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6권 중 1권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나스타사 스틸은 학보사 기자인 친구 캐서린 대신 인터뷰 대타로 나가서 재벌남 크리스찬 그레이를 만난다. 둘은 서로 호감은 느낀다.
그레이는 만 사천 달러에 달하는 초판본 <테스>를 선물하면서 자신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아나는 그레이에게 빠져 들어 생애 첫
성관계를 한다. 그레이는 아나에게 비공개 합의서를 제안한다. 3달간 BDSM 섹스를 하는 계약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섹스만 하며,
같이 침대에서 아침을 맞지도 않고 아나는 그레이를 만질 수도 없다. 그레이는 아나에게 졸업선물로 아우디를 선물하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아나는 이 상황이 버겁다. 계약서에 사인은 안 했지만 육체적인 사랑을 한가지씩 그레이에게 배워 간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류에 주로 등장하는 순진한 처녀와 경험 많은 부자 남자의 연애담이다. 1권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토머스 하디의 고전 소설
<테스>가 베이스로 깔린다는 점.
어째서
제게 위험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경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숙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들은 이런 속임수가 나오는 소설을 읽으니까요,,,,,,
-
89쪽
위
부분은 초판본 테스를 선물할 때 그레이가 보낸 메모다. 부자 난봉꾼 알렉 더어버빌에게 유린당한 테스가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따지는 장면이다.
그레이는 이런 식으로 아나에게 경고를 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손을 잡고 바랜 흰색의 커다란 소파로 끌고 갔다. 소파에 앉으며 나는 악명 높은 알렉 더어버빌의 새 저택을 보는 테스
더비필드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중략)
"난
당신을 엔젤 클레어처럼 어이없이 높은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알렉 더어버빌처럼 타락시킬 수도 있으니."
-
151쪽
위
부분은 그레이의 대저택에 아나가 처음 간 장면. 그리고 그레이의 대사. 아마 그레이의 이름이 화이트도 껌정도 아니고 그레이인 것이,
그레이는 엔젤도 알렉도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름
이야기 말 나온 김에 더 이야기해보자. 그레이라는 성씨에 대해서는 위에 썼다. 그렇다면 이름인 크리스천은? 나는 존
번연의<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의 크리스천 그레이 역시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아나만을 추구해야 구원받으리.
아나의 절친 캐서린, 즉 케이트의 캐릭터는 부잣집 말괄량이 딸이다. 이는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아나의 남자 사람 친구는 호세다. 문학에서 유명한 호세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에 등장하는 돈 호세. 그렇다면 그는 아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혼자 구애하다가 배반감에 혼자 몸부림칠 운명이다. 미리 말하자면, 나중에 아나를 성추행했다가 해고당하는 아나의 직장 상사남은
잭 하이드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그 하이드! 그렇다면 여주인공 아나는 왜 아나스타샤인가? 그 이유는 맨 밑에
쓰겠다.
그렇다.
'내 몸의 가장 깊고 어두운 부분의 근육이 무척 맛있게도 조였다.(178쪽)' 이런 표현이 곳곳에 있어서 후끈한 성애소설인줄 알았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은근 문학적이다. 변태 소설 아니다. (아님, 이 야한 소설을 읽으며 연필 들고 이런 것 메모하는 내가
변태인가? -_- ) 이 점에 여주인공 아나의 캐릭터가 보인다. 왜 이렇게 아나가 쉽게 그레이에게 빠져 드는지. 물론 그레이는 '사람이 이렇게
잘 생겨도 법에 걸리지 않는 걸까?(197쪽)'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생겼다. '그에게서는 갓 세탁한 리넨과 비싼 바디워시 냄새가 풍겼다.
아, 취할 것만 같았다.(79쪽)'일정도로 그는 돈냄새도 팍팍 풍긴다. 늘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정도로 낭만적이며, 근무시간에 닭살 메일을 열라
보낼 정도로 애정 표현에 부지런하다. (남성 여러분, 사실 외모나 돈 보다 닭살 애정 표현이 가장 중요해요. 여자들은 비싼 선물 안 사주는
것보다 연락 자주 안 하는 것, 사랑한다는 말 자주 안 하는 것에 더 상처입어요.) 문제는 그레이가 변태이고 여자를 아프게 한 다는 것.
그런데도 아나는 그레이에게 너무도 쉽게 빠져든다. 왜일까?
가끔은
내게 무슨 이상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소설 속에 나오는 낭만적 주인공들과 너무 오랫동안 함께 지낸 탓에 결과적으로 이상형이나
기대치가 넘 높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도 나를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지 못했다.
최근까진
그랬지.
