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두 작품처럼 보이지만, 두 소설은 접점이 존재한다. 바로 죽음이다. 일부러 의도해서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은 죽음 이후에 돌아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어떤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책은 '어떤 사람이 가장 인상 깊었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는데, 나는 단연 첫 번째 사람을 꼽을 것이다. 모든 인물들이 그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 자체가 누군가에게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진리가 동시에 접하는 순간이다. 천국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삶이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을 짚어낸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책의 줄거리는 익숙하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유지해 온 연인 중 한 명이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여러 작품들에서 제시된 바 있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쓸쓸함과 작은 희망은 우리의 마음을 괜시리 아프게 한다. 죽음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낯선 일이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삶의 특권이다. 두 책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이소라의 'Track 8'을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자주 접하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삶의 고귀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남은 자는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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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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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2014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돋보이는 '상상력'의 확장에 칭찬을 표하고 싶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몇 편 읽어왔는데, 전체적으로 '난해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물론 이번 수상작들이 읽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이전의 일부 수상작들에서 발견된 지나친 단조로움은 상당히 제거되었다. 나는 『몬순』을 통해 한국 단편문학의 지평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 현대 단편소설을 읽을 때 조금 더 많은 기대를 품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작품이 가장 우수했느냐는 심사위원의 견해일 뿐이다. 대상 수상작은 물론이요 유력한 후보작이었던「빛의 호위」나 「쿤의 여행」도 뛰어난 상징과 창의력이 돋보였으나,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프레디의 사생아」와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도 뛰어났다. 전체적으로 소재에 대한 작가들의 이해도가 높음도 알 수 있었다. 기린불, 헬게 한센, 파충류의 유전자 등에 대한 내용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만큼 섬세했다. 작가들은 가상의 존재를 창조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처럼 잘 구현해 내었으며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아홉 작품 속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킨 단편은 김숨의 「법 앞에서」였다. 이 작품은 위에서 설명한 수상작들의 장점이 한데 모여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과 열 손가락,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기로에 선 '나'는 '357'의 홀수와 '10'의 짝수 사이에 놓인 처지였다. 거의 대부분이 '나'의 의식의 빗발치는 흐름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내가 한국의 현대문학에서 느꼈던 인상을 새롭게 보여준다. 문장을 끝맺지 않으려는 의지와 기묘한 반복, 그리고 언어의 사소한 유희가 선을 넘지 않게 조절되어 있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작가의 집요한 상상력 덕분에 작품을 읽는 내내 나도 주인공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법'과 '사회'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법 앞에서 '나'의 부부에겐 '1'이었던 아이(유일한 자식)가 '5'의 아이(다섯 번째 가해자)로 변한다. 4701개의 레고는 16개가 결여되어 있다. 1인시위자가 대규모 군중으로 변한다. 홀수는 위치를 바꾸고, 시계의 숫자는 시시각각 변해간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드러난다.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깊이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 아들이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그러한 것까지. 그렇지만 어항 속 금붕어의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한 주먹 움켜쥔 동전의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죽어가는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같으면서 얼마나 다른가. (p.115)


 「몬순」과 「법 앞에서」는 주제에 있어서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좌절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구현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만물을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특정한 숫자로 설명하려 하기보다, 말로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하는 일보다 침묵을 지키는 일도 필요하다. 법 앞에서 가해자는 몇 년이라는 숫자를 구형받게 될까? 아니, 그보다 그 자는 제자리에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제자리를 통과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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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One More Day (Paperback)
미치 앨봄 지음 / Hyperion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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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고 가는 매력을 지녔다. 그 이야기의 속성이 무엇이든 독자는 찰스 칙 베네토의 증언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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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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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존경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가 나에겐 다소 낯설었다.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문학은 보통의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본문 뒤에 실린 심사평들은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10년 전에 비해 청소년 문학의 지평이 꽤 넓어졌고, 응모작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심사평을 보면 『시간을 파는 상점』이 선택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소년을 위한 소설도 일반적인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세상에 대해 조금 더 거칠고 솔직한 시선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었던 온조와 그녀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성장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과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동시에 읽었다. 어른을 위한 문학, 청소년을 위한 문학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어렵다'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주인공의 성별이나 나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어디에나 돋보였다. 어린 시절 한국 문학에 대해 지녔던 따분했던 편견은 어느새 사라졌다. 조만간 서평을 남기겠지만, 단편소설에 담긴 깊은 사유는 꽤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편소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분석했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어떤 어휘를 쓰고, 대화를 할 때는 문장에 무엇을 채워넣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판타지를 어떻게 구현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라는 심사평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은 말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온조는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이지만, 시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의뢰인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실천한 것이 전부였다. 모든 관계가 한 번에 풀리지 않았다. 한 아이의 미래에 대해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작가는 수수께끼를 여백에 남겨두었다.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여기서 『시간을 파는 상점』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청소년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 역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의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이것은 어머니가 딸을 위해 바치는 선물이다. 만약 이 소설이 상에 당선되지 않았다 해도, 적어도 작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리라.


