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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5년 12월
평점 :
저자 해머튼은 '지적 생활'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빅토리아 시대 작가라고 한다. 영화나 티비 등 시각 전달 매체와 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 그 시대는 문자와 인쇄매체의 힘이 막강했다. 수요도 많았고 공급 물량을 대는 작가들도 많았던 시대. 전무후무한 정보 대량 생산 시대가
시작되면서 자기 관리를 못하고 스스로를 혹사하던 집필가들이 많던 시대. ( 이 시대에 요절한 작가들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지적 노동 생활에
대한 선례나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저자는 문인들의 폭음이나 기행, 무절제한 생활이 당연한듯 여겨지던 이 시기에
평생 쓰고 읽는 자로서의 지적 생활을 위한 조언을 담은 글을 쓴다. 이 책이다. 내용도 맘에 들고, 요즘 나오는 에세이 서적들처럼 별 이쁘지도
않은 잡다한 일러스트 같은 것 없이 글에만 집중한 세련된 편집도 맘에 든다.
책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결론은 건강관리 시간관리 잘 하라는 것.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절제에 힘쓰라는 것. 정말 맞는
말이다! 키보드 노동자들이 믹스 커피 열 봉 주전자에 타 놓고 코피 흘리며 밤새 글쓰는 것은, 밤새 술독에 빠져 천재인 나를 몰라주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생물학적 수명과 작가로서의 수명 둘 다. 멀쩡했던 저자가 알콜로 뇌가 망가져서 50대 넘어 이상한 소리
sns에 날리며 어럽게 쌓았던 캐리어를 다 깎아먹는 것을 한두번 보았는가. 자신의 재능을 혹사하다가 피로에 지쳐 제대로 퇴고하지 않은 책을
시장에 내놓거나 자기복제 아류작만 쓰다가 악평을 받고 망가지는 것도 한 두번 보았는가.
그러면 안 된다. 어차피 평생 읽고 쓰는 것. 문제는 건강관리 시간관리 자기절제다. 이 단순한 진리를 저자는 부드럽게 조근조근 말해주고 또
말해준다. 독자가 세뇌될 때까지! 하하. 워즈워스, 칸트, 니체, 괴테, 조르주 상드, 바이런 등 다양한 문인과 학자들의 사생활을 엿듣는 재미도
있다.
인간은 명예를 위해, 돈을 위해 학문과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걷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일생을 지성에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 129쪽에서 인용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아낼 수
있습니다.
- 본문 194쪽에서 인용
빅토리아 시대라면 이중적이고 엄격한 도덕률로 유명하다. 그러기에, 책 소개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문장들을 접하고 '이건 질러야 돼!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니까!'를 외치며 책을 구입했지만 조금 찜찜했다. 은근 구석구석 빅토리안 개저씨같은 표현이 숨어 있을까봐. 막상 배송받아
펼쳐보니 책은 그런 면이 없었다. 알고보니 이 책은 편역본이었다. 원작은 꽤 고리타분하다고 하는데, 역자의 역량 덕분에 책이 살아난 것 같다.
그래서 역자분 이름을 다시 보니 오 마이 갓! <폭주 노년>과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를 쓰신 김욱
선생님이시다. 70세에 번역을 시작하여 85세인 오늘까지 현역 번역가로 일하고 계신. 이런 분의 평생의 삶에서 터득한 안목으로 편집, 번역된
글이니 더욱 믿음이 간다. 한 책을 읽으며 두 선생님의 삶의 지혜를 느끼는, 묘한 독서를 경험했다.
여튼, 책을 덮으며, 자기 관리 잘 하여 건강한 심신으로 오래 살다보면, 평생 읽고 쓰며 발전하는 것은 나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희망이
솟았다. 자, 오늘 하루 또 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