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 거짓 선동과 모략을 일삼는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에게 보내는 레드카드
마이클 만 & 톰 톨스 지음, 정태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

 



1.jpg   2.jpg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원제: The Madhouse Effect: How Climate Change Denial Is Threatening Our Planet, Destroying Our Politics, and Driving Us Crazy)>와 <사라진 권력, 살아날 권력 (원제: Power in the 21st Century: Conversations with John Hall )>의 저자 이름이 공교롭게도 똑같다. 마이클 만 (Michael Mann ).  <사라진 권력, 살아날 권력>의 9장에서도  21세기에는 "자본주의가 가진 예기치 못한 환경 파괴성의 위기(39)"에 필연적으로 처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처럼 두 권 모두 환경 재앙의 심각성을 경고하기에 동일 저자인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첫번째 마이클 만은 '하키스틱 곡선'으로 세계적 기후과학자 반열에 오른 대기과학과 교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이고 두번째 마이클 만은 사회학자이다.
 
독자는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영어판 표지 그림에서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시사만평가 톨 토스 (Tom Toles 1951~   http://www.gocomics.com/tomtoles ) 의 작품이다. 서문에서 톨 토스와 마이클만은 직업적으로는 교차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시사 만평가'와 과학자가 이례적으로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었다고 집필 이유를 밝힌다. 명명백백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는데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단은 기부변화에 관한 공론의 장에서 왜곡, 부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기후게이트(Climategate)란 사건명을 붙여 기후변화를 허구로 몰아붙인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대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일단 확실해 보이는 사건 (príma fàcie cáse)인 기후변화와 지구촌이 직면한 환경 위협을 의심하기도 한다.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주장은 명료하다.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근거는 굳건하니 이를 과학적 논쟁의 대상 삼으며 시비 거는 집단들에 휘둘리지 말자. 지구를 보호하는 단체를 옹호하고, 스스로 탄소 줄이기 운동에 동참하자'가 주 메시지이다.
20170610_130006_resized.jpg

 

 …  (중략)  우리가 방종한 탄소중독 탓에 이 소중한 지구를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에 던져버린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하고 지극히 무책임한 범죄행위가 될 것이다." (214)

*

하지만, 총 195개 국가가 서명한 파리 기후변화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보란듯이 탈퇴를 선언했다. 대 놓고 인류를 상대로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 이렇듯 기후 변화를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세력들은 다음의 핑계를 댄다. 1)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지 않는다 2)상승했다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3)인류가 초래한 영향력은 미미하며 4) 우리에게 좋을 것이며 5)행동하려면 비싸다 6) 돈이 덜 드는 해법이 있을 것이다. (106) 혹은 '에너지 빈곤 energy porverty'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화석연료를 제한하면 결국 고통받는 이들은 에너지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속지 말자. 이들은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잇권을 챙기고 기득권을 지킨다. 망가지는 것은 지구이다.

Trump-climate-change-678x381.jpg

 

20170610_130037_resized.jpg

 

20170609_192459_resized.jp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20170604_164020_resized.jpg_origin_temp00.jpg
유럽의 지적 풍토, 독서열기는 한국과 어떻게 다르길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원제: Rage and Time: A Psychopolitical Investigation) > (2017[2006])가 "유럽 철학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라 한다. 80여쪽의 서문만 거듭 읽으며 활자의 늪에서 헤매는 우매한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가 시사하는 높은 가독률이 부럽기만 하다.
*
독일인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는 '분노'를 키워드로 서구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개인 차원의 '욱'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지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자 변화를 이끄는 중추 동력이었다. <일리아드 Iliad>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첫 장에서는 영웅 서사시에서 분노를 칭송하는 것이 곧 당대 사람들이 분노를 가치 있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분노가 가진 순수한 힘은 길들여지고, 현대에 이르면서 사람들에게 역으로 '망설임'이 권위이자 미덕으로 내면화되었다고 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이처럼 분노가 개발되고 관리되는 단계는 거의 2000여년 전에 시작,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본문에서는 "사육화된 분노(32)"라고 표현하는데 '사육'에 해당하는 원어가 궁금해진다.
'분노의 사육화' 관점에서 보면, 20세기의 폭력은 '분출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대리인들이 자신들의 사업적 기준에 맞추어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통제하고 관리한 결과 (56), 즉 기획된 폭력이다. 분노는 증오의 문화를 통해 기획된 형태로 구현되는데 (117), 예를 들면 복수가 그러하다. 분노가 은행 형태로 축적되면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역사적 행태로 변모한다 (123). 성숙되지 못한 분노가 지엽적으로 표출되면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분노 자산을 낭비하지 않고 낡은 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세계 혁명'의 동력이 될 수준으로 축적하려면 기다릴 필요가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
06_zorn_u_zeit



