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 죽기로 결심한 의사가 간절히 살리고 싶었던 순간들
정상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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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이 무료로 제공하는 "미리 보기" 서비스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사이다 들이켜기 전, 김 빼기 일부러 하는가? 종이책으로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김 빼기, 굳이 하진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의 '미리 보기'를 클릭했다가, 그대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자가 이제는 훌쩍 큰 아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편지 형식 도입부였는데, 부담스러울 만큼 저자의 고백이 솔직했다. '미리 보기'까지만 읽고 끝냈다면, 저자 정상훈을 '세속적 성공 면에서는 엘리트겠으나, 일상을 꾸리는 능력 면에서는 낙제점을 면치 못할 열패자'로 낙인찍을 뻔했다.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다 읽고 나니, 저자의 과잉 솔직함은 오롯이 아들을 향한 애정과 자기성찰로 벗겨져 나온 피부 비늘이란 걸 알겠다.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얼룩덜룩한 피부의 비늘을 벗겨내고, 새 살을 돋우려 했던 것이다. 책 제목에서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지만, 그가 진정 희구하는 것은 극단적 선택이나 단절이 아니라, 충만하게 지속되는 하루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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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의 저자 정상훈은 서울대학교 의대 출신으로 '행동하는의사회' 창립자이자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였다. 굳이 "서울대 의대" 출신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릴 때 그의 지인들은 "서울대 나온 의사가 뭐 아쉬울 게 있어서"의 반응을 보였고, 그의 어머니에게 그는 "서울대 나온 의사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의 시선, 특히 어머니의 기대는 저자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독이었다. 나는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읽으며,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에 이렇게 압도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곱씹어 생각하였다. 정상훈의 자기 파멸적이고 가족을 질식시키는 우울증은 뿌리를 두었는데, 바로 작가의 어머니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았다.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하는 게 일상이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라면 한 박스를 들쳐 매고 와서는 매일 저녁, 어머니가 차린 밥상 옆쪽에서 따로 입 꾹 다물고 라면을 드셨다는 일화는 듣기만 해도 폭력적이다. 저자는 결국은 가정을 깬 엄마와 같이 살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가 8살 난 아들과 아내 자궁 속에 둘째 아이를 남겨두고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으로 떠나간 이유의 근원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저자는 어머니와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입만 열면 서로 화를 내거나 상대를 정서적으로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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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가로서 정상훈 작가가 직접 경험한 건강 불평등 현장과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사이사이, 작가의 정신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가 한국을 떠나 시에라리온에 있어도, 저자에게 그 어머니는 제 몸의 세포 덩어리와 같아서 떨치려야 떨칠 수 없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의 현장에서도, 다제내성 결핵 감염의 공포 앞에서도, 에볼라로 인간이 존엄의 존재에서 그저 몸뚱어리로 전락하는 현장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던 근원에는 그의 우울증, 더 나아가서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정상훈 작가는 왜 '아빠, 할머니한테 무섭게 말 안 하면 안 돼?"라고 부탁하는 큰아들에게 왜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화가 나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의 큰 아들은 올해 성년의 나이에 들어선 것 같던데,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읽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성찰적인 인물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겠다.

정상훈 작가의 솔직함에 압도 당해서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작가의 개인사와 정신적 문제 측면에서만 소개했기에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책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몸으로 기록한 현장일기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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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7-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어떤 책인지 알겠어요. 리뷰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도요.
서울대 나와서 왜 우울증인가가 아니고, 제 시각에서 보자면 우울증은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을 듯합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인간 관계에 서툴고 고립되어 공부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떤 문제로 스트레스가 생기면 잘 풀 수 있는 방법을 모를 것 같아요. 운동을 좋아한다면 운동으로 풀 텐데,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드물 것 같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서울대 출신이라서 오히려 정신이 덜 건강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씀이에요.
이게 저의 편견일 수 있겠어요. ^^

얄라알라 2021-07-18 17:14   좋아요 0 | URL
저는 저자 정상훈에 대해 이 책에서 전하는 정보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정도 솔직한 자기성찰을 독자에게 드러낸 것도 결국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책의 후반부에서는, 저자가 어머니의 발병(치매)과 간병,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어머니와 화해한 내용이 등장하며 한결 톤이 부드러워집니다. 쓰면서 치유되고, 또 치유되었기에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뭉클해집니다.

페크님 좋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7-18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리보기 하면 거의 사게
되더라구요...

아주 책쟁이들을 낚는 그런
서비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07-19 11:2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미리보기 서비스는 레삭매냐님을 낚기위한 서비스군요^^

얄라알라 2021-07-19 23:42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께서 졸지에 ‘낚인˝ 분이 되어버리셨어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21-07-19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꼭 읽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2021-07-19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8-05 19:09   좋아요 0 | URL
<낯선 이와 느린 춤을>
고양이라디오님께서 소개해주신 이 책도 챙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