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쓰는 일에서 싫은 점은 아무것도 누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문에서는 그저 애를 태울 수 있을 뿐이다. 독자에게 ‘당신은 이제 멋진 여행을 즐길 것입니다, 멋진 인물들과 멋진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왜그런지는 말하면 안 된다. 따라서 서문은 ‘나를 한번 믿어보세요‘ 하는 명제나 다름없다.  - P7

셰발과 발뢰를 생각하면, 뛰어난 작가인 리처드 프라이스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군가 프라이스에게 범죄와 수사의 영역을 거듭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때였다. 프라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탐정 이야기를 즐겨 쓰는 것은, 하나의 살인 사건 주변을 오래 맴돌다보면 그 도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 P9

작가 조지프의 말을 빌리자면, 최고의 범죄 이야기는 경찰이 사건을 작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이 경찰에게 작용하는 이야기다. 마르틴 베크는 이 말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알맞은 예다. 그리고 잠긴방은 베크가 작업을 하고 작용을 당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건이다. - P12

몇 년 전, 경찰의 누군가가 범죄 통계를 조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간단한 기법이지만 대번에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대놓고 허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그릇된 결론을 끌어내는 수법이었다. 그런 짓까지 하게 된 동기는 좀더 군사적이고 동질적인 경찰을 전반적으로 좀더 많은 기술적 자원을, 특히 좀더 많은 총기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경찰이 겪는 위험을 과장해서 내보여야 했다. 말은 이미정치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것이 바로 통계 조작이었다. - P100

요즘은 그런 곳을 ‘시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양로원‘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요즘은 ‘은퇴자의 집‘이니 심지어 ‘은퇴자호텔‘이니 하는 말이 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입소자들이 사실상 자발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는 사실, 그들에 대해서 더는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른바 복지국가가 그들을 그곳에 입소시켰다는 사실을 얼버무리기 위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잔인한 선고였고, 죄목은 노화였다. - P120

일류 범죄자는 붙잡히지 않는다. 일류 범죄자는 은행을 털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단추를 누를 뿐,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사회의 신성한제도를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대신 일종의 합법적 강탈, 즉 시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을 한다. 스모일류 범죄자는 별의별활동으로 돈을 번다. 독성 물질로 자연과 사람들을 오염시킨 뒤에 부적절한 처방으로 파괴를 복구하는 척하면서 돈을 벌고, 도시의 넓은 구역을 의도적으로 슬럼화한 뒤에 건물을 죄다 허물고 새로 지으면서 돈을 번다. 그렇게 해서 새로 만들어진 슬럼은 당연히 예전 슬럼보다 주민들의건강에 훨씬 더 해롭다. - P149

행운과 불운은 저울에서 균형을 이룬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불운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 된다는 식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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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고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 P17

그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은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새빨간색이었다. - P55

마르틴 베크는 왠지 찜찜했다. 어렴풋하고 종잡기 어려운 기분, 예를 들자면 책을 읽다가 깜박깜박 조는 바람에 책장을 한장도 넘기지 못하고 계속 같은 대목을 되읽을 때 드는 무지근한피로감 같은 기분이었다. - P60

경찰의 일은 현실주의, 정해진 절차, 집요함, 체계에 바탕을두고 이뤄진다. 물론 까다로운 사건이 우연히 해결되는 경우가많긴 하지만, 우연이란 융통성 있는 개념이고 요행이나 운과는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범죄 수사의 성패는 우연의망을 가급적 촘촘히 짜내는 데 달려 있다. 번득이는 육감보다는경험과 성실함이 더 많이 기여한다. 명석한 두뇌보다는 좋은 기억력과 건전한 상식이 더 귀한 자질이다.
현실에서 경찰이 하는 일에는 육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육감은 애초에 자질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점성술과 골상학을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뭔가가 있었다. 그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도 그는 이런 느낌 덕분에더러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 P61

