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실익과 명분의 천 년 역사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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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 내에서 황제당과 교황당의 대립을 생각해보다가 찾은 책이다. 전공 외 분야 사람이 쓴 일본 대중 역사서에 대해 약간 경계하는 마음이 있는 지라, 책 주문하기 전에 좀 망설였다. 리뷰도 하나도 없었고. 단지 역자이신 이경덕씨 이름만 보고 주문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 상당히 책이 마음에 든다.

 

잘은 모르지만 고대 로마 제국이나 동로마제국에 대한 책은 많은데 비해 신성로마제국을 한 번에 꿰어 서술해주는 책은 없는 것 같다. 비슷한 컨셉의 책으로, 전에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란 책을 도서관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왠지 산만하고 짜깁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절판이어서 다시 참고하려고 보니 이제는 책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이쪽 역사는 독일사, 오스트리아사, 이탈리아사, 네덜란드사, 스페인사 등등에 걸쳐져 있기에 한 권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 책을 만나서 반갑다.

 

이 책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나폴레옹 시대까지 약 천 년을 다루고 있다. 800년 샤를마뉴가 서로마제국 황제가 되고 962년 오토 1세가 황제가 되며 1034년 '로마제국'이란 명칭이 잘리에르 왕조의 공식 문서에 첫 등장한다. 1152년에는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제후 소집장에서 사용하며 1254년,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이란 국호가 홀란트 백작 빌렘에 의해 등장, 1512년 막시밀리안 시절에는 '독일 국민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과거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을 계승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결코 세계제국인 적이 없었다. '독일 국민의'라는 수식어가 나중에 붙은데서 알 수 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은 기독교의 수호자란 입장과 세계제국 표방을 결코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여기에서 독일을 중심으로한 유럽 역사의 여러 독특한 문제가 발생한다. 황제들의 이탈리아 지배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종교 전쟁을 벌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후들에게 지나친 권한을 준 결과 독일의 독특한 연방제 역사가 형성되었다든가,,, 이후 나폴레옹의 황제에 대한, 히틀러의  제국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많은 것을 파악하게 해 주는 책이다.

 

위와 같이 요약해 놓으니 책이 지나치게 연대기적이고 딱딱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혀 딱딱하고 지겹지 않다. 오스트리아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군데군데 문학적이고 위트있는 표현을 숨겨 놓고 있어서 독자에게 은근 읽는 재미를 준다.

 

요컨대 제국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은 신성로마제국을 단순한 독일제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 당국 또한 최후의 보루였던 '신성'이란 말을 이미 버렸다. 즉 당시 제국은 유일한 생명 유지 장치를 스스로 떼어내고 이미 숨을 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프란츠 2세의 제국 해산 칙서는 제국의 사망 진단서가 아니라 유체의 매장 허가증과 같은 것이었다.                                  - 본문 19 ~ 20쪽.

 

그는 철두철미하게 훌륭하지 않은 황제였다. 다만 그에게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무기가 하나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유일한 기술은 오래 사는 것이었다. 그가 끈덕지게 살아 있는 동안 "신은 적을 죽였다."                - 본문 188쪽.

 

위와 같은 표현,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 의아한 점, 잘못된 점

 

* 44쪽 서기 800년경 카를 대제의 제국 지도인데 그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 베네치아 공국이 무언지?

* 95쪽 슈타우펜, 벨펜 집안 계보도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독안공이다. 하인리히 오만공이 아니다. 잘못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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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낭인 2016-02-2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시 베네치아가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었음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요? 물론 형식적으로는 비잔틴 제국령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친비잔틴 / 친프랑크 / 독립파 등으로 나뉘어 갈등이 있던 때이지만요...

껌정드레스 2016-02-23 10: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본문 리뷰에 지도 사진 추가했습니다. 보시면 제가 왜 그런 지적을 했는지 알 거에요. 베네치아가 저 위치에 있으면 안 되지요.