 『당신의 정원』을 완성한 후에 『시간을 파는 상점』을 보았다. 나는 그 소설을 내가 쓴 최초의 청소년 소설이라고 구분했다. 처음부터 청소년을 위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을 담아내다 보니 작가 자신이 치유되었고, 그 기쁨의 순간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검증된 작품을 읽고 나니, 내 습작의 완성도는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우선 심사평에서 강력하게 지적한 사항을 위반했다. "청소년문학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은, 등장인물인 청소년의 입을 통해 작가의 설교를 듣게 되는 것이다." 즉, 등장인물인 청소년을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작가의 대변인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소설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문학이 아닌 우화가 되고 만다. 나는 우화를 그리고 있었다. 


 같은 범주 안에서 두 작품에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창작자로서는 신비한 경험이었지만, 독자에게는 분명 반갑지는 않은 상황이리라. 이미 수없이 많은 청소년 문학에 등장한 요소들이 반복되니까 말이다. 온조에게 홍난주가 있었듯이, 루이에게는 김원주가 있었다. 들꽃자유가 꽃들의 이름을 보내주었듯 아이들은 사계절의 꽃들과 함께 했다. 바람의 언덕에서 그 아이를 만났듯, 당신의 정원에서 기적은 일어났다. 그러나 온조와 루이는 다른 인물이다. 오히려 전자는 온의 어린 시절 모습과 유사하다. '딸을 위해', 즉 '온조를 위해' 작가는 시간을 파는 상점을 개업했다. 나는 루이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당신의 정원』은 나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루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글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하다. 나는 오늘도 루이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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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 출판사의 『현대영미희곡선 3』에 수록된 네 편의 작품, 즉 Mary, Mary by Jean Kerr, Rain by William Somerset Maugham, Verdict by Agatha Christie, 그리고 The Disposal by William Inge을 감상했다. 원어로 표기한 이유는 번역된 제목이 원제의 분위기와 맞지 않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네 작품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딘선가 본 것들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이후의 현대극에 상당한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Rain은 『타이스』라는 소설이 절로 떠올랐다. 정신적으로 타락한 여자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가 등장한다. 세상은 여자를 추방하려고 하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여자는 회심한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녀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낯익은 서사를 희곡의 형식 속에 녹여내니 꽤 새로운 체험이 되었다. 


 Mary, Mary는 네 작품들 중 가장 현대적인 감성에 가깝다. 가장 반대편에 위치한 것이 Agatha Christie의 희곡으로, 소설과 다름없는 추리극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그 과정을 풀어내는 방식이 20세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배우, 출판업자 등 뉴욕과 할리우드의 문화계에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이 극을 펼쳐낸다.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든 그들의 대사가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The Disposal은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극이었다. 제스, 아키, 룩크는 남아 있는 삶의 기간을 세어야 하는 사형수이고, 그들의 대화는 당연히 가시가 돋혀 있다. 그 속에서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본연의 불안이 보인다. 제스의 아버지가 찾아오는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극은 특별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제스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그를 적극적으로 반기지만, 아버지는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제스는 마지막까지 목사의 말에 설득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행적을 평가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형수 조가 죽음의 행렬에 동참한다. 나는 원제를 '처분'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인간을 마치 물건을 폐기하듯이 다루는 사형장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마지막 포옹'도 훌륭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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