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잔잔한 물결에 발을 적시다가 서서히 옷이 젖는걸 느낀다. 일렁이는 파도에 한동안 뒤뚱거리다가 그만 왈칵 눈물을 쏟았다. -미미
20세기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케이트 쇼팽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으로 읽었다. 당시 이 소설은 여성, 특히 가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어머니'인 여성의 일탈을 소재로 해 사회로부터 비난받았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금서가 되어 도서관에서도 거부당했고 아마도 이로 인해 케이트 쇼팽은 더이상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은 나로썬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소설에 금기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소설은 어쩔수 없이 그 시대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뛰어넘기도 해야한다. 이른바 '도덕'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소설이다. 미디어와는 다르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도 소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상상력이 힘을 얻는다. 또한 그래서 소설은 독재자들에게 위험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누군가의 상상력에 한계를 두는것은 누구에게도 권리가 없다. 다만 예술과 소설에 한해서 그런 자율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외의 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 지금의 금기가 다음 세계에서는 다른 것일수도 있다. 시대에 발이 묶인 독자는 작가에게 족쇄를 채우는 오만함을 경계해야한다. 작품은 인간보다 생명이 길고 시대를 넘어서 재평가된다.
줄거리는 이렇다. 사업을 하는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남부러울것 없이 살아가던 '에드나 퐁텔리에'는 휴양지에서 '로베르'라는 청년을 만나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로베르'를 점점 좋아하게 되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그녀의 상황에 로베르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멕시코로 떠나게 되는데 그의 빈자리를 통해 에드나는 자신의 감정에 비로소 눈을 뜨고 더불어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에드나는 그렇게 로베르가 떠난 뒤부터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된다. 사랑과 고통을 오롯이 경험하며 그 모든 것들이 삶을 보다 충만하게 한다는걸 깨닫는다.
무엇보다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뭔가 이해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눈앞을 가리던 뿌연 안개가 걷혀, 삶이란 것이, 그 괴물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P176
'에드나'는 점차 남편 퐁펠리에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그리고 결국 로베르를 만나 진심을 전하게 되는데...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특별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단지 '에드나'의 감정의 변화, 자각의 확산이 서서히 물결치듯 그녀의 삶을 사로잡는 것을 지켜보며 전율하고 감동 받았다. 19세기 후반이었던 당시로서는 분명 이정도도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에드나의 자유를 향한 몇가지 시도에 그녀의 친구가 '쿠테타'라고 표현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사소한 시도일 뿐인데도 말이다. 하층민 여성은 그저 묵묵히 시중들고 노동하는 것으로, 중,상류층의 여성은 온실속의 화초같은 모습이 요구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 소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분명 파급력을 발휘하리라 믿는다. 케이트 쇼팽이 살았던 시기에 비해 세상은 좀 더 여성에게 관대해졌지만 온전히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직도 넘어서야 할 수많은 경계와 가시덤불을 지닌 이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만큼 소중한 것인지 케이트 쇼팽은 묵묵히 소설안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