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한국문학
조두영 지음 / 일조각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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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은 내 인생의 수수께끼이다. 어릴 적에 보기에도 심청이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고 심봉사는 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심청을 칭찬하는 조선 후기 심청네 마을 사람들이나 심청전을 읽고 효를 말하는 현대 사람들이나 다 이상하다. 나이들어 책 좀 읽고 엄마와 주변 어르신들과 갈등을 겪으며 원전으로 읽어보니 <심청전>에서 보이는 것은 갸륵한 효 정신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과 아픈 사회의 모습들이었다. 이기주의는 물론 매저키즘과 새디즘이 우글거린다. 아, 고전소설에서 이런 것만 보는 내가 변태냐, <심청전>이 변태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청이가 주위에서 강권하는 효행을 하며 사는 것이 너무 지겨워서 자살을 선택한 것만 같다. 그를 통해 심봉사와 세상에 소극적 피학적 저항을 한 것 같다. 보라, 니들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 이렇게 죽는 나를! ( 이 대목에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겟세마네 (I Only Want to Say)' 가사가 생각난다. '좋아요, 죽을게요. See how I die ~~~")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나는 사악하고 삐딱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책 읽다가 이런저런 의문을 품고 찾아보면, 늘 이런 쪽으로 먼저 생각하고 글로 쓰신 전문가들이 있더라. 바로 이 책같은.

 

그럼, 두둥! 이 책을 소개한다.

책의 저자는 국내 최초로 국제정신분석학회 공인 정신분석가인 조두영 현 서울대명예교수시다.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예제와 연습문제가 나란히 실린 수학문제집같다. 앞 부분은 정신분석 기본 이론을 요약하고 있다. 동화, 설화를 통한 정신분석의 역사와 예를 서술하면서 브루노 베텔하임과 이부영 교수 소개도 한다. 이어서 뒷부분에서는 앞에서 배운 이론을 바탕으로 이상, 손창섭, 김동인 등 현대문학 작품들과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우렁 각시 등 국내 설화를 분석한다. 이 중 심청전 분석 부분은 두 꼭지이다. 참, 영화 <서편제>분석 부분도 크게 보아 심청전 분석의 연장이다. 서편제의 아비 역시 심봉사나 마찬가지니까.

 

여튼, 이 책의 <심청전>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심청전에 대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전문가의 견해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내 생각대로 심청이는 피학적 나르시시즘 환자였던 것이다. 심봉사와 마을 사람들은 '효'란 미명 아래 자기 이익을 꾀하며 아동 학대를 일삼았고. 결국 <심청전>의 주제는 '심청이를 본받아 효도해라'가 아니라 '어떤 효가 바람직한가, 효를 강권하는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다함께 생각해보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심청전>은 사회고발소설이다.

 

어머니 곽씨 부인은 비록 집적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와 동네사람 등 주위 사람들을 통하여 그 피학적 열녀상이 이상화되어 심청에게 주입됨으로써 심청에게는 언제나 비교되는, 그러나 결코 능가할 수는 없는 강력한 경쟁자로, 그리고 본받아야 할 존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녀의 효행을 채찍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371쪽에서 인용

 

결국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던 곽씨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유기당했다는 느낌에 빠진 심학규에게 심청의 존재는 그러한 상황을 초래시킨 원인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그녀에 대한 원망이 그 무의식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은 피양육자에 대한 양육자의 학대, 거부, 분노는 피양육자에게도 양육자에 대한 유사한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양육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는 피학적인 양상으로 표출될 수가 있다.

- 372, 379쪽

 

'효'란 효의 대상에 대한 주인공의 공격성이 피학성으로 표출되는 것이며, 따라서 주인공들이 지극하기 이를 데 없는 피학적 성격의 효도를 행하는 이유는 섬기는 대상에게 갖는 공격성을 억제하는 부정과 반동형성이라는 자아방어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 379쪽

 

비록 자청한 일일지라도 막상 그러한 현실에 부딪히고 보면 입으로만 자신을 위로하고 칭찬해 주며 자신을 험한 세상으로 내몬 아버지와, 자신을 그러한 상황 속에 남겨놓고 죽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적의를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에 대한 배신감, 분노, 공격성이 의식 수준에서 인식됨을 막기 위해서 심청은 더욱더 자신의 효성을 채찍질하는 가운데 그녀의 효는 피학적 성격을 더해 가게 되는 것이다.

