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 언니, 그 기사는 연재 칼럼이 아니라 납량특집으로 청탁받아 쓴 글이에요.

중앙일보사의 어린이청소년지 <소년중앙 위클리>7월 6일자 지면에 실립니다.

 

아래 링크로 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주의  : 그림이 좀 무섭습니다.  그림은 제가 주문한 것이 아닙니다. ^^;; )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5&aid=0002503006&date=20150705&type=1&rankingSectionId=103&rankingSeq=1

 

그런데 제가 송고한 글에서 한 문단이 잘렸어요.  원문 아래에 파란 색으로 표시해서 부가합니다.

 

 

<왜 어린이들은 귀신 이야기를 좋아할까?>

 

여름이다. 열대야를 시원하게 보내려면 무서운 이야기가 최고다. 귀신과 유령, 요괴와 미라가 나오는 만화나 영화, 이야기들은 빙수처럼 짜릿하고 중독성이 있다. 그런데 왜 어린이들은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밤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무서워하면서도 아침이 되면 무서운 이야기를 또 찾아보는 이유가 뭘까?

 

유럽에는 유령 전설이 있는 오래된 성이 많다. <해리 포터>를 보면 각 기숙사마다 유령이 하나씩 있을 정도다. 래번클로 기숙사의 유령인 회색 숙녀(Grey Lady : 회색으로 greygray 둘 다 씀)’는 영국 런던탑의 유령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가 모델이다. 1553,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에드워드의 5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는 주위 세력에 떠받들여져 여왕이 된다. 에드워드의 친누나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기까지 단 9일동안의 여왕이었다. 다음해 212, 제인 그레이는 갇혀있던 런던탑에서 처형당했다. 지금도 매년 처형당한 날이면 하얀 옷을 입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유령이 런던탑에 나타난다고 한다. 정복왕 윌리엄이 1078년에 세운 성채인 런던탑은 왕족, 귀족의 감옥과 처형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종종 유명인의 유령을 목격한다. 삼촌인 리처드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 공작의 유령도 런던탑에 자주 나타난다. 런던탑에 갇혔던 형제는 1483년 경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친척 어른들의 정치 욕심에 희생당한 이들은 사망 당시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17, 에드워드 5세는 겨우 12세였다. 이들 유령 전설의 바탕에는 피비린내나는 역사에 희생된 약자에 대한 동정,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민중들의 죄책감이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마귀할멈은 오니바바라고 부른다. 지역마다 다양한 오니바바 이야기가 있는데 후쿠시마현에 전해지는 아다치가하라의 오니바바가 가장 유명하다. 오니바바는 지나다니는 나그네를 잡아먹는 요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이야기에 겨우 다른 지역간의 이동을 금하고 태어난 곳의 영주들에게 충성하라는 일본 중세 지배자들의 교훈이 있나 싶어 시시해진다. 그런데 오니바바의 내력을 알고 보면 이면적 주제가 보인다. 오니바바는 원래 교토 귀족 집안에서 유모로 일했다. 원래 이름은 이와테였다. 모시던 아가씨가 병에 걸려 태아의 생간을 먹어야 낫는다는 처방을 받자 이와테는 임산부를 찾아 나섰다. 아다치가하라에 이르러 집을 짓고 길 가는 임산부를 기다렸다. 15년이 지나 드디어 만삭의 임산부가 이와테의 집에 머물렀다. 이와테는 임산부를 죽이고 태아의 생간을 꺼냈다. 그런데 눈에 익은 부적이 임산부의 품 안에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교토를 떠날 때 딸에게 준 부적이었다. 충격을 받은 이와테는 즉지도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귀신이 되었다. 결국 오니바바 이야기는 지배자들에게 충성해봤자 아무 의미없고 자신만 손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일본에는 이렇듯 겉보기에는 그저 무섭지만 알고보면 엄격한 신분질서 아래 오랫동안 억눌렸던 일본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요괴 이야기가 많다. 더 궁금하면 우물에서 접시 세는 귀신 이야기를 찾아 보시라.