지난 십년동안, 스톡홀름 도심은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변화를 겪었다. 원래 있던 동네는 모조리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 동네가 지어졌다. 도시 구조 자체도 바뀌었다. 도로가 확장되었고고속도로가 놓였다. 그런 활동을 부추긴 것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꿈이 아니라 귀한 땅을 한 뼘도 남기지 않고 최대한 착취하겠다는 욕망이었다. 도심에서는기존 건물의 구십 퍼센트를 허물고 기존 도로망을 깡그리 지운것만으로도 모자라 지형 자체에도 폭력적인 변화가 가해졌다. - P81

만약 당신이 정말로 경찰에 붙잡히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찰관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하는 진실이고, 스웨덴에서는특히 더 그랬다. 스웨덴 범죄 역사에는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이 무수히 많지만 경찰관이 살해된 사건 중에는 미해결 사건이 한 건도 없었다. - P88

스웨덴 텔레비전내에서도 집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점 방송사의 중앙 관리 본부는 여러 채널에서 송출되는 뉴스 서비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다.
그게 바로 검열이지, 군발드 라르손은 생각했다. 투명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하는 검열. 자본주의사회의 검열이란 전형적으로 그런 식이지. - P102

동료들은 그를 특이한 사람으로 여겼고,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그도 동료들을 싫어할 뿐 아니라 자신의 원래 가족과상류층 배경도 싫어했다. 형제자매는 그를 역겨워했다. 그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것이 한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그가 경찰관이라는 점이었다. - P104

"아빠?"
"응."
"요아킴이 말썽 부렸어."
"응."
"기저귀를 벗어서 벽에 똥을 발랐어. 엄청 많이 발랐어."
콜베리는 신문을 내려놓고 다시 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아이들 방으로 가보았다. 곧 한 살이 되는 요아킴이 아기 침대안에 서 있다가 아빠를 보고는 난간을 쥐었던 손을 놓고 베개에엉덩방아를 통통 찧었다. 요아킴이 벽을 예쁘게 꾸며두었다는보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 P106

프레드리크 멜란데르는 강력반의 귀한 자원이었다. 멜란데르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못 견디게 따분한 인간이었지만, 수사관으로서는 특별한 자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현대 기술도 멜란데르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멜란데르는 특정 사람이나 주제에 관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것을 모조리 기억했다가 몇 분 만에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가지런히 정렬하여 명료한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줄 줄 알았다.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컴퓨터는 아직 없었다.
멜란데르가 서툰 것은 글씨 쓰기였다. 마르틴 베크는 멜란데르의 노트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깨알만 하고 독특한 그 필체는 남들은 절대 알아먹을 수 없었다. - P199

마르틴 베크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아이의 얼굴이자 노인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눈은 공포, 혹은 증오, 혹은 절박함 탓에 광기에 사로잡힌 눈이었다. 아니면그냥 완벽하게 공허한 눈이었다. - P327

"여기는 모스크바도 베이징도 아니야. 택시 기사가 고리키를읽는 나라, 경찰관이 레닌의 말을 인용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여기는 정신 나간 나라의 정신 나간 도시야. 그리고 저 지붕에는 웬 망할 놈의 미치광이가 올라가 있어. 이제 그만 놈을 끌어내려야 해."
"동의해." 콜베리가 대꾸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레닌은아니지"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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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 청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콜베리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녀석의 허세로 걸친 자신감을 깨부수기 위해서지, 새롭게 진정한 자신감을 구축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언젠가 좋은 경찰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걸출한 성과를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랄까." - P110

그는 경찰의 마스코트나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생김새에 호감 가는 태도에, 육체적으로 건강했고, 훌륭한 운동선수였다. 경찰 모집 광고에 나서도될만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내세울만했다. 가령 거만하고, 흐느적거리고, 비만 조짐이 있는 콜베리보다는 최고로 따분한 인간이 최고의 경찰이 된다는 가설의 완벽한 사례로 보이는 금욕적인 멜란데르보다는, 어느 면으로 보나 평범하기만 한 딸기코 뢴보다는 집채만 한 몸집과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누구든 단박에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군발드 라르손보다는.
그리고 물론, 코가 막혀 찡찡대는 마르틴 베크 자신보다도. - P111