- 383쪽

 

효자, 효녀의 특징이 약한 자아와 의존적 성격이라는 것은 (중략) 아버지에 대한 심청의 지나친 배려는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존성의 이면인 것이다.

- 383, 384쪽

 

심청이 가진 죄책감의 이면에는 또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의가 존재한다. 자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죄책감에 싸여 살도록 무의식적인 가학성을 가한 것에 대한 분노, 또는 자신에게 기대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시켜 왔고 이제는 그 해결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공양미 삼백석의 문제를 자신에게 떠넘겨 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그 분노와 욕구를 억압하고 그러한 자기를 스스로 처벌하는 피학성이 함께 작용하여 몸을 파는 결심이 나온 것이다.

- 385쪽

 

효를 주제로 한 한국의 대표적인 전래소설에서 그 효의 대상인 심학규의 성품 묘사가 이처럼 이기적이고 착취적으로 그려진 배경에는 지나치게 효를 강조해 왔던 문화에 대한 자체적인 무의식적 반발이 작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 393

 

프로이트 스타일 분석이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성 본능 쪽 접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렁 각시 읽다가는 성적 접근이 너무 웃겨서 몇번 뿜었다. 왕과 대결해서 신랑이 이기는 것이 늙은 왕에 대해 젊은 신랑의 성 능력이 뛰어나다는 해석이라니. 아놔, 난 관탈민녀 쪽으로 역사배경 반영 보는 것이나, 우렁색시가 거부하는 데도 서둘러 부부인연을 맺어버리는 신랑을 분석하는 페미니즘 쪽 시선이 더 재미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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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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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내가 이 책을 읽은 동기는 순수한 독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작가로서는 무명인 저자가 거창한 기획없이 일기쓰듯 쓴 글이 책으로 묶이고, 그 책이 장장 6년간 베스트셀러라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비유하자면, 파리만 날리고 있는 작은 식당의 주인이 줄 서서 사 먹는 맛집의 비법을 궁금해하다가 드디어 그 식당에 가보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잔잔하니 수필 읽는 맛이 있었다. 1971년생인 저자는 내 또래다. 내 또래가 30대 후반이 되고 40대를 앞두면서 사랑과 사람과 추억과 건강과,,, 조금은 자기자신까지를 잃어가면서 그 일상을 적은 글이니, 어찌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랴. 어느 정도는 신선하기까지 했다. 40 전후 아저씨 필자들이 쓴 에세이는 보통 '나는 이렇게 잘났다. 그런데 세상이 나 잘난 것을 몰라주더라'가 주제인 것이 많은데, 글쓴이는 그런 헛폼을 잡고 쓰지 않는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일상의 느낌을 적는다. 제목 그대로 '보통의 존재'로서의 생각과 감정을 묵묵히 꾸준히 적는다. 그런 점이 좋았다. 남 보라고 쓰는 것이 아닌, 자기 다짐의 문장들. 아래처럼,

 

조언이란 건 남의 상황을 빌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 본문 115쪽에서 인용.

 

어떤 글이건 완성되기 전 작업 과정에 있어서만은 그 내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독자는 완성되기 전 채 여물지 않은 글의 모자람을 애써 엿보려 해서는 안 되고 작가는 중간에 섣불리 공개하는 실수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 과정은 언제나 비밀에 붙여져야 하며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26쪽에서 인용

 

위에서처럼, 글쓰기의 자세에 대해 배운 부분도 많았다.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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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허균 지음 / 돌베개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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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 미술과 문화재에 대한 좋은 책을 많이 낸 저자의 책이다. 읽으면서 그냥 대단하다, 재미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책 한 권 안에 방대한 내용을 집약적으로 넣어 설명하다보니 당연히 생기는 문제는 좀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이 책 수준의 완성도를 보이는 책은 또 없을 것 같다. (잠깐, 이 책은 전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나는 입문자 용 서적으로서의 완성도를 말했다) 이 책 읽기  직전에 너무도 빈약한 내용을 불심 운운하며 때우고 있는 책을 읽었기에, 내가 지금 좀 인심 후한 독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이 책은 종교문화나 예술 관련한 내용을 다루면서 교리 나열과 저자의 개인적 신앙 고백으로 때우려는 허접한 책은 절대 아니니, 믿고 읽으시라.

