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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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적 풍토, 독서열기는 한국과 어떻게 다르길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원제: Rage and Time: A Psychopolitical Investigation) > (2017[2006])가 "유럽 철학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라 한다. 80여쪽의 서문만 거듭 읽으며 활자의 늪에서 헤매는 우매한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가 시사하는 높은 가독률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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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는 '분노'를 키워드로 서구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개인 차원의 '욱'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지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자 변화를 이끄는 중추 동력이었다. <일리아드 Iliad>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첫 장에서는 영웅 서사시에서 분노를 칭송하는 것이 곧 당대 사람들이 분노를 가치 있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분노가 가진 순수한 힘은 길들여지고, 현대에 이르면서 사람들에게 역으로 '망설임'이 권위이자 미덕으로 내면화되었다고 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이처럼 분노가 개발되고 관리되는 단계는 거의 2000여년 전에 시작,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본문에서는 "사육화된 분노(32)"라고 표현하는데 '사육'에 해당하는 원어가 궁금해진다.
'분노의 사육화' 관점에서 보면, 20세기의 폭력은 '분출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대리인들이 자신들의 사업적 기준에 맞추어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통제하고 관리한 결과 (56), 즉 기획된 폭력이다. 분노는 증오의 문화를 통해 기획된 형태로 구현되는데 (117), 예를 들면 복수가 그러하다. 분노가 은행 형태로 축적되면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역사적 행태로 변모한다 (123). 성숙되지 못한 분노가 지엽적으로 표출되면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분노 자산을 낭비하지 않고 낡은 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세계 혁명'의 동력이 될 수준으로 축적하려면 기다릴 필요가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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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티모스적 역동성에 대한 이해, 즉 사회 심리 체계에서 분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차단되었다고 본다. (45) 그러나 21세기 전반부도 대규모의 갈등으로 뒤덮이리라 예측하기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분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라는 어젠다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60) 이 작업을 바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하는 셈이데, 그 스스로는 이 작업을 "전 세계적으로 작동되는 분노은행 건설과 관련된 연구관찰(266)"이라고도 칭한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유럽지성사는 물론, 경제학, 정신분석학, 역사, 인류학, 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자료를 제시하기에, 나같은 무지한 독자는 뇌에 당분이 많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난해한만큼, 독창적이어서 흥미롭니다. 특히 축적된 분노를 운용할 귀중한 자본으로 해석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분노은행은 정당이나 정치 운동, 특히 좌파적 정치 스펙트럼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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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전 세계적 관점을 지닌 분노의 수집 장소가 없다(336)"는 점이다. 분노가 고립되고 분산되어 이전 시대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다. 미래 세계에서도 분노는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단적 형태로 결집되지 못할 것이다. (418) 안타깝게도, 교활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신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에서는 "분노와 반체제적 에너지"가 결집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성도, 이론적 구심점도 상실된 상태에서 언론과 TV가 '행복'이라는 환타지로 사람들을 눈 멀게 했으니 분노가 결집될 수가 없다. 급진적 행동주의라는 면에서 공산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는 이슬람주의 역시,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보편적 반체제 집단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415) 미래 사회에서 분노가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
그렇다고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가 분노의 전복력을 부정하는 책은 아니다. 마치는 글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그가 희망하는 '세계 문화'를 제시한다. 그것은 "보복의 형이상학과 그 정치적 반향을 적절한 수준의 성찰로서 깨부수는 포스트 일신교적 문화 (421)," "문화 상호주의와 트랜스 문화적 균형을 갖추고 반권위적인 부드러운 도덕성에 바탕을 둔 실력주의이자, 뚜렷한 규범적 양심과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문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인칭 시점에서 건설된 합리성의 문화 (42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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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야기가 있는 집" 측에서 이 책을 주인공이 "분노"인 소설에 비유하며 강력히 권한다. 어려워도 포기말고 공들여 한장 한장 읽다보면 독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절대 동감한다. 꽤 어려운 독해였지만, 희열이 대단하다. 특히 4부 '중심에서 분리된 분노'와 마치는 글인 '적대감을 넘어서'는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속뜻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나 어려운 철학에세이의 번역을 해준 이덕임 번역자에게 고마움의 인사와 동시에 아쉬움의 말을 남기고 싶다. '문화 상호주의,'니 '분노의 사육화' 등 용어 중 일부 해설이 필요한 단어는 독자를 위해 언어를 병행 기재해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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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주제와 모티브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 와의 가상대화에서 비롯되었다 (76).  "후쿠야마의 창의적인 통찰력은 외부로 뻗어가는 문명의 전쟁 에너지가 종식된 바로 그 순간에 자유세계 시민들 사이의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과 질투로 가득 찬 투쟁이 역사의 무대 중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시민들은 항상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불만족의 물결에 젖을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 인간은 티모스적인 불안의 에너지에 시달리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1)" 물리적인 전쟁은 끝난 듯 보여도, 형이상학적 전쟁은 불가피.  "과거의 세상에는 노예와 농노, 시대에 대한 불만을 품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었다면 현대 사회에는 패배자 (Verliere)들이 있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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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패배자에는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종교에 빠져, 얼짱 외모를 과잉 보상의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나 정작 자신은 외모로서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이도 해당한다. 페테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더 시니컬하게 나아가 '보통 사람'을 재정의하는데, "진보된 자본주의에서 과잉 보상으로부터 제외된 이 (368)"라고 콕집어 명쾌하게 말해준다. 분노가 가진 엄청난 전복 에너지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급진적 무관심과 극단주의적 권태에 빠진 이야마롤 어쩌면 보통사람일지 모른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무기력과 무관심에 젖어 있는 보통의 독자, 뒤통수를 확 친다. '거대한 숫자'는 의미가 있다고. 연합해서 집단적 이익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면 강력한 당파가 될 수 있다고.

2016년 광화문 광장과 대한민국 전역을 달군 촛불집회의 열기가 바로 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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