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지금은 아직 2018년이니 내년이 되면 메스컴에서 일깨우긴 할 것이다. 더불어 2020년은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모처에서 초등학교 3, 4학년을 대상으로 어린이 뮤지컬을 만든다고 해서 대본 참여를 해 줬다. 길이는 40분 내외.그러니 이야기가 산을 타다가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즉 기승전결이 없다는 것이다. 기승으로 갔다 바로 결론으로 떨어지는 구조랄까?
암튼 텍스트가 있긴 하지만 텍스트대로만도 할 수도 없다. 새삼 초등학교 때 배우고 잊어버렸던 유관순 열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되서 나름 좋았는데 그래도 대본에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만은 남기고 싶었다. 유언은 이렇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질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걸 결국 넣지 못했다. 아이들 정서에 안 좋을거란다. 작가의 똥고집일까? 난 웬지 쉽게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걸 가지고 얘들이 두려워 하겠느냐고 우기고 싶었다. 직접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읊으며 지나가는 건데. 결국 모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서 빼기로 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최근 홍콩에 살다 영구 귀국한 아는 지인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자문을 구해 보았다. 그는 홍콩에 살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형극을 해 봤다니까. 그 역시 빼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또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해서 뺐는데 마지막 엔딩을 유관순이 채찍을 맞고 죽는 것으로 마무리 하자는 것이다. 아니 그 대사로 처리하는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도 뺀 마당에 채찍 맞다 죽는 것을 보여 주자고...? 게다가 그렇게 해서 마무리 할 것 같으면 기껏 만들어 놓은 노래 한 곡이 죽는다. 어쩌자는 건지.
그것도 내가 묻지 않았다면 그대로 진행시켜 볼 참이었던 모양이다. 순간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른다, 이 바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영역을 터치하지 않고, 오로지 존중과 신뢰, 교감 뭐 이런 것만으로 작업을 할 수 없는 걸까?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해야 그 존재감을 인정 받는다고 생각하는 전근대적 꼰대감은 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더구나 제8의 예술인 뮤지컬을 하면서 과연 그게 용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꼰대가 아무데서나 꼰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정작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해야할 때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할 것이다. 다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고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처음 일하는 타임에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나중에 무엇을 보여줄지 그 또한 의문이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은 그냥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젠 웬만한 건 유연함으로 넘어갈 줄도 아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일일이 대응하고, 날카롭게 손톱을 세워봤자 나만 힘들어질 것이다. 나야 지켜야 할 것이 목숨 밖에 없으니 손해 볼 것도 그리 많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덕분에 유관순 열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했던 요즘이었다. 18살 채 피워보지 못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 무슨 용기가 있어 겁도 없이 그 어린 나이에 독립 운동을 할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삼일운동을 하고, 순국을 했지만 조국의 광복은 그렇게 빨리 오지 않았다.
또 어찌보면 그렇게 죽는 편이 더 나았을까?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녀도 위안부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다면 위안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유관순만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란 어이없는 논리의 비약까지 해야한다. 세상에 죽어도 되는 인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버림 받아도 되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계집 아이가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혼이 나지는 않았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무엇보다 유관순은 어린이 위인 전기에서나 다룰뿐 변변한 평전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