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키워드로 [밝은 밤]을 남긴다. 사진의 배열 순서가, 이 소설과 나의 인연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엔 실수로 [긴긴밤]을 읽었다. 독서모임 책제목을 "베스트셀러 & 밤"이라는 조합으로 기억했다 벌인 실수였다. 다른 참여자가 테이블 위에 [밝은 밤]을 꺼내놓는 걸 보자, 나는 과장된 높은 음색으로 헤헤거렸다. 미안하다 못해 당혹스러웠기에...



.'덤벙덤벙' 실수 때문에 독서 모임이 한 주 미뤄진 미안함을 상쇄하고자, 아니 너무 재미있어서 차오르는 사심으로 [밝은 밤]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읽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가족 파노라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민진의 [파친코]와 비교하는 리뷰도 보았다. 하지만, 메뉴판만 비슷할 뿐 속맛이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파친코]에는 댕기 머리에 한복 자락 나부끼는 주인공이 등장하건만 [밝은 밤]에 비한다면 치킨 스튜를 더한 퓨전 육개장 맛을 낸다. 도리어 [밝은 밤]에서는 청국장 냄새를 맡았다. 역사적 서사는 생략된 채 주로 인물 간 관계 및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두는 데도 말이다. 오해는 피했으면 한다. 나는 [파친코]의 열혈 팬이며, 맛이란 본래 맛보는 사람마다의 미뢰 밀도에 따라 편차가 크니까. [밝은 밤]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속내, 고구마 3개는 꾸역꾸역 삼킨 듯 답답한 속내를 꾹꾹 눌러두거나 역으로 화산분출시키는 방식이 묘하게도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사람은 인생의 침잠기에 울림이 큰 작품을 쓰는 걸까? ***, ****, 장영희 선생님,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으며 그런 궁금증을 품었더랬다. 최은영 작가 역시 [밝은 밤]을 쓰던 시기가 성인기의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_[밝은 밤] 작가의 말 中




그 힘들었다는 시기에, 심지어 마감기한이 세금 고지서처럼 따박따박 날아오는 연재소설을 써냈다니 최은영 작가의 필력도 필력이거니와 정신력에 놀라운 마음이 든다. 작가는 "삼천이(주인공 '지연'의 증조할머니)"라는 인물의 힘에 끌려 작품을 시작했다지만, 정작 주인공인 "지연"과 가까웠다고 했다. 또한 소설 속 인물, 지연이를 통해 힘을 얻어다고 고마워 한다. 지연은 천문학 분야 박사이자 연구원이다. 자녀 없이 이혼한 30대이며, 일부러 속초 어디매쯤 '희령'에 산다. 내가 행간을 통해 엿 본 지연은 잘 웃지 않고 생기 없고 과묵한 사람일 것 같지만, 예의가 참 바르다. 지연은 '희령'에 얻은 아파트에서 멋쟁이 이웃주민의 호의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친할머니셨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혈연관계이지만, 처음엔 서로 존대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러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지연의 엄마인 미선과 할머니는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댁에 초대받은 지연은 자신이 증조할머니 '삼천이'와 무척 닮은 외모와 성정을 지녔다는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긴다. 할머니를 통해,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절친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위선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와 결혼하여 일생이 고단했다. 예를 들어, 양민 출신 증조할아버지는 '백정의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증조할머니를 '구원'이라도 하듯 데려가 결혼을 했으나 정작 아내의 당당한 기백을 보고 '원래 양민이었던 것처럼 군다'라고 미워한다. 속이 참으로 좁다. 할머니의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6*25 전쟁 전 결혼했는데도에 피난 내려왔다가 한참 어린 어린 소녀를 아내 삼는다. 뻔뻔한 중혼의 피해자가 된 소녀가 바로 지연의 할머니이다.


나는 작가 최은영의 삶도, 인간관도 모른다. 다만 [밝은 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새비 아저씨'라는 이상화된 단독자를 빼놓고는 죄다 찌질하다는 점은 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제 위엄으로 착각한다. 과연 [밝은밤]에 후한 독자평을 주었던 이들 중 남성은 어느 비율일까 궁금할 지경이다. 왜 작가는 '남성'에게 특화된 냉소적 시선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작가는 대 놓고 그 "F," "F(eminism)"를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밝은 밤]은 (콕 집어) 여성의 힘, 위선과 폭력에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여성 연대,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신화적 DNA, 말의 주술성을 보여준다. 많은 여성 분들이 서로서로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대여기한이 끝나가 [밝은 밤]을 다른 예비 독자분들께 돌려드려야 할 때가 오니, [밝은 밤]의 명문들을 남겨야겠다.




