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양심상 그의 장점을 폭포처럼 쏟아야한다. 나의 짝꿍은 평소에 가정적이고 부지런하고 재밌고 짱구춤을 똑같이 추고 세상 물정에 밝고 판단력이 좋고 운도 좋고( 여럿이 어쩌다 로또를 사면 1.2등은 아니어도 소액이지만 꼭 혼자 당첨, 이벤트 추첨 하면 뭐라도 꽝은 거의 안나온다)내가 잘 못하는 몇몇 메뉴의 달인이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와 친하다.
그러나 한 번 삐지는 날에는 상당히 오래갈 때도 있는데 화가나도 돌아서면 풀려버리곤 하는 나는 결혼 초반 난감했다. 답답하니 어쩔 수 없이항상 먼저 나서서 사과하고 풀어주었다. 그랬다. 어리석었다.
삐돌에게는 양보가 독이다. 양보와 배려는 삐돌을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삐지는 기간은 길어져만갔지 줄어들지 않았다. 너무 커져 감당이 안되었을때 나는 지난 날을 후회했지만 되돌이키기엔 너무 먼 곳에 와 있었다. 삐돌증후군은 빈번해졌고 나는 고통받았다. 항상 사소한 일이 발단이었다. 만일 이 일이 커져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이혼이라도 하기위해 법정에 서는 날엔 판사는 물론 자리한 모두의 비웃음을 사고도 남을 그런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늘상 져주던 나는 큰 결단을 내렸다.
풀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미 먼 길을 와버렸으니 되돌아가긴 힘든 여정이겠지만 내가 진정 편하자면, 평생을 같이 평온히 살자면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오를 다진 후 삐돌군이 화려하게 컴백했을때 나는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예상대로 힘들었다. 위기도 있었다. 당장 불편한걸 모면하기 위해 또다시 굴욕을 감내하고도 싶었다. 역시 세상엔 쉬운일이 없다는걸 느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더 쉽게 포기해선 안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버텼다.
무려 6개월을... (헉;;;)
영어원서를 마구마구 읽는 능력자 수연님은 어느날 이 일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글을 올려주었고 나는 뜨끔햇다. 최장 6개월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고백하자면 그 6개월의 끝도 결국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6개월을 끝으로 휴전을 신청했다. 여러모로 쉽지 않았고 부부란 여러가지가 걸려있으니까.
그래도 그 6개월이 아쉽지는 않았다.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그렇게도 살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과 우리 둘만의 수화같은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6개월 후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쩔땐 텔레파시 같은것도 경험했다. 내가 떡볶이가 먹고 싶었는데 그가 떡볶이를 사오거나 내가 영화를 보고픈데 같이 극장에 가지 않을래?하거나 내가 답답했는데 드라이브 어때? 하는 식의 일들이 자주 생겼다. 심지어 맥락없이도 둘중 누군가( 단어가 막상 생각안나) 그거 혹시 있어? 하는데 그게 뭔지 알고 찾아주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보면 둘 다 어느순간 놀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부부란 뭘까? 소통이란 뭘까?
싸우지 않고 항상 알콩달콩한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각각 다른 가족 안에서 수십년간 다른 삶을 살다 어떤 인연으로 만나 함께 살게 되었을땐 아무리 죽고 못사는 사이었어도 많은 트러블이 생긴다. 그걸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두 사람의 숙제고 그 숙제를 어떻게 푸느냐가 그들만의 삶의 방식,사랑하는 양식이 된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여유있게 바라보면 때로 보이지 않던것이 새롭게 보일때도 있다.
개그맨 부부들을 보면 이혼없이 잘 사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개그코드가 잘 맞는것도 커플간에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커플들도 오래 함께하면 그렇겠지만 우린 그런 면이 제법 잘 맞아서 유행어도 있고 우리끼리만 통하는 단어도 생겼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시리즈와 어록까지.
그는 영화도 거의 몰랐고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에게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고 배우 이름도 가르쳐줬다. 책은 내가 줄거리를 읽거주거나 인상깊은 대사를 읊어주는 정돈데 이것만으로는 그는 신세계라며 좋아한다.
대신 그는 나의 약점인 이런저런 세상물정을 때마다 알려줬다.
당시 6개월은 내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눈치보며 미뤘던 운동을 배웠다. 그렇게 시작한 태권도. 6개월후 좀 더 자상해진 삐돌군은 쭉 계속 갈수 있게 용기를 주었고 나는 1년만에 단증을 땄다. 단증을 받으니 삐돌군은 뭔가 두려웠던 걸까 이후로는 잘 삐지지 않았다. (사람 갑자기 너무 변하면 죽는다는 설도 있으니뭐..) 이정도면 여러모로 유익한 6개월이었다.
시간은 우리를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의 정수(精髓 )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