 

이번에는 중국으로 가 볼까. 중국에는 요괴가 미녀로 변해 순진한 청년을 유혹하는 이야기가 많다. 대개 남자가 기빨려 죽기 전에 도사가 구해준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천녀유혼>, <청사> 등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청사>의 원작은 항저우 지방에 전해지는 <백사전>이다. 천년 묵은 흰뱀 백소정은 선비 허선과 사랑에 빠진다. 금산사의 법해법사는 백소정의 정체를 알고 허선을 요괴로부터 구하려한다. 백소정은 목숨을 걸고 법사와 싸워 사랑을 지킨다. 결국 허선은 천년 묵은 백사라는 것을 알지만 백소정의 진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만 보면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연인들이 사랑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항하며 사랑을 지키는 이야기다. 옛날에는 자신과 다른 계급이나 집단에 속한 상대와의 사랑이 금지되었다. 기생의 딸 춘향이의 사랑도, 원수 집안의 딸 줄리엣의 사랑도 금지되지 않았는가. 사회가, 기성세대가 반대하는 사랑에 빠진 자에게는 상대가 사람이든 뱀이든 요괴든 별 차이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닌 요괴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법사와 대결하는 이야기는 약자의 사랑할 권리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예전 음료수 광고처럼 으아!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귀신으로는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유명하다. 우리나라 처녀귀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함이 풀리면 인사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대표적인 처녀귀신 이야기로는 <장화홍련전>이 있다. 평안도 철산의 배좌수는 장화홍련 자매를 두고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허씨에게 새 장가를 든다. 계모 허씨는 장화에게 누명을 씌워 연못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이 사실을 안 홍련은 그 연못에 찾아가 자살한다. 귀신이 된 자매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철산부사를 찾아가지만 다들 놀라 죽는다. 그러던 중, 정동우라는 사람이 철산부사로 자원해 와서 귀신 자매의 하소연을 듣고 자매의 한을 풀어준다. 장화홍련 자매는 돌봐줄 친엄마가 없는 가정 내의 약자였다. 친아버지 배좌수는 자매를 보호하지도, 계모 허씨의 악행을 말리지도 않았다. 결국 처녀귀신 이야기는 가정 내의 약자인 소녀들이 죽은 후 귀신이 되어 자신이 당한 억압을 고발하는 이야기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힘이 없어 당하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복수할테니 당장 악행을 중지하라는 약자의 저항,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니 혹시 귀신을 만나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귀 기울여 사연을 들어 볼 일이다.

 

