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전기 영화다.
19세기를 살았던, 에디슨의나 뤼미에르 형제의 보다 앞서 활동사진이라 불렸던 영사기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활동사진을 꿈꿨던 사람의 전기 영화를 본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이 영화 오프닝 시퀀스가 좀 파격적이다 싶다. 하얀 백발의 노인이 딸 같은 여자와 베드신을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딸 같은 여자와..? 했는데 그의 나이는 50이 됐거나 임박했을 무렵이다. 그가 그렇게 백발노인이 되었던 건 젊은 시절 어떤 사건으로 인한 사고로 역변을 겪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다니. 근데 그는 그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긴 19세기 때 50이면 할아버지다. 무엇보다 그는 활동사진에 미쳐 있었다.
그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까만 배경에 여러 개의 카메라를 일렬로 늘어놓고 사람의 움직임을 동시에 찍는다. 당시 사진기란 오늘날의 그것을 상상하면 안 된다. 19세기 미국이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잠깐 나오기도 하는 나무로 된 사각 휴지통 같은 통에 가운데 렌즈가 들어가 있는 그런 형태다.
에드워드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표정과 생생한 움직임을 실험하던 중(그것은 당시 모델을 지원받아 한다) 그는 옷이 그것을 가린다며 사람의 나체를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도 좀 놀랐다. 뭐 좀 벗는 척하다가 다른 장면으로 전환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관람 등급이 15니까. 그런데 웬걸, 진짜 벗는다. 순간 손으로 눈을 가려야 하나? 하긴 뭐 그래봐야 나 외에 누가 보며 손으로 가린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다 볼 거 아닌가.
무엇보다 당시의 모델들이 카메라 앞에서 벗는 것에 전혀 스스럼없는데 200년 후의 이름 없는 관객이 뭐라고 이리도 호들갑인가 싶다. 그런데 당시는 역시 보수적인 시대다. 결국 소문이 높으신 나라 일을 하시는 분 귀에 들어가 진정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의 에드워드 진정 좀 받았다고 뒤로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했을까? 맞다. 옷을 벗는다. 그렇게 벗는 것으로 벗는 것 자체는 외설이 아님을 몸소 증명한다. 그건 영화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실제로 15세 관람가를 받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긴 이 영화 등급이란 게 좀 웃기긴 하다. 어떤 영화는 야한데 청소년 관람가고, 어떤 영화는 뭐 이 정도 가지고 하는데 불가를 받기도 한다. 이 영화도 그렇다. 야하다면 앞서 말한 오프닝 시퀀스 때 베드신이 문제지 이 장면은 문젯거리도 못 된다.) 그 정면을 보면서 인간의 벌거벗은 몸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순간 나체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그는 확실히 외골수다.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미세하고도 생생한 움직임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너무 강한 나머지 살아있는 거북이의 배를 갈라 아직도 팔딱거리는 심장을 손바닥 위에 얹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요즘엔 영상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연구를 한다고도 하던데 다소 엉뚱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엉뚱한 상상은 무려 200년 전에도 있어 왔다.
게다가 그의 이 집착은 아내를 의심하는 촉으로도 작용하기도 한다. 하긴 남편이 연구에만 몰두하고 아내는 뒷전이니 20대 초반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더구나 결혼 전 아내는 모델이었다. 게다가 아내가 유산 끝에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촉은 귀신같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 주위를 뱅뱅거리는 신문 기자 내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그 신문 기자를 권총으로 쏘고 자수를 한다.
어찌 보면 에드워드는 당시의 발명가의 전형인지도 모르겠다. 외골수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 하지만 이 남자, 여러모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살인은 미국에서 정당 살인의 마지막 케이스가 되어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24살 젊은 나이에 죽었고, 당시론은 친자 확인을 할 수 없으니 그의 아들은 외모가 닮았다는 말만 할 뿐 아버지가 확실히 누구인지 모른다. 그는 한참 세월이 흘러 1893(?) 년 만국박람회에 활동사진 주프락시스코프를 내놓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성능의 영사기에 선수를 빼앗기도 한다. (이건 영화의 내용이고 그에 대한 네*버의 설명은 좀 다르다. 감독의 해석으로 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의 수만 장의 사진은 동물연구에 기여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정말 여러모로 의미 있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흔하게 보는 영상 기법들을 의미 깊게 살려냈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자신이 상상하는 것들을 슬로모션이나 분할 기법 등으로 표현했는데 정말 인상 깊다. 영화는 주로 녹색과 초록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무겁지 않고 오히려 밝은 느낌이다. 정말 강추다.
혹시 그의 전기가 있나 해서 찾아봤더니 번역된 건 없고 그나마 이 책은 품절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