낭만낭인 2016-02-2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네벤토 공국이군요... 위의 스포렌체도 스폴레토 공국일 겁니다. 사르데냐도 이름은 틀리지 않았지만 아직까진 비잔틴령이었을텐데... 그러고 보니 애시당초에 멸망해버린 부르군트 왕국도 프랑크 왕국의 오기인 듯합니다. 진짜 엉망진창인데, 감수도 제대로 안 한건지? -_-;

아무튼 좀 더 정확한 지도는 샤를마뉴 사후지만 아래를 참고하시는 게 좋겠네요.
http://www.edmaps.com/empire_charlemagne1.jpg

껌정드레스 2016-02-24 14:1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부르고뉴도 아니고 저 시대에 부르군트라니!
다시 자세히 보니 말씀대로 총체적으로 엉망진창인 지도네요.
 
반지의 문화사 - 역사문화라이브러리
다카시 하마모토 지음, 김지은 옮김 / 에디터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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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의 <문장으로 살펴보는 유럽 역사>를 매우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뭐 건질 수 있을까, 하는 목적으로 읽었지만 다 기본적인 진술들 뿐이었고, 새롭거나 깊이 있거나 뜻밖의 해석은 전혀 만나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유익했던 점은 이런 거다. 이 저자도 독일문학 전공인데 자신의 전공 쪽 자료 섭렵하던 와중에 접한 자투리 지식이나 궁금증을 모아 이렇게 틈새 시장의 대중 역사서를 썼다는 점. 일본 대중 역사 집필자들을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자기 분야 스페셜리스트이면서 인접 분야의 제네럴리스트인 것인데, 이 와중에 상당히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를 씨줄 날줄 엮어 보여주는 신선함이 있다. 아, 이러다 일본인들보다 일본인 저자들을 내가 더 많이 읽을듯.

 

내용은 이러하다. 커다란 역사적 체계는 없고 그냥 이모저모 다루고 있다. 처음의 반지는 인장에서 출발했다는 것, 그리고 무기, 독 넣은 반지, 골무 등등의 실용적 목적을 가진 반지들을 소개해 준다. 반지의 민속학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바다와의 결혼' 의례를 소개하고, 약혼 · 결혼반지의 역사를 간략히 알려준다. 반지가 정치적 · 종교적 권위를 상징한다는 점을 이어서 서술하고, 반지의 상징성을 이야기 해 준다. 반지의 원은 영원을, 우리 몸을 묶는 것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구속을 상징한다는 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심지어 하트는 사랑의 심벌이라는, 정말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도 해 주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에 비해 좀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외 반지, 장갑, 반지의 유행, 탄생석과 반지 이야기를 거쳐 고대 신화, 전설, 그림 동화 속의 반지 이야기가 등장하며, 마지막에 니벨룽겐의 반지 이야기가 아주 조금 나온다. 내 독서 의도와 달라, 내 글쓰기에 필요한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해서 아쉽다. 도판이 풍부한 점은 아주 마음에 든다. 유럽의 민속 박물관을 간다면 더 많은 것이 이 책 덕분에 보일 것 같다.

 

이 저자분, 더 지켜보고 신작 번역서를 기대해볼 만한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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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뒷골목 풍경 - 유랑악사에서 사형집행인까지 중세 유럽 비주류 인생의 풍속 기행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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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을 전공하신 저자가 쓴 대중 역사서이다. 제목과 목차를 보고 악사, 사형집행인, 목욕탕, 매춘의 집 등등 말 그대로 유럽 중세의 뒷골목 풍경에 대한 새롭고 획기적인 이야기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입해 읽었지만 좀 아쉽다. 보다 전문적으로 깊이 있게 쓰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읽어가면서, 저자분이 더 많은 것을 아시는데 쉽게 전달하느라 많이 줄이셨다는 것이 행간에 느껴졌다. 하지만 중세 유럽 미시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롭게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가 될 것 같다.

