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안젤라의 빨간 역사책이다. 그의 고대 로마사 시리즈 3부작 중에서 이 책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뭐 내가 특별히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체질이어서가 아니고,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폼페이 전>를 봤기
때문이다. 폼페이의 도무스에서 뜯어온 에로틱한 벽화를 보고 학구적으로 고대 로마인의 삶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라고 믿어 주세요)
이 책은 고대 로마인들의 성과 사랑, 결혼과 이혼, 모든 종류의 성관계에 대한 세밀한 사실을 다룬다. 책의 서술 방식이
흥미롭다. 115년의 어느 하루 동안 로마의 광장을 지나치는 10여 명의 사람들의 행적을 따라 가서 그들의 사랑과 성의 현장을 슬쩍 엿보는
구성이다. 각 장의 처음 부분은 소설 식이지만 곧 그 장면과 이어지는 문헌과 비문헌 자료의 인용으로 '학구적이고 건조한' 서술이 이어진다. 예를
들자면 원형 경기장 지하 통로를 걸어가는 귀부인을 따라 갔더니 남성미 넘치는 검투사 노예를 만나서,,,, 이어 당시 로마 귀부인의 복장이나
외도, 결혼 풍습 등등을 서술하는 식. 표지만 빨간 책이고 제목만 침 넘어갈 뿐, 뭐 그리 낯뜨거운 내용은 없다. (그래도 다른 역사책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
특히 76년 화산재에 파묻힌 폼페이 유적 발굴 자료를 폭넓게 인용한 부분이 흥미롭다. 빅토리아 시대 도덕률이 지배하던 19세기 후반에 이런
포르노그라피에 가까운 폼페이의 프레스코 벽화와 유물을 접한 유럽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안그래도 고대 로마
제국을 이교도 집단으로 여겨 그들의 성생활을 환락적 변태적으로 묘사하던 그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책을 보면 현대인의 성생활과 비교해 봤을 때 뭐
그리 쇼킹한 것은 없다. 영화나 대중 역사서에 고대 로마인들의 성적 방종이 묘사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다른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당시 기준에 맞게 보지 못하기에 생긴 일이다. 또한, 정적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적힌 당대 1차 사료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탓이다. 어차피
그들이 한 일은, 그들을 죄악에 물든 이교도집단으로 매도한 중세 기독교 인들도 했고, 근엄한 빅토리아 인도 했고, 지금 우리도 다 하고 있는
일. 그들 고대 로마인들이 성과 사랑에 솔직했다고 해서 타락했다며 도덕적으로 더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출토된 유물과 벽에 그려진 그림에 여성 상위 체위가 많이 등장한다고 하여 고대 로마 여성들의 권리가 높은 편이었다는 서술은 좀더
조심스러워야할듯. 어찌 되었든 모든 여성은 그들이 속한 계급의 아래쪽에 속하지 않은가. 로마 귀부인 소수가 암암리에 연애와 혼외정사를 즐겼다고
하지만 하층 여성들의 기록이 없기에 속단할 일이 아니다. 내가 좀 예민해서인지, 난 이런 점을 가지고 침소봉대하여 여성이 성적 매력으로 권력을
누리고 어쩌구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어쩌구 하는 일부 저질스런 대중 역사서 필자들의 헛소리가 싫다. 아, 이 책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이 말하는 로마 여성의 지위는 그리스 여성과 비교해서 딱 알맞은 정도만 논한다.
여튼, 책에는 소소하게 읽을 거리가 많다. 거룩한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창가에서 화대를 지불하기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동전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나 다양한 체위가 그려진 그림판 등등. 대부분은 거의 오늘날 현대인들의 성생활 모습과 비슷하다. 뭐
동영상 대신 창문에 체위 그림판을 노예가 열나게 갈아 끼웠다는 차이 정도? 확실히 다른 점은 고대 로마인들은 남성의 양성애를 허용?장려?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그런데 성인 로마 남성이 14세 이하 자유민 소년과 관계하거나, 남-남 관계에서 수동적 역을 맡는 것은 법으로 처벌받는다는
것. 그러나 노예나 남창을 상대로 남성 역할을 하는 것은 허용되었단다.
로마 시대 남성은 양성애자였다. 사실 로마 시대의 도덕은 사내아이를 이런 방향으로 교육하고 이끌었다.
(중략) 왜냐하면 지배에 대한 남성의 생각은 여성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모든 것을 지배해야 했다. 로마 남성은 승리자가 되어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국의 백성에게는 무기와 법을 통해서, 다른 로마인들에게는 재산이나 사회적인
신분을 통해서, 하층민들에게는 성생활을 통해서 말이다. 요컨대 그의 남성다움은 그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타인을 복종하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타인이라 함은 모든 사람들, 즉 남자, 여자, 아이들을 의미한다. (중략) 로마시대 남자는 성적으로 절대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패배한 적군의 병사들과 남색 행위를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 본문 65~66쪽에서 인용
남성의 동성애는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포로와 적, 노예, 해방노예 혹은 외국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들과 남색 행위를 했다.
타인의 남성성을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권력과 지배의 형태이지 쾌락은 아니었다.
- 본문 317쪽에서 인용
이런 점은 놀랍다기 보다, 성관계가 갖는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한 면을 보여주어 흥미롭다. 말하자면 페니스 제국주의 아닌가. 이렇게 어느
면에서는 지금과 매우 달라 낯설고 이상한, 다른 시공간의 풍습이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본질을 더 적나라하게 밝혀 주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책을,
미시사를 읽게 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