약자의 저항과 경고가 담긴 무서운 이야기라고 하면 이집트의 미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라는 대개 서구 제국주의 침략기인 19세기~20세기 초반에 이집트에서 서구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미라가 된 죽은이의 안식을 방해하는 도굴꾼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 1922년 발굴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유래한 파라오의 저주가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당시 발굴 관련자 중 22명이 사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발굴 당시보다 한참 늦게, 그 시절 평균 사망 연령보다 고령으로 사망했기에 이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파라오의 저주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미라의 저주를 즐겨 말한다. 이는 사실 관계를 떠나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 이야기는 약탈을 일삼는 제국주의 침략자에게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견한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은 군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각국의 유물을 약탈해 본국으로 옮겼다. 이때 미라의 저주나 다이아몬드의 저주 등, 유물이나 보물에 얽힌 괴담이 그들의 박물관으로 함께 옮겨져 근대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미라의 저주를 이야기할 때마다 과거 도굴꾼이나 침략자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과거 범죄를 떠올리며 뒤늦게나마 죄책감을 갖고 반성하게 되었다. 반대로, 수탈당한 쪽의 입장에서는 괴담의 형식으로나마 침략자에게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미라의 저주역시 겉보기에는 그저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약자의 저항과 경고를 담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미라의 저주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이다. 일제가 신작로를 닦는데 길 한 복판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생각하고 제사를 올리는 나무였다. 일꾼들은 나무를 베면 천벌을 받는다고 하며 아무도 나무에 도끼질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신이라며 일본인들끼리 나무를 베어냈는데, 모두 줄줄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각 지방마다 마을마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런 신성한 나무의 저주 이야기는 놀랍게도 우리나라 반대편인 유럽에도 많이 있다. 고대 로마제국이 갈리아 지역을 점령할 때의 일이다. 로마인들은 원주민인 켈트족이 믿는 드루이드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를 베어낸다. 나무에 도끼질을 한 로마인들 역시 급사한다. 이런 이야기는 서양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의 우상숭배 관련해서 세계 각국에 많이 있다. 역시 겉보기로는 종교 갈등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약소 민족이 저항하는 주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 많이 있는 유령과 귀신 이야기, 괴담은 단순히 무섭지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서운 이야기는 이면적으로는 강자들에게 희생당하거나 저항하는 약자들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약자들이 죽어서 유령이 되어 출몰하거나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이야기는 이야기를 듣는 현실의 약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성 세대에 반발하기 시작하는 나이인 여러분, 바로 소년중앙 독자 연령대의 어린이, 청소년들은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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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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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 읽고 나면 참 기분 좋다. 과거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너무 처절하게 대결의식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그려내며, 유쾌하지만 진지한 소설. 이름 긴 서구 대가들의 대작 소설이 아니어도 읽고 나면 내 가슴이 묵직한 소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이다. 홍위병이 득세하던 시기를 거쳐, 어린 학생, 청소년들을 지식인이랍시고 하방 노역을 시키던 시대. 다이 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와 위화의 소설 <인생>과 <형제 1>에 등장하고, 영화 <패왕별희>에서 그려지던 바로 그 어둡던 시대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장미는 커녕 시종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다. 그렇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여도, 인간은 밥도 먹고, 연인을 구하고, 영화 이야기 듣기와 소설 읽기를 즐기는 법. 여기 힘든 시기를 사랑과 우정과 문학으로 버티며 개인적 각성에 도달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주인공과 '뤄'는 의사의 아들인 죄로 지식인으로 취급당해 산골마을로 배치, 노역생활을 한다. 발자크를 비롯한 서구작가들의 책이 든 가방을 훔친 그들은 소설읽기로 이 힘든 생활을 버틴다. '뤄'는 자신이 사랑하는 '바느질하는 소녀'에게도 소설을 읽어 준다. 각성한 소녀는 대도시로 떠나고, 나와 뤄는 그 소설들을 불태운다.

 

소설 자체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모티프가 된다는 점, 산촌의 소녀가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의 모습을 소설로 접하고 스스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소설 자체, 문학의 위대함을 다루는 소설 같기도 하다. 

 

'장 크리스토프'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재교육까지 받은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한 개인이 전세계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니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삶도 세상도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지 않았다.    

- 153쪽에서 인용

 

좋은 책이란, 그런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읽고 난후, 더이상 나는 그 책을 만나기 전의 내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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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7-05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껌정님도 읽으셨군요! ^^

자유도비 2015-07-05 08:50   좋아요 0 | URL
어젯밤에 만두언니 서재 갔다가 생각나서 올렸어요. ^^

유부만두 2015-07-05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일보 귀신이야기. 박신영 칼럼리스트, 재밌게 읽었어요! ♡

자유도비 2015-07-05 10:15   좋아요 1 | URL
아, 보셨군요. 저보다 먼저 보셨네요! ^^
그런데 한 문단 잘렸어요. 이 댓글에 넣으려니 보기 안 좋아서 위에 새로 포스팅했어요. 늘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랜드 투어 -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
설혜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그랜드 투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궁금해 읽은 책이다. 1년 전에 읽고 리뷰를 써 놓은 줄 알았는데, 최근에 영화 <트립 투 이탈리아>를 보고 생각나서 예스에서 검색해 보니 내 리뷰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통독하고 리뷰 남긴다.

 

그랜드 투어는 17 ~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에서 귀족 자제 교육용으로 크게 유행했던 여행을 말한다. 어학 연수 겸 조기 유학겸 미술관 박물관 투어 겸,,, 그런 성격이었다. 책은 최초의 그랜드 투어리스트였던 필립 시드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중세의 종교 순례 등 여행의 역사를 다룬다. 투어의 목적이 교육이었던지라 공교육 사교육 논쟁 등 당시 교육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서술한다. 17세기에야 영국에서 유럽 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이 시기가 되어서야 유럽 대륙의 종교전쟁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이 끝나자, 드디어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서, 아무 신앙적 꺼림칙함과 정적의 정치적 공격 우려 없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1장 내용.