"좋지 않아."
"내가?"
"아니, 책 모퉁이를 접는 것."
"내 책이야. 내 돈으로 샀다고." - P168

크리스마스까지는 한 달도 더 남았지만광고 잔치는 벌써 시작되었다. 한껏 장식된 쇼핑가를 따라 쇼핑강박증이 흑사병처럼 빠르고 무정하게 번졌다. 그 전염병은 눈앞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피할 길은 없었다. 전염병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모두를 전염시키고 무너뜨렸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기진맥진 울어대며 떼를 썼고, 가장들은 다음 명절까지 빚에 시달릴 형편이었다. 거대하고 합법적인 신용 사기가도처에서 희생자를 양산했다. 병원은 심근경색, 신경쇠약, 급성위궤양 환자들로 붐볐다. - P198

"경찰이 필요악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불현듯 경찰의 도움이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직업 범죄자들조차 그래,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자기집 지하실에서 뭔가 달각대는 소리가들려서 밤중에 잠을 깨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당연히 경찰을 부르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이야." - P199

노라스타숀스탄 거리의 버스에서 총알이 예순일곱 발 발사된 지 한달이지났다. 아홉 명을 살해한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초조해진 것은 경찰 당국, 언론, 보통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경찰이 하루속히 범인을 검거하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들이또 있었다. 흔히 지하 세계라고 불리는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범죄가 주업인 사람들은 지난 한 달 동안 활동을 삼갈 수밖에없었다. 경찰이 경계를 조이는 한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스톡홀름 전역의 도둑, 중독자, 마약상, 강도, 주류 밀거래꾼, 포주는 살인자가 한시바삐 체포되기를, 그리하여 경찰이다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나 주차 위반자에게 전념하여 자신들이 다시 활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들이 경찰과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추적을 기꺼이 돕고 나섰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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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 씨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어김없이 광호 씨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고, 광호 씨를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방식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쪽으로 걸어가는,그래서 자꾸만 나의 위치와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광호씨의 용기를 경계하면서도 선망했던 게 아닐까 싶다. - P10

그 애는 그 부서지고 망가진 것 같은 문장들을 더 마음에 들어 했어요. 이제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이것뿐이고, 이렇게 하면 왠지 이 세상에 숨 쉴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나요. - P11

나는 빗속에서 달리기를 했다. 동네를 돌아 나가면 남산 둘레길이 멀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 데다 비까지 와서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천천히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걷는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전력 질주를 했다. 몸이 뜨거워졌고 전력 질주 후에 숨을 토해내는 순간이 괴로워서 좋았다. 달리는 동안에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그를 생각했다. - P64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알잖아. 중요해 보여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는 좋았어. 고맙고.
네가 고마울 일이 아니야. 약속을 못 지킨 건 나니까. 약속! 무슨 약속?
결혼했잖아. 우리가.
아…… 희진아.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 P76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 P88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아. 아주 낯선, 처음 꾸는 꿈. 그런데 이게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모르겠다?
빨리 깨고 싶어?
나는 남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깨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아마 그런 사람은 없겠지. 아무도. - P89

이주혜:이해는 잠시나마 서로의 영혼이 포개지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오해 혹은 몰이해는 날카로운 것으로 영혼을 긋는 가혹한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는 일이 더없는 기쁨이라면 사랑하는사람에게 오해받는 일은 처절한 고통입니다.  - P144

이주혜: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일치할 때비로소 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할 수 없는 이야기일 때 혹은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때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냈을 때 그것을 읽는 나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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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다.
저물녘, 구름 사이로 자갈투성이인 강가에 연한 빛을 비추던 하늘이 어두워지자 사위가 돌연 고요해졌다. 두송이,
세 송이 눈발이 흩날렸다.
눈은 나무를 베고 있는 사무라이와 하인들의 일옷을 스치고, 덧없는 목숨을 호소하듯 그들의 얼굴이나 손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들이 묵묵히 손도끼만 움직이고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듯 이리저리 주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안개가 눈과 섞여 퍼지자 시야는 온통 잿빛이 되었다. - P7