 

저자분은 학자답게 객관적으로 수집하신 1차 사료를 정리해서 전달해주시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객관적'인 시각이 나는 조금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 루크레치아 보르자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연대기 등에 기록된 대로만 그녀를 서술해 주면 당연히 엄청난 탕녀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당시 보르자 교황(알렉산드르 6세)에 호의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기록된 자료를 당시에 기록된 1차 사료라고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어차피 대중 역사서인데 저자분께서 조금 가이드를 해 주셔도 좋았을 뻔 했다. 나는 중세사의 에피소드를 너무 흥미거리로 소비하게 만드는 서술 방식이 싫다. 아, 이 저자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일본 공동집필 대중 역사서 번역서에서 흔하게 보이는 기묘하거나 잔인하고 성적인 에피소드 나열하는 중세사 책들 말하는 거다. 이 책은 정말 객관적으로 자료를 충실히 전달해 주신다. 절대 흥미거리로 역사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기에, 그 기본 자료가 어떤 맥락에서 기록되었는지, 역사 배경을 모르는 초보 독자들에게는 이 책도 흥미거리 에피소드 소비용으로 쓰일 수가 있을까봐 하는 말이다.

 

목판화 등 600점이 넘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셨다고 하는데 책에 많이 실려 있지 않은 것도 아쉽다. 그리고 4부 뒷골목의 정치는 바르바라 한 사람 제외하고 다 웬만큼 행적이 많이 알려진 유명인이어서 책의 취지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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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 잠들지 않는 전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5
장 마리니 지음 / 시공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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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관련 자료를 찾다가 읽게 된 책이다. 사실, 자료 찾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흡혈귀의 역사에 대한 한 권짜리 책은 이 책 밖에 없다. 나머지는 문학으로서 드라큘라 비평 몇 쪽짜리 글, 영화로서 드라큘라 비평 몇 쪽짜리 글,,, 뭐 이 정도 였다. 아니면 오컬트 쪽으로 마녀, 늑대인간과 같이 조금 서술된 정도. 생각 외로 자료가 없었다.

 

시공사 시리즈 답게 가벼운 가격에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도판, 사진 자료도 풍부해서 좋다. 저자는 고대부터 기록된 흡혈귀에 대한 신화, 전설부터 중세 연대기에 기록된 흡혈귀에 대한 기록들,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흡혈귀 문학 대유행 시기를 거쳐 그 정점,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다루고 그의 영화화로 흡혈귀의 전형을 완성하기까지 역사를 서술한다. 물론 그 이후 현대에 와서 이제는 흡혈귀가 사회 속에서 박해받는 소수자를 상징하는 존재로 영상 매체에 등장한다는 사실까지 빼놓지 않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까지, 책의 내용이다.

 

이제부터 내 생각 시작이다. 내가 관심있게 본 드라큘라와 관련해서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상황만 서술하고 있어서 아쉬웠다. 서구 백인 남성이기에 그 정도 밖에 안 보이는가? 하는 건방진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유명하신 국내 필자들께서 드라큘라 소설, 영화 비평 쓰실 때에 이 책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베꼈군, 하는 것도 다 보여서 좀 웃겼다. 왜들 천편일률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이중적 도덕관 운운하나 했더니,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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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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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같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모든 사물의 기(氣)를 믿는다. 특히, 책의 기(氣)를 믿는다. 내가 이번에 된통 앓아눕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분명 이 책이 내뿜는 비극적 기(氣)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바이러스겠지만, 하지만, 내가 아프기 전에 머리 쥐어뜯으며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이 책이었고,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2차대전 수용소 문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난 세파라딤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1941년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유대계였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했다. 하지만 곧 파시스트 군인들에게 습격을 당해 포솔리 임시수용소를 거쳐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같이 수용된 유대계 이탈리아인들이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운 좋게도 그는 가스실로 향하는 '선발'을 피해 1945년 1월 해방까지 10개월을 버티었다. 특히 작가는 화학 전공자였기에 나치의 화학 실험실에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근무할 수 있었기에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그는 실험실에서 이 글의 기초가 되는 원고들을 썼다가 해방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 책을 내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의 특징은, 나치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 없이 없이 수인들에 대한 관찰 묘사과 자신의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문장이 가능한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오히려 읽어나가다 보면 잘 드는 회칼로 심장을 베는듯한 아픔과 무서움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단테의 <신곡>과 오딧세우스의 귀향 부분을 시로 읊어대며 버티는 그의 문장, 얼음으로 만든 칼날이다. 그러기에 난 이 책을 어떻게 리뷰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하, 본문에서 인용한 구절로 채워 리뷰를 진행한다. 부디, 내 친구들은 '날로 먹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시길.