 

2장과 3장으로 가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진다. 강단 사학자인 저자는 나같은 호기심 넘치지만 기본 역사 지식은 딸리는 독자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그랜드 투어에 대한 사실을 쉽게 전해준다. 여행 준비와 안내서, 여정 등등,,, 적당히 지도와 사진이 있어 더욱 읽기가 즐겁다. 예나 지금이나, 어학 연수가는 학생을 위한 지침서에는 현지에서는 자국인과 어울리지 말 것을 충고하는 내용이 었었다. 여정은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여기에서 일단 오래 머무른다. 유럽 상류층 사교계에 초대받아도 좋을만한 프랑스어와 매너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자연을 만끽하고 궁극의 목적지인 이탈리아로 간다. 돌아올 때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들리는 것이 정통 코스였다. 보통 2~3년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고 한다.

 

다음 4장 역시 흥미진진하다. 유럽 상류계층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한 옷차림, 외국어, 매너에 대한 내용이다. 고국에서 유럽 대륙의 유명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연줄을 동원해서 소개장을 출발 전에 미리 챙기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특히 18세기 그랜드투어리스트들은 볼테르를 만나길 원했다고 한다.

 

루소를 만난 보즈웰은 이번에는 볼테르를 만나러 떠났다. 볼테르는 18세기에 유럽을 여행한 영국인들이 꼭 만나고 싶어했던 인물이다. (중략) 볼테르 스스로 '유럽 여관 주인'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벨기에의 리뉴 공, 유명한 연애꾼인 자코모 카사노바, 디드로, 달랑베르, 에드워드 기번 등 많은 사람들이 '페르네이의 영주'인 볼테르를 방문했다.

하지만 모든 방문객이 볼테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마치 동물원을 구경하듯이 문밖에서 엿보다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구경꾼이 50명이 넘을 떄도 있었다.

- 본문 164쪽에서 인용

그 시절 유럽에도 '사생팬'은 있었던 것이다. 하하.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리 오너라~ 지나가던 과객인데 하룻밤만 부탁하오~ " 하면 주인이 사랑에 불러 술상 앞에 놓고 지적 대화 나누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알고보니 주인은 유명인, 심봤다! 뭐 이런 거. 하하.

 

이어, 5장에서는 예술을 감상하고 기념품을 쇼핑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투어리스트들은 일종의 '인증샷'으로 베네치아 풍경화를 많이 구입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는 건 사진. 6장은 여행의 동반자인 동행 교사와 하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애덤 스미스 등 유명한 동행 교사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망나니 학생들을 통솔하느라 고생하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유럽의 선진 문화를 맛본 영국의 가난한 지식인들은 그래도 행복했을까? 학생들 중에는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처럼 그랜드 투어를 유익하게 마친 경우도 있었디만 대개는 부모 감시 밖에서 본국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성병까지 걸렸다고 하니 말이다. 바이런도 유명하지 않은가. 귀국 후에 외국물 좀 먹었다고 건들거리는 이들을 '마카로니'라고 불렀다는 것도 웃기다. 1990년대에 유학 중 방학에 귀국해서 말썽 부리는 유학생들을 '오렌지족'이라 불렀던 기억과 겹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조기유학 찬반론은 이미 몇 백년 전 영국에서 활발히 논쟁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7,8장 내용이다. 9장에서는 철도 여행이 대중화 되면서 엘리트 여행인 그랜드 투어가 쇠퇴하게 된 역사를 서술했다.

 

전체적으로 책에는 재미있는 정보가 많다. 대중 역사서의 모범같은 책이었다. 이 분의 다른 저서인 <온천의 문화사>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역사서 읽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해 둘만 하다. 근대초 영국사가 주전공이신데, 아직 젊은 분이시니 앞으로의 저술을 더 기대해 본다. 이정도로 전문적 역사지식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필력,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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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커뮤니케이션 강의 지식여행자 12
요네하라 마리 지음, 홍성민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 이 책은 통역, 번역 이야기 위주다. 전체 구성은 아래와 같이 4부분.

