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를 읽다보니 당연히 <대당서역기>에 관심이 갔고, 자연스레 현장과 실크로드 쪽으로 옮겨가며 읽게 되었다.
서구에서 현장이 어떻게 평가받는지 궁금해 찾아보다보니 이 책을 만났다. 그런데 독특하다. 실크로드 역사 이야기인데 로마에서 중국까지라니? 로마,
로마, 로마!에서라니?
그렇다, 저자는 로마에서 출발하여 실크로드, 더 나아가 고대 동서양 교류사를 보여주고 있다. 책을 펼치기 전에 가졌던 생각 - 마르코
폴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장건도 현장도 혜초도 이븐 바투타도 없는 서양인데 서쪽에서 출발하게? 하는 생각- 은 내 편견이었다. 166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낸 사신이 중국 후한 시절 환제를 방문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으로 책은 시작한다. 당시 중국은
로마제국을 대진으로, 로마는 중국을 세레스라고 부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상대국을 풍요롭고 이상적인 나라로 보고 있었다는 것.
당시 고대 로마제국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엔트로
향하고 있었다. 동방의 풍요로운 물품을 얻을 수 있었던 오리엔트로. 그래서 저자는 로마 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교역로를 말한다. 팔미라,
알렉산드리아, 페트라 등등. 특히 이 세 도시는 제노비아, 클레오파트라, 세미라미스 여왕 덕분에 더 흥미롭다. 이어 바닷길의 고대사가 이어진다.
<에리트라이 해 일주기>라는 고대 항해 안내서를 소개해준다. 다른 실크로드 서적과의 차이는 이 책은 교역로에 위치한 모든 오아시스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 철저히 고대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하지만 기존 서구인 연구자들이 범하기 쉬운 서구 우월주의의
잘못된 시각은 없다. 아래 문단과 같은 설명은 올바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설을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그리스인은 이 마케도니아의 장군이 관대한 문화정책을 베풀기 이전의 박트리아는 단지 초원과
사막에 불과하며, 유목민이 원시적인 관습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유포시키고 있었다. 이것만큼 부정확한 사실도 없다. 이때보다 수백 년도
훨씬 전부터 박트리아는 비옥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
- 본문 188쪽에서 인용
하여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런 뜻밖의 글로벌한 교류는 당시 세계를 분할하고 있던 4개의 대제국인 로마, 파르티아, 쿠샨, 중국의
평화와 공존 아래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때 대다수 고대사 필자들이 말하는 고대의 평화가 결코 로마 제국만의 평화, 팍스 로마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는 연대기적으로 지루하게 역사를 나열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발견되는 로마 은화들, 인도에 전해지는 성 토마스의 전설, 중국에 있는
로마인들의 마을,,, 이런 이야기들을 역사 자료, 설화, 학계의 가설 등을 고루 섞어가면서 다각도로 전해준다. 솔직히 좀 건조하고 흡입력이
떨어지는 느낌이긴 한데, 그건 내가 고대 로마사와 오리엔트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 6장에서 <대당 서역기>와 취경 여정
중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들 이야기 나왔을 때는 비교적 이해가 잘 되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내 배경지식인듯.
책은 끝부분으로 가면 이런 위험한 여행에 로마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전하게 된 이유, 즉 비단과 향료 등의 사치품에 대해 말한다.
로마인들은 비단실이 세레스(중국)의 나무에 열린다고 생각했단다. 산업스파이를 이용해 동로마제국도 비단을 생산하게 되고,,, 이런 일화도 소개하고
이런 사치품들이 로마 경제와 일상생활 문화에 미친 영향도 설명한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이 부분도 지나서 마지막에 있다. 대부분의 실크로드
서적이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 전래와 간다라 미술을 말하듯, 저자 역시 실크로드를 통한 로마, 아니 유럽 세계가 받아들인 정신적 유산을
언급한다. 9장의 제목대로, 실크로드는 '영혼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브라만교 교의의 어떤 측면이 기독교의 초기 교회에 반영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몇몇 저자들이 기독교의
의식과 인도의 고행자의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유사성을, 예컨대 고립 생활을 하는 브라만교 수도자들과,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수도원 제도
또는 원기둥 위에 올라가서 가장 완전한 극빈생활을 했던 초기 기독교의 수도자들의 존재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비록 정신적인 영역에서
인도와 로마 사이의 영향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이 유행했다는 것을 고려하고,
로마 제국 사람들이 동양과 인도의 지헤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큰 호감과 존경의 마음에 주목한다면,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들의 신비주의의
영적인 힘과 금욕주의적인 교의가 서구에서 의식의 변화나 기독교의 신비주의 형성에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본문 303쪽에서 인용
책을 읽어가는 내내, 어떻게 실크로드 역사를 서쪽에서 출발해 쓸 생각을 했을까? 하며 감탄했다.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실크로드는 늘 장안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좀 더 가봐야 금성(경주)이나 헤이안쿄(교토). 다 동쪽, 동쪽, 동쪽!에서
출발한다. 아놔, 이런 틀에 박힌 사고라니. 나름 다르게 생각하는 재주가 있다고 자뻑 좀 하며 살았는데. 아아, 난 아직 멀었다.
책은 이산 출판사 책 답게 글자가 작고 빽빽하고 도판이 훌륭하다. 프랑스어로 된 저서를 옮겨서인지 종종 영어식 표기 아닌 프랑스
표기가 등장한다. 예를 들자면 '시바'의 여왕이 아니라 '사바'의 여왕. 뭐 나름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