인간 존재의 티모스적 역동성에 대한 이해, 즉 사회 심리 체계에서 분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차단되었다고 본다. (45) 그러나 21세기 전반부도 대규모의 갈등으로 뒤덮이리라 예측하기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분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라는 어젠다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60) 이 작업을 바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하는 셈이데, 그 스스로는 이 작업을 "전 세계적으로 작동되는 분노은행 건설과 관련된 연구관찰(266)"이라고도 칭한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유럽지성사는 물론, 경제학, 정신분석학, 역사, 인류학, 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자료를 제시하기에, 나같은 무지한 독자는 뇌에 당분이 많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난해한만큼, 독창적이어서 흥미롭니다. 특히 축적된 분노를 운용할 귀중한 자본으로 해석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분노은행은 정당이나 정치 운동, 특히 좌파적 정치 스펙트럼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255)
 *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전 세계적 관점을 지닌 분노의 수집 장소가 없다(336)"는 점이다. 분노가 고립되고 분산되어 이전 시대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다. 미래 세계에서도 분노는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단적 형태로 결집되지 못할 것이다. (418) 안타깝게도, 교활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신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에서는 "분노와 반체제적 에너지"가 결집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성도, 이론적 구심점도 상실된 상태에서 언론과 TV가 '행복'이라는 환타지로 사람들을 눈 멀게 했으니 분노가 결집될 수가 없다. 급진적 행동주의라는 면에서 공산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는 이슬람주의 역시,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보편적 반체제 집단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415) 미래 사회에서 분노가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
그렇다고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가 분노의 전복력을 부정하는 책은 아니다. 마치는 글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그가 희망하는 '세계 문화'를 제시한다. 그것은 "보복의 형이상학과 그 정치적 반향을 적절한 수준의 성찰로서 깨부수는 포스트 일신교적 문화 (421)," "문화 상호주의와 트랜스 문화적 균형을 갖추고 반권위적인 부드러운 도덕성에 바탕을 둔 실력주의이자, 뚜렷한 규범적 양심과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문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인칭 시점에서 건설된 합리성의 문화 (422)"이다.
*
출판사 "이야기가 있는 집" 측에서 이 책을 주인공이 "분노"인 소설에 비유하며 강력히 권한다. 어려워도 포기말고 공들여 한장 한장 읽다보면 독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절대 동감한다. 꽤 어려운 독해였지만, 희열이 대단하다. 특히 4부 '중심에서 분리된 분노'와 마치는 글인 '적대감을 넘어서'는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속뜻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나 어려운 철학에세이의 번역을 해준 이덕임 번역자에게 고마움의 인사와 동시에 아쉬움의 말을 남기고 싶다. '문화 상호주의,'니 '분노의 사육화' 등 용어 중 일부 해설이 필요한 단어는 독자를 위해 언어를 병행 기재해주었으면 싶다.

51JJsiBXajL__SY344_BO1,204,203,200_.jpg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주제와 모티브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 와의 가상대화에서 비롯되었다 (76).  "후쿠야마의 창의적인 통찰력은 외부로 뻗어가는 문명의 전쟁 에너지가 종식된 바로 그 순간에 자유세계 시민들 사이의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과 질투로 가득 찬 투쟁이 역사의 무대 중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시민들은 항상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불만족의 물결에 젖을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 인간은 티모스적인 불안의 에너지에 시달리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1)" 물리적인 전쟁은 끝난 듯 보여도, 형이상학적 전쟁은 불가피.  "과거의 세상에는 노예와 농노, 시대에 대한 불만을 품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었다면 현대 사회에는 패배자 (Verliere)들이 있다. (83)"

*

놀랍게도 이 패배자에는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종교에 빠져, 얼짱 외모를 과잉 보상의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나 정작 자신은 외모로서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이도 해당한다. 페테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더 시니컬하게 나아가 '보통 사람'을 재정의하는데, "진보된 자본주의에서 과잉 보상으로부터 제외된 이 (368)"라고 콕집어 명쾌하게 말해준다. 분노가 가진 엄청난 전복 에너지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급진적 무관심과 극단주의적 권태에 빠진 이야마롤 어쩌면 보통사람일지 모른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무기력과 무관심에 젖어 있는 보통의 독자, 뒤통수를 확 친다. '거대한 숫자'는 의미가 있다고. 연합해서 집단적 이익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면 강력한 당파가 될 수 있다고.