 

레비 일행은 밖에서 잠구는 수용소 기차에 태워져 물 한 모금 공급받지 못하고 아우슈비츠에 짐짝처럼 부려진다. 노동시킬 사람과 죽일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그들은 구타당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17쪽)라고 쓴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작가는 시간이 한 방울씩 흐른다(27쪽)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같이 기차를 타고 온 여자들과 아이들은 처형당한 후였다.

 

그리고 수용소의 일상의 폭력에 대면한 그는 곧 침착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34쪽)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모든 모욕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으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57,58쪽)라고.

 

하지만 그는 나치에 대한 직접적 증오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치란, 얼굴이나 이름을 직접 대면해서 알 수 있는 실체가 아니어서 증오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 가까이 있는 동료 수용자들에게서 생생한 공포를 본다. 공포는 노예를, 증오는 주인을 움직이는 힘이(60쪽)라는 것을 알아채린 그는 자신들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81쪽)라고. 아아, 육체가 죽기 전에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자신을 의식하고 이를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고통이었을까!

 

이렇게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인간의 고귀함이나 연대의식 따위는 사라진다. 타인에 대한 선의나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 대한 양보 따위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치 배급받는 빵이나 죽이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94쪽)에 서술되어 있듯.

 

수용소 내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빵, 죽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박해받는 유대인끼리의 동병상련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치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혹은 유대인들의 연대의식 생성을 막기 위해 일부의 유대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조수 비슷한 임무를 맡긴다. 이를 보는 작가 레비의 시선은 이렇다. 유대인 특권층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과거, 고래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되며,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137쪽)

 

이런 수용소 생활의 면면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평소 상상과 다름에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약자들의 연대라든가 조직적인 저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려울 때에 더욱더 빛을 발하는 인간애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억압당하던 유대인의 일부는 자신들이 특권층이 되면서 나치에게 당한 것 이상으로 동료 유대인을 억압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모습을 작가는 담담히 묘사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억압자들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피억압자들은 저항을 하면서,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고통을 참으면서 서로 결속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모든 나라에서, 지배를 당한 사람들끼리 적대감과 증오심을 느끼는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다른 인간적 특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용소에서 특별히 잔혹한 증거들을 포착할 수 없다. (138쪽)

 

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이렇듯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작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가 차라리 빵 한 덩이에 목숨 걸고, 나치에 대한 증오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간 유형이었다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가는 끝까지 이들 인간아닌 인간 군상을 보면서 자신의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인간됨을 끝까지 지키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생존하는 것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한, 순교자나 성인의 기질을 타고난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이었다.(140쪽)라고 화학 실험실에서 몰래 숨어서 이 책의 초안을 작성한 작가는, 순교자도 성인도 아닌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고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서 (작가의 말 중) 이 책을 쓴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지만, 영혼까지 살아 남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육체가 살아 남아 이 책을 쓴 작가 프리모 레비는 1987년, 끝내 자살했다.

이것이 프리모 레비, 그란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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