난 슬쩍 그렇게까지 한 그 친구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 친구는 같은 동기생들 중에 나름 충무로 입성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친구였다. 뭐 그만큼 뭔가가 절실하지 않았을까.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착각하면서 까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 비슷한.
학원에서도 제명당했으니 그 친구는 이제 이쪽 방면으론 발도 못 부치지 않을까 싶지만 또 모를 일이다. 물론 그 친구의 행동은 정당한 건 아니지만 그것이 글 하나 잘 써 보겠다는 영혼의 몸부림이라면 이 친구가 바른 정신을 가졌을 때 누구보다 뛰어난 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솔직히 자신의 재능이 뭔지도 모르면서 한 번 해 볼까 하다 조금만 힘들어지면 때려치우는 비리비리한 영혼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영원히 올바른 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지만.
소설에도 합평회에 대한 부조리함을 토로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정말 그놈의 합평회라는 건 부조리한 측면이 있긴 하다. 하면 내 작품이 뭐가 문제인지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좋긴 한데 하다 보면 작품을 평가하는 건지 아니면 글쓴이의 재능이나 심지어 인격까지 모독당할 수도 있다. 또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나는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을 못한다. 난 공부하면서 소위 시쳇말로 딱 한 번 까여봤다. 그러면 내가 글을 나름 잘 쓰는 줄 착각하면 안 된다. 그만큼 공부하는 동안 작품을 많이 쓰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어쨌든 얼마나 혹독한지 혼이 나갈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까이는 것도 힘이 될 수도 있다. 진짜 작가가 돼서 세상에 나가 봐라. 그게 습작생 시절로 끝나나. 잘 썼다는 사람보다 못 썼다고 욕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그럼 그럴 때마다 삐지고 울고 불고 할 건가? 맷집을 키워야지. 근데 문제는 맷집 키우는 건 좋은데 내가 당한 만큼 갚아준다고 못지않게 남의 작품 까주면서 가학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작품 살살해야 내 작품도 살살해줄 거란 믿음이 암암리에 작동하기도 한다.ㅋ
글 중 초롱의 이런 대사가 나온다.
"...... 저는 사실 이상해요. 왜 등단하고 나서야 작가라고 부르는 걸까요?
그럼 등단하기 전에는 내가 작가가 아니었나? 하면 아니거든요. 그때도 저는
작가였어요. 등단을 깃점으로 이제부터 작가, 이 글부터 진짜 글, 하는 거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그때도 작가고 지금도 작가예요. 모든 글이 같은 글일
따름이고요."
이것은 작가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전에도 누군가 이런 비슷한 글을 썼던 걸 기억한다. 자신이 어딘가에 뭔가의 글을 쓰고 있으면 작가라고.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너무 자의적 정의는 아닐까. 작가가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직업이 되었던가. 공기조차도 자본 주의화된 세상에서 작가가 이슬만 먹어도 사는 무슨 풀벌레 같은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직업 명예라고 생각하는 걸까. 오늘도 SNS를 비롯해 어디선가 숨어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 중 이 말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영글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아이돌 가수들도 연습생 시절을 거치는 것처럼 작가도 작가 지망생이란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말하기 싫으면 문청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이 작가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시절조차도 작가라고 보는 것 같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이미 그런 세상에서 원고료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냉정히 말해 원고료로 만 원 한 장이라도 받았다면 그게 작가인 거고 못 받았으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작가도 떳떳한 사회 경제적 직업이 돼야지 초롱이 같이 초롱초롱한 생각만하다 원고료 쓱싹하고 작가라고만 불러주면 좋겠는가. 돈은 안 벌어도 글만 써도 좋다는 건가? 그런 식의 역 논리의 빌미를 제공하면 세상에 글 써 주고 돈 못 받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감상적 사고로 일관할 것인가.