2016년 광화문 광장과 대한민국 전역을 달군 촛불집회의 열기가 바로 그 증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태어난 숲 하늘파란상상 10
이정덕.우지현 지음 / 청어람주니어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태어난

 


20170521_144136_resized.jpg

 

 

 뜨거운 여름에 생일을 맞는 제게는 붉은 장미 한 다발 선물이 자주 옵니다. 하지만, 만약 제게 "선물 뭐 받고 싶어?"라고 물어 준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숲에 가자!" 숲이 참 좋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고, 직접 찾으면 더욱 좋고, 숲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내가 태어난 숲>의 우지현 작가와 이정덕 역시 숲을 사랑하겠지요? 책의 표지부터 속지까지 온통 초록 연두 기운이 가득합니다.

*

<내가 태어난 숲>은 아주 특별합니다. 과수원집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부지런히 살아온 어르신이 한땀한땀 자수로 만든 책이거든요. 표지의 글자가 두툼하다 싶었는데 고동색 실로 한땀 한땀 새겨만든 글자랍니다. 아름다워요. 가지와 줄기의 질감이 살아 있고, 나뭇잎의 도톰한 촉감이 전해지는 듯 합니다.
*

20170521_165738_resized

연초록이 너울거리는 숲을 배경으로 한 줄의 문장이 새겨있습니다. "내가 태어났어요." "나?, 누굴까? 누가 태어났다는 거지?" 독자의 머릿 속에 반짝 하고 떠오르는 첫 번째 답은 무엇일까요? <내가 태어난 숲>에서는 숲 속 친구들로 시작합니다. 숲에서 태어난 작은 열매, 분홍 날개가 예쁜 작은 새, 달팽이와 나비 등 작은 생물들.

비오고 바람 부는 날에 특히 잘 태어나는 것도 있대요. 꼬마들과 이 대목을 읽으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도 '옹달샘'을 생각해내진 못했어요. 의외였네요. "바람이 불고 비오는 날 태어나는 것은 바로 옹달샘"이었답니다.

20170521_165802_resized

 

속 작은 집에는 꼬마가 살고 있어요. 친구를 기다린답니다. 숲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숲에서 보내는 초대장을 우지현 작가는 아이의 목소리로 전해주었네요. 친구를 기다리는 아이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 순간에도 또 누가, 무엇이 숲에서 태어날까? 숲에가면 누구를 만나게 될까? <내가 태어난 숲>은 진행형의 확장, 미확정의 즐거움. 그래서 더 독자를 설레게 하는 그림책이네요.


 

20170521_164039_Burst01_resized
<내가 태어난 숲>은 수목원에서 읽었어요. 책 속 부록처럼 작은 책자가 함께 왔는데 본문의 그림과 아주 똑같은 스케치로 채워져 있어요. 자수 놓는데 자신 있는 이라면 이 책자를 본 삼아서 자수를 놓아도 좋겠고, 색칠북으로 이용해도 좋겠어요. 수목원 평상에 배 깔고 엎드려서 꼬마들이 <내가 태어난 숲>을 예쁘게 칠했답니다.
*
숲을 소재로 한 많은 그림책이 있지만 <내가 태어난 숲>처럼 아름다운 자수로 한땀한땀 만들어진 책은 드물 거예요. 한국의 독자뿐 아니라, 세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만나고 아껴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결국 숲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질테니까요.
20170521_165549_resized

20170521_165700_resized
20170521_161347_resize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르노빌의 목소리 * 천공의 벌

 

5월 미세먼지가 극심하던 때, 어쩌자고 만보걷기를 매일 했는지 부작용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프다. 특히 두통. 머릿 속이 미세먼지 곤죽이 되어가는 흉칙한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면서 도통 책에 집중이 안 된다. 가볍게 소설을 읽자 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들. <체르노빌의 목소리>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인지라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았지만, 함께 집어 든 <천공의 벌> 역시 마찬가지로 원전 재앙을 경고하는 소설인줄 꿈에도 몰랐다. "천공의 별"로 제목을 잘못 기억한 이후로 계속 "별"을 소재로 한 SF소설로 착각했으니 말이다.

*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집어든 책의 조합이 참 묘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천공의 벌>. 가뜩이나 요즘 미세먼지과 유독물질의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거나 책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위험에 잔뜩 주늑들었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는 판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들이 동시에 "핵, 핵, 핵"하며 내 안에서 울려대니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20170526_171617(1)_resized.jpg

 

 

먼저 <체르노빌의 목소리>.