긴 겨울을 앞두고 농부들은 온종일 일을 했다. 척박한 논밭에서 벼와 피를 거두어들이면여자와 아이들이 두드려 탈곡하고 키로 친다. 그것은 연공을 바치기 위한 것이지 자신들이 먹을 것이 아니었다. 일하는 틈틈이 벤 풀들은 그 자리에 말려둔다. 마구간에 깔기 위해서이다. 이곳에서는 말리지 않은 볏짚이 기근 때 식량이되기도 한다. 그것을 대비하여 잘게 썰어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든다 - P42

선교사는 자신을 일본의 주교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의야심을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타일렀다. 나는 사욕으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기리시탄을 금하려는 이 나라에서 최후의 강력한 방어선을 치기 위해 주교의 지위가 필요한 것이라고 오직 나만이이렇게 교활한 일본인들과 싸울 수 있다고…. - P57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달팽이와그 껍데기처럼 골짜기와 단단히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그들은 얼굴을 숙이고 눈바람을 견디는 것처럼 역시 이 지시를 체념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 P78

"버리는 돌이지요, 우리는 마쓰키는 바다에 눈길을 준채 자조하듯이 "평정소의 버리는 돌이 된 겁니다."
"버리는 돌?"
"원래 중신 중 누군가가 이 큰 소임을 맡아야 하는데 메시다시슈인 우리가 뽑힌 것은-신분이 낮은 메시다시슈라면 도중에 바다에 빠지고 생판 모르는 남만의 나라에서 병들어 쓰러져도 영주님께도 평소에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 P111

"하나는 옛 봉토를 돌려달라는 우리 메시다시슈의 청원을 막기 위해서지, 그 힘든 여행에 메시다시슈 몇 명을 보내놓고, 도중에 바다에 빠져 사라지면 그걸로 좋은 거고, 또어려운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는 충실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처벌하여 메시다시슈의 본보기로 삼는 거네. 그게 평정소이 생각이야." - P195

이따금 여기저기서 그들은 인디오가 내버린 제단의 폐허를 보았다. 벨라스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 주변의 인디오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태양을 숭배했다고 한다. 불그스름한 화산암을 포개어 쌓은 받침대나 땅바닥에 내팽개쳐져나뒹굴고 있는 돌기둥의 잔해에 기괴한 선이 새겨져 있고 그선 사이를 등이 반짝이는 도마뱀이 재빠르게 기어갔다. - P238

변화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입 밖으로 내서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골짜기에서 살았던 자신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운명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결국 어떻게 변하게 할지 공포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바람이 수도원 창을 밤새 울렸다. 한밤중부터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 P249

벨라스코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지우려고 했다. 그는 성서에 쓰인 주 예수의 한가지 말을 그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을 본 요한이 화를 냈을 때 주님이한 말이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 - P276

세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주교는 사제로부터은 물병을 받아 각자의 이마에 물을 부었다. 이마에 흐르는물은 사무라이의 눈과 코로도 흘러내렸고 벨라스코가 손에든 수반도 적셨다. 그것이 세례였다. 사무라이 일행에게는형식적인 것, 교회에는 부정할 수 없는 성사였다. - P331

아무것도 몰랐던 나와 사절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로지하나의 꿈을 찾아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던 우리들. 그러나그것은 신기루의 성이었던 것이다 - P426

하지만 그가 승리를 거둔것은 정치의 면이고, 그리스도교도가 싸움에서 이긴 것은정치의 세계가 아니라 영혼의 세계에서다. 철저한 추방에도불구하고 사실 42명의 선교사가 일본인 신도의 은밀한 비호를 받으며 그 섬나라에 잠복해 있는 사실을 그 노인은 아직 모를 것이다. 잠복한 선교사들은 정치나 현실의 세계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피를 그 나라에 도마뱀 같은 모양을 한 그 나라에 바치려 하고 있다. - P427

