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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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천공의 벌

 

5월 미세먼지가 극심하던 때, 어쩌자고 만보걷기를 매일 했는지 부작용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프다. 특히 두통. 머릿 속이 미세먼지 곤죽이 되어가는 흉칙한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면서 도통 책에 집중이 안 된다. 가볍게 소설을 읽자 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들. <체르노빌의 목소리>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인지라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았지만, 함께 집어 든 <천공의 벌> 역시 마찬가지로 원전 재앙을 경고하는 소설인줄 꿈에도 몰랐다. "천공의 별"로 제목을 잘못 기억한 이후로 계속 "별"을 소재로 한 SF소설로 착각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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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집어든 책의 조합이 참 묘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천공의 벌>. 가뜩이나 요즘 미세먼지과 유독물질의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거나 책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위험에 잔뜩 주늑들었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는 판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들이 동시에 "핵, 핵, 핵"하며 내 안에서 울려대니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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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체르노빌의 목소리>.

공포소설도 아닌데, 책을 읽다가 엄습하는 공포감에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펴 들었을 정도였다. 이야기가 논픽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통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하여 그리고 지금은 구경꾼인 나나 또 다른 어떤 독자가 더이상 구경꾼이 아닌 희생자 당사자가 될 지 모른다는 실존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을 찾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그 질문을 자주 하더라. 당신은 어떻게 이런 고통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었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작가는 담담히 답하더라.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위험이 큰 직업군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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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채집하는 작업이야 많이들 한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을테고 깊을수록 칭찬받을 터이다. 특히 1986년 4월 26일의 사건처럼 두고두고 인류사에 영향을 미치는 대재앙에 대한 기억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기억하는 이의 처지와 관점과 경험에 따라 조각들만 모이기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많을수록 좋겠지. 문제는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얼마나 잘 하는가인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놀랍다! 대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이나 목소리를 지우고 상대를 부각시키는 기술은 쉬워보여도 어려울터인데 관찰자로서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지워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만 남았다. 체르노빌 이후 일상화된 죽음과 불신, 사랑과 생명의 정의가 다시 세워지고, 사회적 관계가 재조정되는 현실, 은폐와 헌신. 집단주의의 폐해, 동시에 그 집단주의에서 가능했던 신화와 등장했던 영웅들. 우리는 바이오로봇(bio robot)이라고 부르지만 그 한명한명 영웅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400여 페이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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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무원, 말단 직원, 영웅 훈장은 탔지만 방사능에 온몸을 태우고 사라진 소방관의 부인,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들, 역사학자와 문맹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진작가, 환경운동가. 다양한 사람들의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혹자는 자신들의 고통을 팔아 먹는 잡범취급하며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고, 혹자는 "당신은 나를 관찰하고 있잖아요."하면서 조용히 비난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곧 자신들의 생명이 사그러지더라도 기록은 남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가 이 집합적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목소리를 모아주었고, 그들이 남겼던 쪽지, 일기, 기록들을 넘겼다. 작가는 오랜 세월 이를 삭히고 곰삭혀서 핵발전소의 공포를 전세계 독자에게 전한다. 1986년의 사건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진행형이며 앞으로 필시 진행될 재앙으로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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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데, 난 이제서야 처음 읽어본다. 1985년에 나온 작품인가본다. 이제야 읽는다. "별"이 아니라 "벌"이었다. 최신 전투 헬기 빅 B의 B를 따온 닉넴 같았다. 일본의 고속 증식 원형로에 빅 B를 추락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천공의 벌"이라는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폐기하라는 요구를 한다. 한국판 번역본이 670여페이지인데, 한 자리에서 술술 다 읽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이 소설은 읽다보면 안다. 작가가 일본 핵발전소 현황 및 방사능 폐해에 대해 상당히 깊게 공부하고 쓴 작품임을. 군데 군데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심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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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 에어컨이 꺼지자 쇼핑하다가 더워진 아줌마가 원전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는 부분은 어쩌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 아닌 하이라이트일지 모르겠다. 폭탄 터지거나 사람 목숨 왔다갔다 하는 긴장의 장면은 아니지만, <천공의 벌>을 읽는 대다수 독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타겟으로 삼는 자들이 바로 "침묵하고 모른 척하는, 당장 내 눈앞의 재앙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모르는 척 하는 침묵하는 대중"인 것을.

에어컨 꺼져서 더워진 아줌마는 "아무튼 (원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이미지는 있었지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다. 가나가와 현에는 원전이 없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을뿐이다. 실은 전국의 비등수형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가 요코스카 시 구리하마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돼 연료를 실은 적재 차량이 선도 차와 경비 차의 호위를 받으며 심야에 은밀하게 운반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송차량이 도시를 통과하는 도중에 한신 대지진급 지진과 맞닥뜨릴 경우, 연료 용기가 파손돼 지진 재해와 방사능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 재해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아는 바 없었다. (pp. 2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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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이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은 터졌고 한국에서는 잦은 지진이 발생했다. 북유럽의 단단한 지반과는 달리 한국의 무른 지반에 방사능 폐기물을 저장할 안전한 공간이 없음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된다. <천공의 벌>이 경고한 이후, 일본 고속 증식 원형로 몬주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후쿠시마 핵 발전소들이 터졌어도 우리는 계속 뇌까린다. "위험할 것 같은데, 당장 나랑은 상관 없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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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대 그 렇 지 않 다. 나뿐 아니라 후대손손 상관이 아주 크게 있는데, 당장 사건이 터지지 않았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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