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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빛이 물질과 부딪치면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된다. 그런데 어떤 빛이 어떤 방향으로 반사/굴절되고, 어떻게 흡수되는지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삶이 어떤 방식,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이처럼 비전형적이고 무작위적인 빛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 삶은 무수한 기억의 조각들로 모자이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앤드루 포터의「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우리 삶 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 중, 어느 특별한 한 조각에 관한 열편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가 멘홀에 빠져 죽던 순간이거나, 서서히 사이가 벌어져가는 부모님의 모습이거나, 형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한여름 밤의 열기거나, 혹은 사랑했지만 아니 사랑했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이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있지만, 12년 전 여름, 탈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구멍」
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해 여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와 '떨어져'있던 내내 사실은 아버지가 시내의 한 모텔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어머니가 여전히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나 일이 끝나고 저녁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코요테」
내 형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은 이제 지나갔고, 나는 지금은 형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편히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형을 둘러싼 소문들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떠돌았을 때 내가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그 기억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강가의 개」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왜 내가 강의실을 나가지 않았는지, 그러기는커녕 왜 강의실 앞쪽으로 곧장 걸어가 로버트에게 시험지를 내밀었고, 그가 내 풀이를 살펴보는 동안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는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 앞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코네티컷」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
지워버릴수도 간직할수도 없는 기억들...
미워할수도 용서할수도 없고, 떠날수도 머물수도 없는 사람들...
이들은 좀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한 마디를 듣고, 상대방을 안심시키지 못할 게 분명한 한 마디를 하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했던 사람의 부고 소식에 통곡하는가 하면, 슬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설거지 하는 엄마의 간절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십여년 넘게 꼭꼭 잠겨있던 누군가의 마음속을 걸어들어갔다가 나온 것만 같다.
잠겨있던 그 세월만큼,
컴컴하고... 축축하고... 따뜻하며... 아릿하다...
앤드루 포터, 난 당신이 마음에 든다.
과거가 아니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현재의 삶 속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과정을 포착한 당신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자기 인식 너머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화법' 또한 마음에 든다.
뒷통수를 치는 반전도 극적인 전환도 그 어떤 인위적 장치도 하지 않는 당신의 '작법' 역시 마음에 든다.
하여,
나의 우연한 이번 방문이 다음번 당신의 초대로 이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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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비정상'이라는 걸 안다.
10여년이 흐른 뒤,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다른 모든 기억들과 뒤엉켜 특별한 인상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그런 평범한 생의 어느 한 조각으로 홀연히 망각되어질까...
아니면, 아니면,
지극히 '정상'이었던 내 삶이 기억과 부딪혀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되어 스스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식 너머의 어떤 세계로 접어든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