"그리고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중신은 중신, 고이치몬슈는 고이치몬슈, 주군은 주군, 저 같은 메시다시슈는 평생 메시다시슈로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만 것이겠지.‘ - P446

골짜기의 밤은 깊었다. 골짜기의 밤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어둠과 어둠의 침묵을 모른다. 정적이란 소리가 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정적이란 뒤쪽 숲의 초목이 스치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그리고 가만히이로리의 자유 불꽃을 향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 P463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우는 자야말로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웃게 되리라. - P464

주님은 그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인간 세계의 배후에 영원한 질서를 창조했다. 나도 주님을 따라 이 목숨을 일본에 바침으로써, 이피를 일본에 뿌림으로써 그 질서에 가담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 P486

사무라이는 지붕 너머로 눈이 흩날리는 것을 봤다. 흩날리는 눈이 골짜기의 백조처럼 여겨졌다. 먼 나라에서 골짜기로 와서 다시 먼 나라로 떠나는 철새, 수많은 나라, 수많은 동네를 본 새. 그것이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직 모르는 다른 나라로….
"여기서부터는..… 저분이 함께하실 겁니다."
등 뒤에서 돌연 쥐어짜는 듯한 요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저분이 모실 겁니다."
사무라이는 발을 멈추고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게 빛나는 차가운 복도를, 그의 여행의 마지막을향해 나아갔다. - P503

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을 덮치는 파도가 옥졸이 떠내려보낸 거적을 삼키고 부딪치며 물러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겨울 햇빛은 긴 모래사장에 내리쬐고 바다는 바람소리 속에 여전하게 펼쳐져 있다. 대울타리 안에 이제 관리나 옥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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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2-06-11 2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 작품이군요. 표지 디자인이 강렬합니다.
작품 내용도 그렇겠지요? 쪽수를 보니 대박~ 읽는 재미가 쏠쏠하겠네요.ㅎ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미미님.^^

청아 2022-06-11 20:54   좋아요 3 | URL
두꺼운 편이라 읽기전에 호흡을 가다듬었는데도 막상읽으니 순식간에 결말에 다다랐습니다. 표지가 내용과 잘 어울렸어요ㅎㅎ 모나리자님 즐거운 주말보내세요*^^*

새파랑 2022-06-12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혀 긴줄 모르고 몰입해서 읽은거 같아요. 미미님과 읽은 책이 겹쳐서 기쁩니다 ^^

청아 2022-06-12 20:18   좋아요 2 | URL
저도요! 소설 속에서 함께 살다가 나온 느낌이었어요!!ㅎㅎ새파랑님이 최고라고 하신 작품은 항상 믿고봅니다*^^*

서니데이 2022-06-13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침묵보다 조금 앞선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요.
일본은 가톨릭신자가 많은 나라가 아닌데, 작가가 가톨릭 신자라서 그 점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미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청아 2022-06-13 22:29   좋아요 3 | URL
그렇군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일본은 신사도 많고 종교에 있어서는 독특한 양상을 띄는것 같아요. 서니데이님도 시원하고 평온한 밤 되세요🙆‍♀️

mini74 2022-06-13 2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께 땡투하며 아 책 샀습니다 ㅎㅎ 내일 온다는데 기대됩니다 *^^*

청아 2022-06-13 23:05   좋아요 3 | URL
오!!! 미니님💕 감사해요ㅎㅎ 미니님도 감동의 파도를 경험하시길 바래요*^^*(좋아하실만한 요소가 많아요)

scott 2022-06-13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사쿠 이 작품 쵝오!ㅎㅎ

사무라이 마지막 장!
감동의 회오리
미미님 맘 속에도
゜  ゜   *  ゜
  *  o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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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  )
   ( O )

청아 2022-06-14 08:21   좋아요 1 | URL
스콧님이 전에 올려주셨던 사무라이 페이퍼도 다시 찾아봤는데 소설읽고 보니 더더 감동적이었어요!!
보고 또 보려고 즐겨찾기함요.

네! 소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오열했습니다ㅠㅠ
명품 페이퍼 감사해요 스콧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