핏줄을 통해 흐른다. 세대에서 세대로 주술적이기까지 한 氣가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47


참을 수 없이 찌질한...작가는 왜 남성을 찌질하게 그렸을까?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삶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61)

*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62)

**

지연의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어디 서방 앞에서!

-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기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네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 내레 너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널 단 한 번도 친 적 없다.

-기게 지금 자랑입니까?

이중결혼한 사위를 두둔하고 오히려, 남자 마음을 잡지 못했다며 딸을 비난하는 남편에게 증조할머니의 반격


밟으면 꿈틀. 당하지만 않는다.

서럽다. 문득 생각하다가 삼천이 너가 했던 말이 생각났댔어. 방앗간 사장이 내한테 뭐라 지랄한 적 있지 않간. 내가 빨리빨리 일을 못한다구 몰아붙였던 적이 있었더랬잖아.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서럽다, 서럽다 하니 삼천이 너가 그랬지.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고 화가 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구 말을 하라요...섧다, 섧다, 하면서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속병 드는 건 아니라고. (127)

증조할머니 삼천이에게, 삼천이의 친구 새비아줌마가 쓴 편지


여성끼리(만) 연대와 위로

'지도 학생 모임에서 지연씨가 왜 이 전공을 택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눈을 빛내던게 기억나요. 그 때 내가 많이 지쳐있었거든. 지금 지연씨 나이 정도였을 거예요. 만사가 지겹고 재미가 없었는데, 어린 친구가 왜 이 공부를 택했는지 밝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맘에 남았어요.'

...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후, 의기소침과 우울을 겪던 지연이 상사에게 위로 받은 대목.

이십대 초반 지하철을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를 오가며 통학하던 때가 떠올랐다. 항상 피곤했고 지하철에서는 대개 잠들어 있었다..'학생, 그러지 말고 나한테 기대.' 그런 말을 하며 자기 어깨를 내어주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그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잇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이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딸아! 중력(ㄱㅂㅈㅈ 끄는 힘)을 피해 멀리 날아라!

'조국을 빛낸 해외 동포' 시리즈는 1988년 여름부터 1993년 여름까지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암호학자 김희자 박사' 편은 1992년 9월 28일에 방송됐다.

...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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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13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넘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밝은밤 계속 피해 다녔는데..
자꾸 올라오는 리뷰보고도 미루고 있었는데 정말 당장 읽고 싶게 만드셨어요~~^^
최고~~!!!

여기선 땡투를 못하네요 ㅠㅠ

얄라알라 2023-02-14 09:13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혹시 손에 잡으시면 그 자리에서 다 읽으시게 될지도 몰라요^^ 이름은 상대적으로 평이했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알 것 같았어요^^즐거운 책읽기 하시기를.

페크pek0501 2023-02-13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인용을 곁들이며 풀어 쓰신 리뷰, 반찬 많은 밥상을 받은 듯 푸짐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이나 읽으셨다니 저도 꼭 읽어야 할 책 같습니다. 검색해 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2-14 09:14   좋아요 0 | URL
발레로 다져진, 몸 가벼우신 페크님에게는 많은 반찬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소설을 두 번씩 다시 읽는 ˝좋은˝ 습관이 생겼어요. 작가를 더 잘 알고 싶다보니 절로 그런 습관이 생기네요.(물론 별 5 소설만 ㅋ)

좋은 아침 시작하시어요. 페크님

반유행열반인 2023-02-13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어쩌다 실수로 두 권 읽게 되었으니 이득 아닙니까 ㅋㅋ두 권 다 읽은 (그러고 하나는 엄청 깐ㅋㅋㅋ)책이라 반갑네요.

얄라알라 2023-02-14 09:15   좋아요 1 | URL
ㅋㅋㅋ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열반인님 스톼~일의 농담 ㅋ 네네,
덤벙거리는 덕분에 따블로 읽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