공포소설도 아닌데, 책을 읽다가 엄습하는 공포감에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펴 들었을 정도였다. 이야기가 논픽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통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하여 그리고 지금은 구경꾼인 나나 또 다른 어떤 독자가 더이상 구경꾼이 아닌 희생자 당사자가 될 지 모른다는 실존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을 찾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그 질문을 자주 하더라. 당신은 어떻게 이런 고통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었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작가는 담담히 답하더라.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위험이 큰 직업군이 있다고.

*

목소리를 채집하는 작업이야 많이들 한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을테고 깊을수록 칭찬받을 터이다. 특히 1986년 4월 26일의 사건처럼 두고두고 인류사에 영향을 미치는 대재앙에 대한 기억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기억하는 이의 처지와 관점과 경험에 따라 조각들만 모이기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많을수록 좋겠지. 문제는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얼마나 잘 하는가인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놀랍다! 대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이나 목소리를 지우고 상대를 부각시키는 기술은 쉬워보여도 어려울터인데 관찰자로서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지워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남았다. 체르노빌 이후 일상화된 죽음과 불신, 사랑과 생명의 정의가 다시 세워지고, 사회적 관계가 재조정되는 현실, 은폐와 헌신. 집단주의의 폐해, 동시에 그 집단주의에서 가능했던 신화와 등장했던 영웅들. 우리는 바이오로봇(bio robot)이라고 부르지만 그 한명한명 영웅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400여 페이지에 담았다.

 

*

고위 공무원, 말단 직원, 영웅 훈장은 탔지만 방사능에 온몸을 태우고 사라진 소방관의 부인,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들, 역사학자와 문맹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진작가, 환경운동가. 다양한 사람들의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혹자는 자신들의 고통을 팔아 먹는 잡범취급하며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고, 혹자는 "당신은 나를 관찰하고 있잖아요."하면서 조용히 비난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곧 자신들의 생명이 사그러지더라도 기록은 남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가 이 집합적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목소리를 모아주었고, 그들이 남겼던 쪽지, 일기, 기록들을 넘겼다. 작가는 오랜 세월 이를 삭히고 곰삭혀서 핵발전소의 공포를 전세계 독자에게 전한다. 1986년의 사건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진행형이며 앞으로 필시 진행될 재앙으로서 전한다.

20170514_183553_resized.jpg


20170603_193823_resized.jpg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데, 난 이제서야 처음 읽어본다. 1985년에 나온 작품인가본다. 이제야 읽는다. "별"이 아니라 "벌"이었다. 최신 전투 헬기 빅 B의 B를 따온 닉넴 같았다. 일본의 고속 증식 원형로에 빅 B를 추락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천공의 벌"이라는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폐기하라는 요구를 한다. 한국판 번역본이 670여페이지인데, 한 자리에서 술술 다 읽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이 소설은 읽다보면 안다. 작가가 일본 핵발전소 현황 및 방사능 폐해에 대해 상당히 깊게 공부하고 쓴 작품임을. 군데 군데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심어 놓았다.

*

 백화점 에어컨이 꺼지자 쇼핑하다가 더워진 아줌마가 원전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는 부분은 어쩌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 아닌 하이라이트일지 모르겠다. 폭탄 터지거나 사람 목숨 왔다갔다 하는 긴장의 장면은 아니지만, <천공의 벌>을 읽는 대다수 독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타겟으로 삼는 자들이 바로 "침묵하고 모른 척하는, 당장 내 눈앞의 재앙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모르는 척 하는 침묵하는 대중"인 것을.

에어컨 꺼져서 더워진 아줌마는 "아무튼 (원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이미지는 있었지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다. 가나가와 현에는 원전이 없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을뿐이다. 실은 전국의 비등수형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가 요코스카 시 구리하마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돼 연료를 실은 적재 차량이 선도 차와 경비 차의 호위를 받으며 심야에 은밀하게 운반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송차량이 도시를 통과하는 도중에 한신 대지진급 지진과 맞닥뜨릴 경우, 연료 용기가 파손돼 지진 재해와 방사능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 재해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아는 바 없었다. (pp. 254-255)"

*

이 소설 이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은 터졌고 한국에서는 잦은 지진이 발생했다. 북유럽의 단단한 지반과는 달리 한국의 무른 지반에 방사능 폐기물을 저장할 안전한 공간이 없음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된다. <천공의 벌>이 경고한 이후, 일본 고속 증식 원형로 몬주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이 터졌어도 우리는 계속 뇌까린다. "위험할 것 같은데, 당장 나랑은 상관 없지 않아?"