 

사랑의 법칙

이해와 오해 사이

통역과 번역의 차이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차이

 

앞부분만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고 뒤는 전부 통역 번역 이야기다. 통역 번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언어에 대한 성찰 부분 이야기도 유익하다. 역시나, 마리 여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 주신다. 성모 마리아가 처녀인 채 예수를 잉태해 출산했다고 믿는 건 오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맨 처음 헤브라이어로 쓰인 성서에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을 라틴어로 옮길 때 '처녀'라고 번역해버려서 생긴 일이라고. 또 일본의 국제화는 영어에 치중, 미국화를 지향하는데 이건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이 아니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런데 마리 여사는 이렇게 영어에 치중하고 미국에 빠지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썼다. 아, 마리 여사도 우리 나라 현실까지는 모르셨구나.

 

그래도 내겐 통역 번역 이야기보다 첫 부분인 '사랑의 법칙'부분이 더 흥미로웠다. 문학소녀 시절의 마리는 세계 문학이란 작품을 읽을수록 화가 치밀고 불쾌해졌다고 한다. 세상에, 나도 그랬는데!

 

소설의 전성기는 19세기라서 내가 읽은 작품들은 19세기에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리 오가이, 나쓰메 소세키, 나가이 가후, 이반 투르게네프, 미하일 레르몬토프,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고 왜 화가 났느냐 하면, 일단 주인공은 남자고, 대개 남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추남이거나 속수무책에 구제불능인 남자 등 여러 타입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반면 그들의 연애 상대, 즉 낭만적 감정의 대상이 되는 여자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답다. 젊은 추녀나 젊지 않은 여자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주 한정적이다. (중략) 그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선택할까? 여자는 남자가 일하는 모습이나 성실한 성격, 혹은 섹스를 잘한다 못한다 하는 식으로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여지를 남겨준다. 남자는 구제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19세기 작품은 대개 그렇고, 20세기 후반이나 되어야 겨우 아름답지 않은 여자나 젊지 않은 여자도 연애를 하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소설의 본류는 여전히 19세기라서 그 시기에 만들어진 틀을 완전히 깨기는 어렵다.

- 본문 16 ~ 17쪽에서 인용

 

야, 이렇게 문학과 시대 배경,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방식인데! 마리 여사는 당당하게 문제제기한다. 사랑을 다루는 명작 고전은 남자가 주인공일 경우 겐지 이야기나 돈 후안처럼 여자들을 모아 전부와 섹스하는 전개인데,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 공주가 남자를 모아서 기예를 겨루게 하여 제일 뛰어난 남자와 결혼하는 전개라고. 그뿐이냐,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대개 한 남자만을 사랑해야 명작이 된다고,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씩씩한 스칼렛 역시 나중에는 레트 버틀러 한 남자만 추구하지 않냐고. 오, 섹스니 어쩌니하고 이렇게 대 놓고 신나게 말씀해 주시다니, 읽으면서 진정 통쾌했다.

 

전체적으로, 한 현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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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김양기 지음, 박광순 옮김 / 넥서스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어라? 책 제목이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이고 목차에 단군신화도 있고, 저자는 김씨인데 역자가 있다. 자세히 다시 보니 재일 한국인 사학자가 쓴 책이다. 그러니까, 우리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본인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점은,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자세하다는 점. 우리 저자가 쓴 신화 서적에서는 생략하고 지나가는 부분도 일일이 서술해준다. 관련 신화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등 1차 사료에서 정확히 인용해 주어서 좋다. 반면, 저자의 지나친 감상이나 주관적 소견은 거의 없다. 그래서 더 좋다. 우리 신화에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책에 실린 내용은 창세신화, 건국신화(단군,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 탐라)와 김알지등 시조신화, 해와 달의 신, 불교 설화, 이종 결혼과 신녀, 맹수 변신 설화. 특히 우리 신화와 일본 신화의 논쟁점이나 비슷한 점을 비교해준 부분이 재미있다.

