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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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같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모든 사물의 기(氣)를 믿는다. 특히, 책의 기(氣)를 믿는다. 내가 이번에 된통 앓아눕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분명 이 책이 내뿜는 비극적 기(氣)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바이러스겠지만, 하지만, 내가 아프기 전에 머리 쥐어뜯으며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이 책이었고,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2차대전 수용소 문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난 세파라딤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1941년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유대계였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했다. 하지만 곧 파시스트 군인들에게 습격을 당해 포솔리 임시수용소를 거쳐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같이 수용된 유대계 이탈리아인들이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운 좋게도 그는 가스실로 향하는 '선발'을 피해 1945년 1월 해방까지 10개월을 버티었다. 특히 작가는 화학 전공자였기에 나치의 화학 실험실에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근무할 수 있었기에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그는 실험실에서 이 글의 기초가 되는 원고들을 썼다가 해방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 책을 내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의 특징은, 나치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 없이 없이 수인들에 대한 관찰 묘사과 자신의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문장이 가능한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오히려 읽어나가다 보면 잘 드는 회칼로 심장을 베는듯한 아픔과 무서움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단테의 <신곡>과 오딧세우스의 귀향 부분을 시로 읊어대며 버티는 그의 문장, 얼음으로 만든 칼날이다. 그러기에 난 이 책을 어떻게 리뷰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하, 본문에서 인용한 구절로 채워 리뷰를 진행한다. 부디, 내 친구들은 '날로 먹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시길.

 

레비 일행은 밖에서 잠구는 수용소 기차에 태워져 물 한 모금 공급받지 못하고 아우슈비츠에 짐짝처럼 부려진다. 노동시킬 사람과 죽일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그들은 구타당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17쪽)라고 쓴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작가는 시간이 한 방울씩 흐른다(27쪽)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같이 기차를 타고 온 여자들과 아이들은 처형당한 후였다.

 

그리고 수용소의 일상의 폭력에 대면한 그는 곧 침착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34쪽)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모든 모욕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으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57,58쪽)라고.

 

하지만 그는 나치에 대한 직접적 증오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치란, 얼굴이나 이름을 직접 대면해서 알 수 있는 실체가 아니어서 증오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 가까이 있는 동료 수용자들에게서 생생한 공포를 본다. 공포는 노예를, 증오는 주인을 움직이는 힘이(60쪽)라는 것을 알아채린 그는 자신들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81쪽)라고. 아아, 육체가 죽기 전에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자신을 의식하고 이를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고통이었을까!

 

이렇게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인간의 고귀함이나 연대의식 따위는 사라진다. 타인에 대한 선의나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 대한 양보 따위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치 배급받는 빵이나 죽이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94쪽)에 서술되어 있듯.

 

수용소 내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빵, 죽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박해받는 유대인끼리의 동병상련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치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혹은 유대인들의 연대의식 생성을 막기 위해 일부의 유대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조수 비슷한 임무를 맡긴다. 이를 보는 작가 레비의 시선은 이렇다. 유대인 특권층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과거, 고래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되며,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137쪽)

 

이런 수용소 생활의 면면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평소 상상과 다름에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약자들의 연대라든가 조직적인 저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려울 때에 더욱더 빛을 발하는 인간애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억압당하던 유대인의 일부는 자신들이 특권층이 되면서 나치에게 당한 것 이상으로 동료 유대인을 억압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모습을 작가는 담담히 묘사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억압자들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피억압자들은 저항을 하면서,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고통을 참으면서 서로 결속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모든 나라에서, 지배를 당한 사람들끼리 적대감과 증오심을 느끼는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다른 인간적 특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용소에서 특별히 잔혹한 증거들을 포착할 수 없다. (138쪽)

 

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이렇듯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작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가 차라리 빵 한 덩이에 목숨 걸고, 나치에 대한 증오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간 유형이었다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가는 끝까지 이들 인간아닌 인간 군상을 보면서 자신의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인간됨을 끝까지 지키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생존하는 것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한, 순교자나 성인의 기질을 타고난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이었다.(140쪽)라고 화학 실험실에서 몰래 숨어서 이 책의 초안을 작성한 작가는, 순교자도 성인도 아닌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고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서 (작가의 말 중) 이 책을 쓴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지만, 영혼까지 살아 남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육체가 살아 남아 이 책을 쓴 작가 프리모 레비는 1987년, 끝내 자살했다.

이것이 프리모 레비, 그란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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