 

절, 그러니까 사찰은 신자 아니면 주로 여행시에 들렸다가 산책 겸 돌아보고 절 아래 식당가에서 산채비빔밥이나 먹고 가는 문화 유적지나 관광지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찰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다. 여러 상징을 통해 불법을 설명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고 불국의 이상세계를 신자에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 책은 이러한 장엄(莊嚴)을 구현하는 사찰 조형물과 장식문양의 상징 의미를 설명한다. 미술과 신화와 종교와 역사를 오가는 내용도 알차지만, 저자 스스로 전국 250여 군데 사찰을 답사하며 찍었다는 사진도 충실하다. 사찰을 다루는 다른 서적처럼 불국사면 불국사, 해인사면 해인사, 이렇게 한 사찰의 사진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꼭지에는 그 주제에 대한 사진만 모여있다. 가령, 연꽃이라면 보광사, 통도사, 범어사,,, 의 연꽃 사진만 실려 있다. 사진과 본문글을 보며 이해하고, 다른 사찰의 같은 소재를 다룬 사진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루고 있는 상징은 이렇다. 연꽃, 용, 귀면, 비천상, 길상과 만덕, 토끼와 자라, 물고기, 가릉빈가, 주악인물상, 십이지신상, 태극, 원상, 심우도, 불단, 단청, 천장의 꽃, 문살, 닫집, 불상, 광배, 불상의 자세·수인·지물, 탑, 탑의 층수, 사사자상, 부도, 봉발대, 사물, 전각과 문루, 불전과 존상의 배치, 석가탑과 다보탑,다리, 계단. 어디를 펼쳐 읽어도 재미있다. 구입해서 책장에 구비해놓고 두고두고 사찰 방문할 일 생길 때마다 궁금한 부분 찾아 읽기 좋은 책이다.

 

 

연꽃은 인도의 고대신화에서부터 등장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신비적 상징주의 가운데 혼돈의 물 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내용의 신화가 있다. 이로부터 연꽃을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믿는 세계연화사상이 나타났다. 세계 연화사상은 불교에서 부처의 지혜를 믿는 사람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 화생의 의미로 연결되었다.

- 본문 12 ~ 13쪽에서 인용

 

심청전을 처음 접한 이후로, 왜 심청이가 연꽃에 들어가는지가 계속 궁금했다. 보광사의 판벽화 <연화화생도>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어서 연화화생이 또 궁금해 미치겠는거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인데, 연화화생에 대한 깊은 이론은 없었지만, 연화의 상징  외에도 많은 것을 읽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난 용과 귀면(키르타무카)이 다른 것인지도 몰랐다. 책에 의하면 용은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사찰의 수호신이다. 대웅전 앞에는 용의 머리, 뒤에는 용 꼬리 장식이 있는 것은 사찰 건물 자체가 용화화선이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부석사에 용이 있고, 의상대사를 사모한 중국소녀가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귀국선을 등에 지고 가는 거였나보다. 반면 용처럼 생겼지만 용 아닌 귀면은 사악한 자를 물리치고 참배객을 지키는 벽사의 구실을 한다,,,,이런 내용을 알아가는데 미친듯이 재미있다. 왜 절에 <토끼전>에 등장하는 토끼와 자라 조형물이 있는지도 그동안 궁금했는데, 그 친구들은 바닷속 불국정토로 향하는 거였다니!

 

어줍잖지만, 중세 가톨릭 관련 책을 좀 읽은 기억으로 비교해보자면, 가톨릭 교회 건물이나 사찰 건물이나, 건물의 장식을 통해 문맹인 대중 신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려하는 점은 같은 것 같다. 그동안 서구 유명 성당은 엄숙한 마음으로 압도당해 보면서 우리 전통 사찰의 장식 요소들은 색채가 알록달록하다거나 미신적 요소가 있다고나 하며 편견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좀 불편했는데, 이제 이 책을 읽고 나니 단순히 불편한 것을 넘어서 더 생각해볼 거리를 얻게 되어 기쁘다.

 

*** 연화화생에 대해 읽을 논문을 알려주신 알라디너 00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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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3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자누스 2016-04-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용산 박물관에서 제목에 혹해서 구입하고서는 지금껏 묵혀둔 책인데 `탁월한 선택`이었군요.

