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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떠들썩했던 교실이 담임의 출현으로 고요해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반장이 앞으로 불려나갔다.교실 중앙에 풍체 좋은 난로와 그 주위를 쇠로 된 팬스가 제법 구획을 갖추어 놓여있어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싶어하는 애들은 거기 우유를 올려놓기도 했다. 그날은 그 팬스위에 우유가 딱 한 개 올려져 있었다. 덩그러니 한 개. '언제부터 올려져 있던거지? 저러다 터지겠다.'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앙에서 주전자는 열을 내며 존재를 과시하는 듯 했다. 담임은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큰 소리 내는 법도 거의 없었다. 별안간 딱 소리와 함께 반장의 안경이 난로 뒤 어딘가로 날아갔다. 동시에 반장도 어딘가로 날아갔다. 적어도 소리로 듣기에는 그랬다. 나는 그 쪽으로 눈조차 돌리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얼음이 되어 숨을 죽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위치상 그 장면을 볼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반장은 그 뒤로 얼마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고막이 터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담임은 슈퍼맨의 클라크를 생각나게 하는 덩치와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검은테 안경을 쓰고 늘 감청색 정장을 즐겨입었는데 한번씩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 마저도 슈퍼맨스러웠다. 그의 손바닥에서 나오는 힘도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폭력'에 대해 목격한 기억이다.나의 3학년은 온통 그 일로 까맣게 남아있다. 나중에 운동회를 했는데 노란 체육복들 사이에 서 있는 담임이 낯설었다. 그는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같지 않았다. 우리가 알기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즈음 어떤밤에 아버지는 내게 작은 사진책자 하나를 보여줬다. '광주에서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했다고. oo이가 시켜서 한 짓이라고' 사진에는 군인들이 상의가 벗겨지고 피를 흘리는. 때로는 팬티만 입은 시민들을 트럭에 싣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모습들. 그들에게 총구를 겨눈 군인들. 시민들은 팔이 묶여 있었다. 여자들도 사진에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인근에 종로경찰서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 출.퇴근 할때 주변에 정경들과 차량이 서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어릴적 그런 사진을 봤던 기억때문에 정경이나 군인을 보면 두려움 반에 반감이 반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오빠고 동생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동호나 정대, 정미처럼. 동호는 친구 정대와 함께 있다가 정대가 옆구리에 총을 맞자 그자리에서 도망친다.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거기 맞고 쓰러진 사람들을 도와주러 뛰어나간 사람들도 연달아 총에 맞는다. 어느순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 후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들 사이에 함께하며 친구 정대를 떠올리는 동호. 군인들이 다시 오기로 한 날 그는 그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다른 형들, 누나들과 함께.
P.13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
아버지가 사진을 보여줬을 때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일이 있었다는 사실을.누군가 그런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비록 무섭고 겁이나서 친구들에게 그 사진에 대해 말하진 않았지만 세상엔 남을 때리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걸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 궁금한건 왜 우리는 그 때 교실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는지. 반장이 그렇게 세게 맞은 게 왜 우리들 잘못인것 처럼 느꼈는지. 왜 나는 선생님을 쳐다볼 수도 없었는지다. 담임은 며칠만에 반장이 학교에 나오자 "너희들이 너무 떠들어서 반장이 고막을 다쳤다"라고 말했다. 그때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P.95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제는 5.18 41주년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대학로에서 마지막으로 최루탄 가스를 마셨다. 인근에서 시위가 있었던 것 같다.하얗게 최루탄 가스가 도시를 가르면 사람들은 눈물 콧물에 기침을 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이후로는 시위대에게 최루탄이 아닌 물폭탄을 쏘았다. 그렇게 쏘고 때리고 명령하던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지우려 노력한다. 그 때 다른일이 있던 것 처럼 이야기한다. 그만 잊으라고. 지겹지도 않냐고. 그들은 정말 잊을 수 있을까? 그 많던 사람들의 시신을? 모나미볼펜을? 담임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모든 걸 잊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날도 이후에도 울지 않던 반장은 잘 살고 있을까.
P.97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