교토 제국 대학과 경성 제국 대학의 조선사 교수였던 이마니시 류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부터 단군신화를 연구하고, 그것을 고쳐 초기의 민족 이식의 고양에 의해 창제된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전(戰前)의 황국사관에 바탕을 둔 조선사 연구의 일인자이며, <단군고>는 그가 학위를 취득한 주요 논문이었다. 그런 만큼 영향력이 커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신화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조선 신화 연구의 선구자 역할을 한 미시나 아키히데가 단군 신화를 부기한 것으로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미시나는 이마니시의 제자이므로 스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 미시나의 제자로 조선 고대사의 권위자인 이노우에 히데오씨에게까지 계승되었다.(중략)

이마니시는 한국 신화 중에서 단군 신화만 부정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단군 신화를 인정하면 일제 강점의 논거가 벗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군이 BC 660년에 즉위한 일본의 진무천황보다 1700년 정도 일찍 즉위했기 때문이다. 설사 신화라 해도 그것을 인정하면, 일제 강점의 이른바 '일선동조로'의 논거를 잃어버리기 되기 때문에 큰일이 난다.

- 본문 35쪽에서 인용

 

위 인용부분이야 뭐 워낙 유명한 쟁점이다. 그외 천손강림형 설화에서 우리 신화와 일본을 비교하여 설명하다가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임신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언급하는 부분에서 살짝 웃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창세 설화가 없고 건국신화만 있다는 견해에 대해, 서사 무가의 창세 설화를 제시한 점은 멋지다. 지금이야 그런 입장이 많이 보이지만, 2000년 당시는 그런 견해가 흔하지 않았다.

 

태양신은 원래 여신이지 않은가, 하는 점에 관심있는 내 입장에서, '해와 달의 신'부분은 매우 유익했다. 나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알면서도 그동안 당연히 연오랑이 해의 신, 세오녀가 달의 신인줄 알았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해와 달의 신으로, 남편 연오는 왕이 되고 세오는 왕비가 되었다고만 적혀 있고 누가 태양인지 확실하게 적혀 있지는 않다는 점을 저자는 찍어 내 보인다. 멋지다!  저자는 말한다. 이 신화의 주역은 남편 연오이므로 그것으로 유추하면 연오가 태양이고 아내 세오는 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신라 사신에게 준, 세오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빛을 부활시키는 신구, 신기인 점을 고려하면, 세오를 태양으로 생각해도 이상스럽지 않다라고. 즉, 이 설화가 남신이 태양신이라는 논거는 되지 않는 것이다. 또 저자는 손진태가 1947년에 채록한 <해와 달과 별>이라는 설화에, 세 자매가 하늘에 올라가 언니부터 순서대로 각기 해 달 별이 되었다고 적힌 부분을 주목한다. 유레카! 사실 나는 만주 지방에서 채록된 신화를 보고 우리 신화의 원류를 짐작해서 태양신이 여신일 가능성을 추측했는데, 이렇게 국내에 남은 자료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그 자료를 알면서도 그런 각도로 볼 생각도 못했다.

 

책에도, 인터넷 서점의 상품 관련 페이지에도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찾아보니 김양기 저자는 일본 시즈오카 현립대 교수였다. 자이니치로 공립대 교수 임용은 처음 사례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강상중 선생님 조금 이전 세대인 것이다. 저자분은 한일 통신사 관련 학회, 행사에 성함이 자주 보인다. 이 부분 대가이신가 보다. 더 검색해보니 <가면 속의 일본인>의 저자로 나온다. 그런데 그 책,,, 이름이 낯익다. 아, 나 그 책 읽은 적이 있다. 1993,4년 경 <일본은 없다>의 무식한 일본 폄하 비판 이후 일본 문화를 제대로 알리자는 의도로 나온 책이었다. 이래저래, 내게 반가워 저자 사진까지 찾아 보았다. 좀 스토커 같지만, 사진을 보며 저자분께 인사했다. 덕분에 태양여신 궁금증을 해결할 힌트를 얻어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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