-
40쪽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면 벌컥 화를 내겠지. 제인 에어라면 덜컥 겁을 내겠지. 테스라면 굴복할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347쪽
그건
바로 아나가 '연애를 책으로만 배웠어요' 스타일이었던 것. 이건 뭐 이 리뷰를 읽고 계신 여성 글벗분이라면 십분 이해할 것이다. 아마 당신도
문학 소녀로 자라 소설 속 사랑에 익숙해 현실의 남자에게 매력을 못 느꼈을 테니까. 어찌어찌하여 연애하고 결혼했지만 지금 당신 옆에서 고장난
냉장고처럼 코 골고 자는 남자에게서 받는 허전함 때문에 책 읽고 블로그에 리뷰 쓰며 살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이 웃긴 리뷰까지 읽게
되었을테니까! ㅋㅋ)
게다가
아나의 엄마는 아나 말에 따르면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이며 현재 4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아마도 아나 입장에서는 사랑과 결혼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심히 책 읽고 공부만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바로 대학 다니던 시절의 저입니다. 믿으셔요.) 그러다, 그동안
호세 같은 학교 남자애들 만 보다가 처음으로 성인 남성을 만났다. 그레이. 게다가 졸업을 앞둔 시점이다. 졸업이라, 이제 성인이 되어 뭔가
색다른 모험을 하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할 때 아닌가. 영화 <졸업>처럼.
하지만
아나의 첫 사랑이자 첫 섹스 상대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쉽게들 '백마 탄 왕자'라고 표현하는 재벌남. 백마 탄 왕자는 결혼할 공주를 찾기
위해 백마 타고 싸돌아다닌다. <겨울 왕국>의 한스 왕자처럼 형이 많아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없기에 이웃 나라의 여왕이 될 외동
공주나 맏공주를 꼬시려 하는 것이다. 이미 상속이 확정된 장남 왕자는 결혼할 공주를 구하러 모험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왕자처럼
자신의 성에서 공주들을 맞이한다. 그래도 장남 왕자가 백마 타고 싸돌아다닐 때가 있다. 그건 사냥하거나 왕국 시찰할 때. 그때 보고 찜한 평민
아가씨는,,, 왕자의 하룻밤 상대가 된다. 혹은 첩이 된다.
계약
규칙
개인
관리 :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 외 다른 어떤 사람과도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서브미시브는 항상 품위 있고 겸손한 태도로 행동한다. 자신의 행동이 도미넌트의 품격을
곧바로 반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167쪽
15.22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의 명령 없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 앞에서는 항상 눈을 내리깔고 조용하고도 존경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15.
23 서브미시브는 항상 도미넌트를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그를 주인님, 선생님, 그레이 씨, 혹은 도미넌트가 명령한 호칭으로만 부른다.
-
267쪽
위의
게약서를 보라. 이건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다. 주종관계다. 과거 서양의 첩, 여자 노예들의 태도에 대한 글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이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레이는 아나와 사랑할 생각이 없으며 자신의 빨간 방, 오락실에 묶어두고 섹스만 즐기려 한다.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주인님이라 불리기를 원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가 보기에, 아나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프린세스가 되고 신분상승할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첩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
사람은 그냥 새 장난감을 찾는 거야. 침대에서 가지고 놀고 말로 할 수 없는 일을 시킬 편리한 새 장난감. 내 심장이 아프게 죄어왔다. 이게
현실이었다.
-
312 쪽
아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첫 사랑과 첫 섹스가 자신에게 열어준 새로운 세상에 눈 멀어 이런 자신의 반응에 혼란스러워 점점 힘든 길로 제발로
걸어간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아나스타샤인 것이다. 아놔~! 스타샤! 왜 그러는 거니? (이건 농담이고, 맨 밑에 아나스타샤 이름 분석이 있음)
물론
우리는 1권밖에 안 읽었지만 뻔히 안다. 아나의 지극한 사랑이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아나는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임을.
소설은 해피엔딩일 것임을.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의 구조에서 나는 혁명성을 느낀다. 평민 여성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는 골빈
여자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꿈이 아니라, 힘없는 평민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노예로 이용당하지 않고 대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으려는 혁명적 요구! 나는 이 점에 착안해서 자그마치 6권이나 되는 그레이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진짜, 학구적 이유였다니까요! )
*
역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아나스타샤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다.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는 공주이지만 공주 아닌 공주인듯,,, 그런 존재인가?
하지만
난 여기서 그녀의 이름을 어원분석하고 싶다.
아나스타샤,
Anastasia는 그리스어 이름 아나스타시오의 여성형이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타샤는 나탈리아이다. 아나스타샤의 애칭이 아니다)
위로,
다시라는 의미의 ana와 서다란 의미의 stasis가 합쳐져서 부활이란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아나스타샤 스틸은 엉망진창 50가지 빛깔로 망가진 그레이를 재생, 부활시키는 구원의 여성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이름 그대로 그레이를 끊임없이 다시 위로 세우는 여성이기도 하다. (애들은 몰라도 됨) 세어보니 최대가 하루에 4번.
이
소설의 작가가 이것까지 알고 작명을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여기 쓴 이름 관련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순전히 나의 개인적
의견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