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투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궁금해 읽은 책이다. 1년 전에 읽고 리뷰를 써 놓은 줄 알았는데, 최근에 영화 <트립 투
이탈리아>를 보고 생각나서 예스에서 검색해 보니 내 리뷰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통독하고 리뷰 남긴다.
그랜드 투어는 17 ~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에서 귀족 자제 교육용으로 크게 유행했던 여행을 말한다. 어학 연수 겸 조기 유학겸 미술관
박물관 투어 겸,,, 그런 성격이었다. 책은 최초의 그랜드 투어리스트였던 필립 시드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중세의 종교 순례 등 여행의 역사를
다룬다. 투어의 목적이 교육이었던지라 공교육 사교육 논쟁 등 당시 교육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서술한다. 17세기에야 영국에서 유럽 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이 시기가 되어서야 유럽 대륙의 종교전쟁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이 끝나자, 드디어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서, 아무 신앙적 꺼림칙함과 정적의 정치적 공격 우려 없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1장 내용.
2장과 3장으로 가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진다. 강단 사학자인 저자는 나같은 호기심 넘치지만 기본 역사 지식은 딸리는 독자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그랜드 투어에 대한 사실을 쉽게 전해준다. 여행 준비와 안내서, 여정 등등,,, 적당히 지도와 사진이 있어 더욱 읽기가 즐겁다. 예나
지금이나, 어학 연수가는 학생을 위한 지침서에는 현지에서는 자국인과 어울리지 말 것을 충고하는 내용이 었었다. 여정은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여기에서 일단 오래 머무른다. 유럽 상류층 사교계에 초대받아도 좋을만한 프랑스어와 매너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자연을 만끽하고 궁극의 목적지인 이탈리아로 간다. 돌아올 때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들리는 것이 정통 코스였다. 보통 2~3년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고 한다.
다음 4장 역시 흥미진진하다. 유럽 상류계층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한 옷차림, 외국어, 매너에 대한 내용이다. 고국에서 유럽 대륙의 유명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연줄을 동원해서 소개장을 출발 전에 미리 챙기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특히 18세기 그랜드투어리스트들은 볼테르를 만나길 원했다고
한다.
루소를 만난 보즈웰은 이번에는 볼테르를 만나러 떠났다. 볼테르는 18세기에 유럽을 여행한 영국인들이 꼭 만나고 싶어했던 인물이다. (중략)
볼테르 스스로 '유럽 여관 주인'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벨기에의 리뉴 공, 유명한 연애꾼인 자코모 카사노바, 디드로,
달랑베르, 에드워드 기번 등 많은 사람들이 '페르네이의 영주'인 볼테르를 방문했다.
하지만 모든 방문객이 볼테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마치 동물원을 구경하듯이 문밖에서 엿보다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구경꾼이 50명이 넘을 떄도 있었다.
- 본문 164쪽에서 인용
그 시절 유럽에도 '사생팬'은 있었던 것이다. 하하.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리 오너라~ 지나가던 과객인데 하룻밤만 부탁하오~ "
하면 주인이 사랑에 불러 술상 앞에 놓고 지적 대화 나누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알고보니 주인은 유명인, 심봤다! 뭐 이런 거. 하하.
이어, 5장에서는 예술을 감상하고 기념품을 쇼핑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투어리스트들은 일종의 '인증샷'으로 베네치아 풍경화를 많이
구입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는 건 사진. 6장은 여행의 동반자인 동행 교사와 하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애덤 스미스 등 유명한 동행 교사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망나니 학생들을 통솔하느라 고생하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유럽의 선진 문화를 맛본 영국의 가난한 지식인들은 그래도
행복했을까? 학생들 중에는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처럼 그랜드 투어를 유익하게 마친 경우도 있었디만 대개는 부모 감시
밖에서 본국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성병까지 걸렸다고 하니 말이다. 바이런도 유명하지 않은가. 귀국 후에 외국물 좀 먹었다고
건들거리는 이들을 '마카로니'라고 불렀다는 것도 웃기다. 1990년대에 유학 중 방학에 귀국해서 말썽 부리는 유학생들을 '오렌지족'이라 불렀던
기억과 겹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조기유학 찬반론은 이미 몇 백년 전 영국에서 활발히 논쟁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7,8장 내용이다.
9장에서는 철도 여행이 대중화 되면서 엘리트 여행인 그랜드 투어가 쇠퇴하게 된 역사를 서술했다.
전체적으로 책에는 재미있는 정보가 많다. 대중 역사서의 모범같은 책이었다. 이 분의 다른 저서인 <온천의 문화사>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역사서 읽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해 둘만 하다. 근대초 영국사가 주전공이신데, 아직 젊은
분이시니 앞으로의 저술을 더 기대해 본다. 이정도로 전문적 역사지식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필력,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