자유도비 2016-05-08 01:01   좋아요 0 | URL
불교 신앙과 상관없이, 책장에 구비해놓고 두고두고 궁금한 부분 찾아보기 좋은 책이었어요.
 
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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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타깝게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겨레 신문의 구본준 기자가 당시 주목받은 대중 인문서 필자분들을 인터뷰한 글 모음이다. 면면을 나열하자면 정민, 이주헌, 이덕일, 한비야, 김용옥, 구본형, 이원복, 공병호, 이인식, 주강현, 김세영, 임석재, 노성두, 정재승, 조용헌, 허균, 주경철, 표정훈.

 

이 책은, 대중 인문저자의 자료 접근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소설 등 문학 작가의 작법에 대한 책은 많다. 그러나 문학 외 분야 필자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인터뷰 모음집이다. 그래서 독자는 저자가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구본준 기자의 입장에서 정리해준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담당 편집자 등 저자 주변에서 같이 일하며 저작 작업을 지켜본 사람들이 평가하는 저자의 장점도 구본준 기자는 함께 전한다. 한마디로 프로들의 입장에서 높이 평가하는 프로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 좋다. 비문학 분야의 대중 저술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 장담한다. 자료를 모으고 아이디어 키우고 기록하며 규칙적으로 집필하는 것이나 건강 등 자기 생활 관리하는 것 등등.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 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 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 있는 대목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래요. 그럴 때는 정말 소름이 쫙 끼쳐요.

- 12쪽, 정민 편.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것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 33쪽, 이주헌 편.

 

이씨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이자 밑천은 단연 사관 그 자체라고 잘라 말한다.

- 48쪽, 이덕일 편.

 

건강관리, 궁극적으로는 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이야말로 프로 저술가의 기본이라고 도올은 설명했다.

- 66쪽, 김용옥 편.

 

그는 자기가 고민했던 문제, 해결하려 했던 문제를 책으로 쓴다.

- 84쪽, 구본형 편.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 141쪽, 주강현 편.

 

자료는 눈덩어리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굴러가요. (중략) 자료가 오히려 연구주제를 넓혀주기도 하는 거죠.

- 169쪽, 임석재 편.

 

저술은 체력이며 글은 엉덩이로 쓴다.

- 184쪽, 노성두 편.

 

그는 전문가 글쟁이라면 지식을 묶어서 이어주는, 지식의 넘나들기 전문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194쪽, 정재승 편.

 

한 문장에 하나의 생각, 문어와 구어의 일치가 글쓰기 철학이라고 잘라 말한다.

- 208쪽, 조용현 편.

 

역사를 왕조 중심이 아니라 문화와 일상으로 살펴 본다는 점이다. (중략)

서구 중심으로 유럽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교정시켜 주는 점도 독자들이 꼽는 주 교수 책의 장점이다.

- 227쪽, 주경철 편.

 

2006년인가 2007년인가, 한겨레 신문 지면에 연재될 당시 인터뷰 기사로 읽다가, 2008년에 책으로 나오자마자 구입한 책이다. 당시의 나는 학원 못 다니거나 과외 못 받을 형편의 아이가 자습서 한 권 구해서 두고두고 반복해서 풀듯, 그렇게 소중하게 이 책을 읽었다.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다. 그 때의 나는 이분들을 존경하고 한편 부러워하며 이 책에 소개된 전작들을 색연필로 줄쳐가며 다 찾아 읽었더랬다. 특히 역사 분야의 이덕일, 주강현, 주경철 선생님 편을. 그 후 거의 10년.

 

다시 읽어보니 그동안 발전을 거듭해서 그 분야의 대가가 되신 분도 있고, 발을 헛디디신 분도 있고, 이렇다할 대표작을 못 쓰시고 강연이나 다른 일에 더 열심이신 분도 있다. 겨우 10년 지났는데 말이다. 저자건 리뷰 쓰는 일반 블로거건, 5년 10년 20년 오래 겪어 보고 평가할 일이다.  

 

걍, 최근에 만난 친구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읽고 이제서야 뒷북 리뷰를 올린다.

새삼, 길게 보고 길게 계획을 잡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226쪽, 주경철 교수님 편의 책 사진.

그리고, 혹시 작가가 되고 싶으신 분이 계신다면,

 

그는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소설이든 아니든 1천매짜리 원고를 책 쓰는 심정으로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원고지 1천 매는 300쪽 안팎의 책 한 권 분량이다. 책 한권을 써 보는 첫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의 유무는 글을 쓰는 데 있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된다.