*

절 대 그 렇 지 않 다. 나뿐 아니라 후대손손 상관이 아주 크게 있는데, 당장 사건이 터지지 않았을 뿐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 -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
이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


20170524_181758_resized.jpg

 
이인의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은 그 방대한 참고도서를 쌓아놓기만 해도 "얕지 않을" 듯하다.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이라는 부제에 부합하는 참고문헌 목록은 "다양성"의 향연이다.  본문에서 소개한 지그문트 프로이드, 조르주 바타유, 미셸 푸코 등 8인의 학자 대표작은 물론이거니와 김형경의 <사람, 장소, 환대>(2015)이라는 최신 인류학서에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1925)까지 250여권의 참고서문헌을 나열하기에 무지한 독자인 나는 살짝 주눅부터 들고 책을 읽었다.

*

 

2012092741151_2012092781361.jpg

 

파워블러거 (http://blog.ohmynews.com/specialin/)이자  "다중지성의 정원" 등에서 인문학 강의를 해온 저자 이인은 (다른 작가들이 ̄불리 다가가지 못했던) "성性을 맛깔나게 요리하고자 오랫동안 갈고 닦은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중략)… 사랑을 잘 알고 잘 나누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우리는 좀 더 진실하고 건강한 어른이 될 필요가 있지요. "(pp. 9 -10)라며 성을 요리한 인문요리사로서의 목적을 밝혀준다.

*

서문에서의 "갈고 닦은 칼"이란 이인 작가의 독서력, 공부내공을 비유한 표현일텐데 실로 그는 밖으로 끌어내는 젊음의 유혹을 이기고 참 진득하게도 책을 후벼판 듯 하다. "뜨거운 / 생의 배꼽 위에서/ 복상사/ 하는 것만이 / 내 꿈의/ 전부"라는 김언희의 시(詩)를 위시하여 문학, 인지과학, 여성학, 사회학, 진화심리학, 철학, 생물학, 행동경제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사유한다. 살짝 아쉬운 점은 서구의 지성사에 주로 기대다 보니, 동양 (동/서양 이분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권에서 성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함구한다.  참고 문헌에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이 기재되어 있지만 본문의 인용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만 못찾았나. 다시 읽어야겠다!). 

*

사실 노트를 여러 장 채울 정도로 열심히 메모하며 읽었는데, 워낙 방대한 이론과 학자들이 소개되는지라 그 방대함을 꿰뚫는 한 줄을 기억하지 못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 줄을 못찾으니, "21세기의 지성인이라면 이 정도의 성 지식은 있어야 한다"라는 출판사 측의 홍보 문구 앞에서 다시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 한 줄을 시원하게 뽑아내지 못한데 대한 변명을 하자면, 2장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나 4장 베티 도슨의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개인의 성해방을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7장 제프리 밀러의 <연애>나 8장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종 species'으로서의 인간의 성에 접근하는 등 챕터마다 관점과 초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초보 독자의 얕은 시각에서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의 핵심을 뽑아보자면, 인간의 다양성과 본연의 자유를 인정하라는 탈억압의 시선이었다. 이인 작가를 대면해보지도 그의 다른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글로 유추했을 때) 그는  권위에 저항적이고 다양성의 무지개를 존중하는 자유인같다.  "우리 몸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두 등급으로 나뉘지 않으며,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정상의 무지개" (p. 221)라는 진화 생물학자 조안 러프가든 (Joan Roughgarden)주장을 빌어온 것도 그의 지향성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

본문에서는 미셸 푸코를 빌어와 성이 어떻게 억압의 도구로 기능하게되었고 그 작동 방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언급한다. 담론으로서의 성과 행위로서의 성 모두 음지에서 이뤄질 때 이것이 오히려 지배를 용이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미국은 밤이면 온갖 환락이 밀물처럼 들어차지만 낮에는 몸의 쾌락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종교 문화가 개펄처럼 드러나는 사회" (p.232) 라고 그 성의 은폐와 위선을 비꼬는데 그렇다면 그가 본 2017년의 한국 사회는 어떠할까? 복상사를 갈구해도 복상사 하기 어려운 위선사회일까? 획일적인 정상성을 서로 강요하고 서로 감시하고 침묵하는 사회일까? 정작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해 이인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나열된 많은 외국 학자들의 이론과 사례를 넘어서.

 

 

 

20170526_101310_resized.jpg


 

20170526_102504_resized.jpg


 

20170526_103600_resized.jpg


 

20170526_104244_resized.jp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