작가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인가를 얘기하는 게 싫은 게 아니다. 얼마든지 얘기해도 좋은데 그건 작가가 되고 난 이후 얘기해야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독자가 굳이 알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보여주려면 아주 명확하고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를 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이면을 보여주던가. 그런 의미해서 지난 여름호에 실린 이서수 작가의 <미조의 시대>는 같은 작가 얘기여도 확실히 현실적이고 잡히는 뭔가가 있었다. 또한 작가 의식이라는 건 평생 가는 것이다. 더 단단해져야하고 확장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실린 남현정 작가의 <부용에서>를 읽으면서는 문득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유감스럽게도 그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읽는 내내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라 그렇다. <무진기행>이야 안갯속 이야기지만 얼마나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가. 독자들은 보통 몇 페이지 정도에서 자신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까. 보통은 10페이지 내외에서 결정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이미 마음에선 결정을 내렸지만 혹시 몰라 30페이지 정도는 읽는 것 같다. 필요하면 그 이상으로도 읽고. 그 이상으로 읽을 땐 그냥 오기로 읽는다고 봐야겠지.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짧은 단편인데 그걸 못 참고 엎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뷰를 진행했던 양순모 문학평론가가 이 작품은 읽는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역시 난 불호다. 왜 이렇게 썼을까 했더니 그런 말을 한다. "거듭되는 장광설, 과잉된 자의식의 발화 '나'는 아무래도 요즘 보기 어려운 형식이고, ...... 사실 이는 오랫동안 많은 소설 고전들이 애호하고 채택해온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고전 소설들이야 워낙에 주저리주저리 하는 측면이 있어 그러려니 하고 꾸역꾸역 읽지만 요즘 그것도 우리나라 작가가 그렇게 쓴다면 문제라기보다는 달리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현대 소설은 영화적 글 쓰기 아닌가. 무엇보다 이야기 운영의 묘를 잘 살려야 한다. 이런 소설 쓰기의 환경에서 과연 남현정 작가가 그런 고전적 글쓰기가 가능한 건지 좀 지켜보고 싶어 지긴 한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나름 재밌게 읽은 건 김멜라 작가의 <저녁놀>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퀴어 소설이다. 솔직히 난 굳이 말하자면 성에 대해선 보수적이고 성을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을 선호하지도 않으니 퀴어 소설은 더더욱 읽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얻어걸려야 읽는 정도다. 그나마 재미없으면 때려치울 생각이었는데 무난하게 끝까지 읽힌다. 무엇보다 동성애를 억지스럽게 옹호하기보다 동성애자로 사는 것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그렸다.
눈점이 아파 눕자 먹점에게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나 죽거든 남자 만나라고 하는 대목이 짠하다. 하긴 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도 어려운데 더구나 동성애자라고 하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나마 건강하면 씩씩하기라도 할 텐데 건강 잃어 보면 별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그런 말이 안 나오겠는가. 소설은 이렇게 남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한때 소설 읽기에 회의를 느꼈던 적이 있었다. 한 번 읽고 말 걸 왜 읽나 싶은 것이다. 철 몰랐던 시절의 우매함이다. 소설만큼 인간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분야도 없다.
이 시리즈는 네 권째 읽는데 아쉽게도 읽어 본 중엔 가장 재미가 없었다. 한 계절 동안 쏟아지는 단편 소설이 얼마나 되는 걸까. 그중 나름 엄선해서 엮었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치니 공공연히 일희일비하는 마음이 든다. 그나마 해설 대신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려 했던 건 좋긴 한데 그것도 다 이해 못 하고 반 정도 밖엔 이해 못 하겠다. 작가와의 인터뷰는 원래 어려운 건가 아니면 내가 문해력이 떨어지는 건가 아니면 인터뷰 자체의 한계인가.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감이 잡히질 않는다. 원래 작가와 문평가는 견원지간이라는데 둘이 분위기가 좋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소외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난 기본적으로 이런 시도는 환영하지만 그러려면 문평가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인터뷰 소양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더 좀 편하게 읽히는 인터뷰가 되길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