- 241쪽, 표정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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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16-05-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을 `인간문화재 열전`으로 바꾸어도 좋겠어요.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을 추가한 개정판이 나와야 하는데 구본준 기자가 고인이 되었다니 애석합니다.

자유도비 2016-05-08 01:04   좋아요 0 | URL
거의 10년전 책이라, 그 세월동안 각각 다른 행보를 보이는 저자분들의 지난 이력 생각해보며 읽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고인이 되신 저자의 일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아쉽습니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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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해머튼은 '지적 생활'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빅토리아 시대 작가라고 한다. 영화나 티비 등 시각 전달 매체와 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 그 시대는 문자와 인쇄매체의 힘이 막강했다. 수요도 많았고 공급 물량을 대는 작가들도 많았던 시대. 전무후무한 정보 대량 생산 시대가 시작되면서 자기 관리를 못하고 스스로를 혹사하던 집필가들이 많던 시대. ( 이 시대에 요절한 작가들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지적 노동 생활에 대한 선례나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저자는 문인들의 폭음이나 기행, 무절제한 생활이 당연한듯 여겨지던 이 시기에 평생 쓰고 읽는 자로서의 지적 생활을 위한 조언을 담은 글을 쓴다. 이 책이다. 내용도 맘에 들고, 요즘 나오는 에세이 서적들처럼 별 이쁘지도 않은 잡다한 일러스트 같은 것 없이 글에만 집중한 세련된 편집도 맘에 든다.

 

책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결론은 건강관리 시간관리 잘 하라는 것.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절제에 힘쓰라는 것. 정말 맞는 말이다! 키보드 노동자들이 믹스 커피 열 봉 주전자에 타 놓고 코피 흘리며 밤새 글쓰는 것은, 밤새 술독에 빠져 천재인 나를 몰라주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생물학적 수명과 작가로서의 수명 둘 다. 멀쩡했던 저자가 알콜로 뇌가 망가져서 50대 넘어 이상한 소리 sns에 날리며 어럽게 쌓았던 캐리어를 다 깎아먹는 것을 한두번 보았는가. 자신의 재능을 혹사하다가 피로에 지쳐 제대로 퇴고하지 않은 책을 시장에 내놓거나 자기복제 아류작만 쓰다가 악평을 받고 망가지는 것도 한 두번 보았는가.

 

그러면 안 된다. 어차피 평생 읽고 쓰는 것. 문제는 건강관리 시간관리 자기절제다. 이 단순한 진리를 저자는 부드럽게 조근조근 말해주고 또 말해준다. 독자가 세뇌될 때까지! 하하. 워즈워스, 칸트, 니체, 괴테, 조르주 상드, 바이런 등 다양한 문인과 학자들의 사생활을 엿듣는 재미도 있다.

 

인간은 명예를 위해, 돈을 위해 학문과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걷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일생을 지성에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 129쪽에서 인용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아낼 수 있습니다.

- 본문 194쪽에서 인용

 

빅토리아 시대라면 이중적이고 엄격한 도덕률로 유명하다. 그러기에, 책 소개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문장들을 접하고 '이건 질러야 돼!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니까!'를 외치며 책을 구입했지만 조금 찜찜했다. 은근 구석구석 빅토리안 개저씨같은 표현이 숨어 있을까봐. 막상 배송받아 펼쳐보니 책은 그런 면이 없었다. 알고보니 이 책은 편역본이었다. 원작은 꽤 고리타분하다고 하는데, 역자의 역량 덕분에 책이 살아난 것 같다.   

 

그래서 역자분 이름을 다시 보니 오 마이 갓! <폭주 노년>과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를 쓰신 김욱 선생님이시다. 70세에 번역을 시작하여 85세인 오늘까지 현역 번역가로 일하고 계신. 이런 분의 평생의 삶에서 터득한 안목으로 편집, 번역된 글이니 더욱 믿음이 간다. 한 책을 읽으며 두 선생님의 삶의 지혜를 느끼는, 묘한 독서를 경험했다.

 

여튼, 책을 덮으며, 자기 관리 잘 하여 건강한 심신으로 오래 살다보면, 평생 읽고 쓰며 발전하는 것은 나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희망이 솟았다. 자, 오늘 하루 또 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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